33화.
“회장님, 샌드위치 드십시오.”
“거기다 그냥 둬.”
경식의 인기척에도 국현은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받친 채 눈을 뜨지 않았다. 구겨진 미간만으로도 경식은 그가 떠안은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
“전무님 결혼 문제로 머리가 아프신 모양입니다.”
“그래, 애초에 도운이를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건 맞아. 그때 나는 복수에 눈이 멀었으니까. 그런데 손제인 기자가 한 말이 자꾸만 맴돌아.”
아니, 정확히는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한 손제인의 얼굴이 맴돈다.
“죽은 아이는 분명 내 가슴 안에 있어. 그리고 도운이는 내 가슴으로 낳은 아이지. 그런 아이를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게 맞나 싶어.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야.”
“혹시 회장님은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최연정 씨와 회장님 사이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을 거라는.”
국현은 감은 눈을 떴다. 농담이라고 하기에 경식의 눈빛은 진중했다.
“살아 있다…….”
내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이토록 씁쓸했나. 국현은 쓰게 웃었다.
“허황된 꿈이군. 꿈에서도 만날 수 없던 아이야.”
자신을 지키지 못한 아빠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더군다나 내 아이는 아빠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테니 꿈에서라도 찾아오지 못할 테지.
현실을 자각하자 또다시 최연정에 대한 분노가 차오른다. 국현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일갈했다.
“잡다한 건 다 집어치우고. 조만간 심창진을 만나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경식도 더 덧붙이고 싶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하고 싶었다.
“아, 회장님.”
경식은 나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그 샌드위치, 사실 손제인 기자가 준비한 겁니다.”
“……손제인 기자가?”
“네, 전무님이 시켰다고 하면서 회장님을 챙기더라고요.”
“나를? 왜?”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경식은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국현은 퍽 당황한 시선으로 샌드위치를 응시했다.
아까 전에는 내 전부는 마음에 있다며 가슴을 채워 주더니.
“이젠 내 배까지 채울 심산인가.”
국현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손제인. 그 기자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자식이겠지.
* * *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웅은 차를 세웠다.
-사국현한테 연락이 왔어.
“사 회장답지 않게 숙려 기간이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 내일 만날 거야. 저번처럼 금도와 에덴 모두. 하 기자도 준비해요. 결혼 기사 쓸 준비 해야지.
창진의 들뜬 톤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인심 쓰듯 존댓말을 한 창진은 아랫사람을 다루는 태도로 태웅에게 내일의 임무를 안겨 주었다.
그건 태웅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중 첩자처럼 건국 일보와 금도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태웅은 창진 몰래 움직였다.
“꿈으로 보육원…….”
제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 이것 때문에 태웅은 이곳에 왔다. 제인이와 서도운이 자랐던 보육원에서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목적이 이루어지면 태웅은 금도를 이용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생각까지 하는 중이었다.
“운동장에서만 놀아야지. 이러다 차 다니면 큰일 나.”
“네에, 원장님.”
때마침 보육원 밖으로 나온 아이를 들여보내는 은선이 보였다. 태웅은 곧장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손은선 원장님.”
“누구시죠?”
인기척에 은선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 태웅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전 건국 일보 사회부 기자 하태웅입니다.”
“건국 일보 사회부라면…….”
“네, 제인이 직속 선배입니다. 오늘은 알려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고요.”
명함을 쥔 은선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수상하다. 제인이는 자신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떠들고 다닐 애가 아닐뿐더러 며칠 전에도 에덴 건설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은선에게 불현듯 제인을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스쳤다. 태웅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제인이가 지금 금도와 에덴 사이에서 무척 위험한 상황입니다. 저는 그런 제인이를 돕고 싶고요.”
은선이 고수하는 침묵 속으로 태웅은 날렵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니 제인이가 심채연 씨 때문에 다치기 전에 저한테 말씀해 주시죠.”
“그게 무슨…….”
“금도와 에덴 사이에서 제인이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애써 붙들고 있던 은선의 눈동자에 큰 파동이 일었다. 겁을 주면서 말로는 도리어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껍데기뿐인 친절이 은선에게는 익숙하다.
