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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32화 (32/79)

32화

연애하자는 도운의 대책 없는 고백에 제인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 건지.

결혼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며칠 전엔 사국현과 심창진의 만남도 있었는데 당사자는 정작 태연하다. 그런 제인의 마음을 들어 주는 건 초코뿐이다.

“초코야. 네 주인은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오늘도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제인은 초코의 아침을 챙겨 주었다. 열심히 밥을 먹는 와중에도 제 말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꼬리는 연신 좌우로 휘젓는다.

기특하기만 해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슬슬 업무 준비를 위해 몸을 일으킨 제인은 잠시 굳게 닫힌 도운의 방문을 바라봤다.

‘내일은 나 꼭 깨워 줘.’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자더니. 아침 일찍 오는 김에 도운은 제게도 초코와 같은 대우를 해 달라고 했다.

가뿐히 무시하고 초코 밥만 챙기고 나오기를 며칠. 어젯밤 도운은 제인에게 문자를 했다.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답장도 안 하고, 깨우지도 않을 거란 걸 예상한 모양인지 적절한 협박을 곁들이며.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간의 행동을 봤을 때 더 큰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래, 그것뿐이다. 자신이 손수 깨워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조용히 문고리를 돌린 제인은 도운이 잠든 침대 위로 향했다. 도운은 한쪽 팔을 이마에 올린 채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전무님.”

제인은 최대한 도운의 얼굴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전무님.”

깨우려면 확실히 손으로 흔들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살짝 내린 시선 안으로 벗은 도운의 상체가 휘감긴다. 어느 순간 제인은 그 몸을 눈으로 더듬게 됐다.

저 몸을 본 건 취임식 날 관계를 맺었을 때였다. 그때도 꼬맹이의 성장에 놀랐는데. 언제 봐도 조각 같은 몸이다. 저 몸이 불과 며칠 전엔 강인하게 자신을 옭아매고 키스를 하기도 했고.

“……안 되겠다.”

이만 나가야지. 서도운에 대한 감정이 증폭될수록 생각의 범주가 자꾸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

뺨이 홧홧해진 제인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뒤에서 뻗어 오는 손에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짜릿하네.”

이마에 닿는 뜨끈한 숨결. 허리를 옭아맨 다부진 힘. 뭉개진 가슴이 닿는 아주 딱딱한 근육. 제인이 엎드린 곳은 도운의 몸 위였다. 고개를 든 제인은 도운의 얼굴이 너무 가깝게 있다는 걸 인지했다.

“무슨,”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쭉 뺐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똑같이 일어난 서도운으로 인해 오히려 서도운과 마주하며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됐다.

그 순간, 말캉한 엉덩이에 닿는 대나무 같은 것.

시선이 겹치자 도운은 가감 없이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싶은지 알아?”

“……어떤 짓을 하고 싶으신데요.”

“아주 나쁜 짓.”

제인은 입을 벌렸다.

“……대.”

“응?”

이미 밖에서 난 인기척으로 잠에서 깬 도운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제인의 시선만으로 이렇게 됐다.

하지만 긴장으로 제 몸을 콱 조이는 허벅지를 애써 무시하고 느슨하게 벌어지는 입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딱 대.”

그러나 야릇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괘씸한 듯, 허공을 가른 제인의 손바닥이 도운의 입술을 내리쳤다.

이 요망한 입술.

* * *

교진은 도운의 입술을 보고 뜨악했다.

“야, 너 입술에 상처 뭐야?”

상사의 몸 상태는 비서의 책임 중 하나다. 교진은 집무실 책상 앞으로 가 도운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웃음을 흘린 도운은 턱을 뒤로 물렸다.

“고양이가 할퀴었어.”

“고양이? 고양이가 어디 있어? 초코는 어디 있고?”

“그 이상 알면 다쳐, 너는. 냄새 좀 맡았고?”

“어, 확실히.”

교진에게는 얘기하라는 듯 턱을 까딱이는 도운이 느긋한 포식자처럼 보였다. 주변에 속박된 것 없이 원초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에선 누구보다 치밀하게 움직이는 야생 동물.

오늘 아침, 도운이 교진에게 내린 임무부터 그랬다. 제인 씨 말로는 회장님과 심 회장이 따로 만남을 가졌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회장님의 호출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교진은 도운을 대신해 국현의 동태를 경식에게 물었다.

‘아부지.’

‘난 네가 그따위 혀 짧은 소리 내는 게 그렇게 무섭더라.’

‘그러니까요, 아부지. 며칠 전에 심창진이랑 우리 회장님 만났잖아요.’

‘전무님이랑 심채연 씨 결혼 이야기 나누신 거야.’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스리슬쩍 찔러 보려고 했는데. 눈치 빠른 경식은 아들의 의뭉스러움을 원천 봉쇄했다. 하지만 쉽게 물러설 교진도 아니었다.

‘그게 끝?’

‘그럼 그게 끝이지, 이놈아.’

‘아부지, 거짓말하지 마. 저번에 최연정 여사님이 말한 우리 회장님 아이 이야기도 했으면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케이. 나이스 캐치.

다 안다는 듯 도운이 알아내고자 하는 사실을 흘리자 경식은 기함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교진의 머리는 띵했다.

‘진짜야? 진짜 회장님한테 아이가 있었어?’

‘이게 또 나를 속여! 아이는 뭔 아이야! 조용히 해!’

대화를 복기한 교진은 총 모양을 만든 손동작으로 허공을 콕 찍었다.

“여기까지.”

“확실히 뭔가 있네.”