그 옛날, 엄마를 협박하던 심창진의 수법이다.
* * *
“초코야, 너희 아빠 왜 저러고 있어?”
오늘도 초코를 챙기기 위해 일찍 출근한 제인은 말소리를 죽였다. 조심스레 연 집무실 안에 제인의 인기척을 진즉 듣고 꼬리를 흔드는 초코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도운이 보였다.
“잠깐만, 초코야.”
아침을 먹은 뒤 산책하기. 며칠간 제인의 보살핌에 익숙해진 초코는 앞발을 들며 제인을 재촉했지만, 뒷전으로 밀려났다.
“설마 여기서 저러고 잔 거야?”
조용히 속삭인 제인은 이마를 찡그렸다. 도운은 분명 어제 입은 것과 똑같은 짙은 올리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사부작거리는 인기척에도 감은 눈은 고요하기만 하다.
대체 뭘 했길래?
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지러운 책상을 살폈다.
“하락한 주식, 에덴 호텔의 추후 성장세…….”
서류는 온통 일전에 회의에서 거론됐던 문제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종이 모퉁이에 서도운의 성미처럼 거침없는 필체가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한 게 눈에 띄었다.
심채연, 결혼, 손제인, 기억법.
전부 다, 도운이 고뇌한 흔적이었다. 제 자리를 보존하고 기억을 되찾을 방법을 세우느라 고작 몇 발자국 걸으면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도 마다하고 책상에서 밤을 지새운 것이다.
제인은 그런 도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폭풍 전야라고 생각했던 몇 주가 과민 반응은 아니었나 보다.
사국현과 심창진이 만난 후 이렇다 할 말이 없는 지금. 결혼설이 일단락된 것이라고 짐작하는 외부와 달리, 당사자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팽팽했다.
원래 가장 행복할 때 가장 불안하다고 하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인은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나는 행복하구나.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라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때, 낮게 갈라진 음성이 들려왔다.
“모닝 키스를 원했는데 눈으로 키스하는 것 같네.”
장난스럽고도 느리게 열린 눈동자에는 잠기운이 완연했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내가 눈을 떠요, 안 떠요, 누나?”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도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였다. 제인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몇 시간 주무셨어요?”
“두 시간? 그마저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잔 것 같지가 않네.”
농담은 아닌지 도운은 팔을 팔걸이에 세운 채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도운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제인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초코랑 있어서 외롭진 않았으니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제인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걱정 안 했는데요.”
“아, 그래?”
과연 그럴까?
말끝을 늘인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세운 몸이 휘청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것을 본 제인의 목소리가 보기 드물게 높아졌다.
“괜찮으세요?”
놀란 제인은 빠르게 책상을 돌아 단단한 어깨를 부축했다.
“이것 봐요. 어지럽…….”
걱정의 잔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도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려온 제인을 덥석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잡았다, 손제인.”
“뭐 하는 거예요!”
강한 힘이 몸을 옥죄어서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도운은 침대 위에 제인을 내려놓았다. 눈가를 꾹 누른 그는 제인의 무릎에 머리를 눕혔다.
“초코는 효자라서 오늘 아침 산책만큼은 나한테 양보할 거야.”
“……출근하셔야죠. 씻고 옷도 갈아입고.”
“아직 30분 남았어. 잠깐 쉬자, 나도.”
엉덩이를 빼고 싶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이 자신을 원하고 있어 꼼짝도 못 하겠다.
도운은 어리광을 부리듯 제인의 손에 입맞춤을 흩뿌렸다. 녹진한 숨결은 떨어지는 꽃송이처럼 제인의 피부를 간질였다.
그게 가슴을 너무나도 울렁거리게 해서. 꼴사납게 손끝이 떨릴 것 같아서. 제인은 슬쩍 도운에게 잡힌 손을 빼고 그의 가슴 위로 사뿐히 움직였다.
토닥토닥.
“그럼 조금이라도 자요.”
도운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부끄러워진 제인은 나머지 손을 그의 눈 위에 얹었다. 그러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차분히 도운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인아.”
누나.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와 닿는 손길이 부드럽고도 달콤해 도운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