가늠하듯 실눈을 뜬 도운은 엄지 끝을 살짝 깨물었다. 첫 번째로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을 때, 도운은 굳이 최연정에게 아이 이야기를 시키는 심창진과 동요하는 국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그 순간 카메라를 놓친 제인도 얼룩처럼 눈에 밟힌다. 그동안 사람들이 떠들던 사국현과 최연정 사이의 아이는 말 그대로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다. 하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두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국현이 지금까지 심창진과 최연정을 미워하는 감정의 기승전결이 들어맞는다. 게다가 거짓으로 도배된 심채연의 조사서와 출생 기록이 불분명한 손제인의 조사서가 괜히 맞물리는 게 아니다.

도운은 두 사람의 조사서 위로 검지를 톡톡 놀렸다.

“네 생각은 어때?”

“어디까지나 내 가설이긴 한데…….”

교진은 도운이 쓴 시나리오와 같은 생각이었다.

“네 말대로 심채연이 보육원 출신이고 동생이 있었다는 거면 제인 씨랑 둘이 자매라는 거잖아.”

“그렇지. 그리고 손제인 출생도 금도 쪽에서 손을 썼다는 거지.”

도운은 각각 양손에 제인과 채연의 조사서를 들어 올렸다. 교진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만약 그게 진짜면 둘 다 회장님 아이라는 거야? 너 만약 회장님 호적 올라갔으면 심채연이랑 근친혼인 거잖아. 와, 심창진 대단하네.”

하지만 모든 일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을 만들고, 아는 자도 분명 존재한다.

“반대로 심창진도 최연정한테 속고 있는 거라면?”

“뭐?”

“한 여자가 두 남자를 제대로 저울질하고 있다는 소리일 수도 있지.”

무겁지도 않은 종이를 손바닥에 올려 이리저리 기울인 도운은 손에 힘을 탁 풀었다. 바닥에 나풀거리며 떨어진 조사서 위에는 채연의 얼굴이 보였다.

* * *

“초코야, 네 주인은 너보다 손이 많이 가는 것 같아.”

이상한 소리도 많이 하고, 때릴 곳도 많고.

“이렇게 아침까지 챙겨 줘야 하고.”

초코에게 말한 제인은 손에 들린 샌드위치 봉투를 들어 올렸다. 도운의 입을 때린 제인은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초코를 안고 줄행랑쳤다. 잘못한 건 이쪽이 아닌데 왜 마음에 걸리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집 같지도 않은 방에서 자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거기서 밥은 어떻게 먹어. 그렇지?”

“컹!”

얼떨결에 산책을 나온 초코는 신난다고 대답한다. 결국 제인은 샌드위치 네 개를 샀다. 자신과 도운의 것 그리고 교진의 것. 마지막은 초코 것이었으면 좋겠지만.

“손제인 기자님?”

“아, 회장님 비서님…….”

“네, 배경식입니다. 편하게 배 실장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때마침 나타난 경식의 상사, 국현의 것. 정말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지. 딱 세 개만 주문하던 그 순간 왜 그 얼굴이 떠오르냔 말이야.

주섬주섬 샌드위치 두 개를 꺼낸 제인은 나머지 두 개가 든 봉투를 경식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샌드위치예요. 회장님하고 배 실장님 드세요. 전무님이 준비하셨어요.”

“음?”

얼떨결에 받아 든 경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가 봐도 손제인 기자의 거짓말이었다. 도운은 아까처럼 교진을 시켜 비밀리에 일을 꾸미느라 바쁜 몸이다. 또 여느 부자가 그렇듯 이쪽도 서로의 식사를 걱정할 만큼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럼 이건 손제인 기자가 준비했다는 건데…….’

경식은 잠시 제인의 얼굴을 곱씹어 봤다.

“왜 그러세요?”

은근히 긴장 어린 얼굴, 묘하게 회장님을 닮은 얼굴. 게다가 저번에 회장님과 면담을 했을 땐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위로까지 하지 않았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이건 회장님께 꼭 전달해 드리도록 하죠.”

“아니에요.”

“초코도 안녕.”

경식은 포근한 미소를 짓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제인도 슬슬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마지막 인사가 왠지 도운이 준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은데…….

동시에 이쪽도 알아 달라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서도그]

액정에 뜬 이름을 보며 제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천천히 한다더니 문자에 전화까지 아주 착착 이행하신다.

“여보세요?”

-언제 와?

“곧 도착해요.”

-얼마나 걸리는데.

“집무실 문 열기 10초 전.”

그러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도운이 숫자를 줄여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덩달아 걸음이 급해진 제인은 얼른 걸어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저 왔어요.”

집에 온 것도 아닌데 황당한 인사까지 하면서. 턱을 괴고 제인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린 도운의 눈 밑이 잠시 짧게 경련했다.

“제인 씨 왔어요?”

“네, 이거 드세요.”

“오, 샌드위치!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고마워요.”

그 자리에서 포장을 깐 교진은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아직 끊지 않은 상태다.

제인은 샌드위치를 꺼내느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둔 전화를 손으로 다시 고쳐 잡았다.

“드세요.”

눈앞에서 샌드위치를 흔드는 제인의 손이 도운에겐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귓가에 스치는 음성과 더불어 실제 손제인이 자아내는 음성은 상상을 연기처럼 피워 낸다.

“나 지금 순간적으로 집 마련하고 싶어졌어.”

“왜요?”

“문 열고 들어오는 네 모습이 너무 예뻤어.”

신났다고 샌드위치를 먹던 교진은 그만 사레가 걸려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운은 나직한 진심을 핸드폰 속으로 실어 보냈다.

“그런데 내 식사까지 챙겨 주네.”

“…….”

“결혼하고 싶게.”

눈을 지그시 마주쳐 오는 서도운의 고백에 제인은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전화를 끊든가 반문하고 싶지만, 입만 달싹이게 된다.

서도운 앞에 서면 자꾸만 언어를 잃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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