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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31화 (31/79)

31화

도운은 제인의 허리를 야릇하게 쓸었다.

“이름 부르는 거 꽤 좋아하던 눈치던데. 천천히 하는 걸 좋아하면 말을 하지 그랬어.”

“……뭐 하자는 건데요.”

“손제인 꼬시기.”

쪽.

도운은 기습적으로 제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담백하지만 피부에 닿는 아찔함은 강렬했다.

“제인아, 우리 연애 먼저 할까.”

이러다 정말 숨넘어가겠다.

“전화도 하고, 문자도 하면서.”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인은 후끈거리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꾸물꾸물 도운의 품에서 벗어났다.

“회장님이 절 지켜보신다고 하셨어요. 오늘 심창진 회장이랑도 만나시는 것 같고요.”

“아, 그래? 그럼 나랑 연애하자.”

저, 서도그. 도운을 노려본 제인은 홱 몸을 틀었다. 어느새 달려온 초코가 그녀의 앞에 멈췄다. 초코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본 제인은 문득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요.”

“응.”

“앞으로 조금 일찍 출근해서 초코 밥 챙겨 줘도 돼요?”

“그럼 내 고백 받아 줘.”

저게 진짜.

“안 그러면 초코 없어.”

쐐기를 박는 엄한 협박에 제인은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새침한 머리가 시계추처럼 짤랑거리자 도운은 손에 얼굴을 묻고 큭큭 웃었다.

“귀엽긴.”

아닌 척 줄행랑치는 게 너무 깜찍하지 않은가. 게다가 분위기를 한껏 잡은 이 상황에서도 이성을 챙겨 보고를 하다니.

오늘 국현이 심창진을 만나는 이유는 분명 해결되지 않은 결혼 문제 때문일 것이다. 심채연이 옆에서 살살 부채질을 하면 심창진은 딸의 영악함도 모르고 더 활활 불타오르겠지.

그 불길을 제 회장님께 옮겨 붙이려는 것을 도운은 모르지 않는다.

“자꾸 귀엽게 놀아. 심창진, 심채연.”

손을 내리는 도운의 표정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래도 느리게 오려는 손제인을 재촉하려면 제대로 구린 쪽을 신속히 파내야 할 것 같다.

* * *

서도운이 찾는 보육원의 누나. 그 아이는 즉, 자신이 데리고 온 심채연의 자매이자 사국현과 최연정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

태웅에게 들은 실마리는 과거에 창진이 억지로 끊어 낸 비밀의 연결 고리가 다시 맞물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렸다.

그럴 순 없지.

창진은 결혼 문제를 핑계 삼아 사국현에게 만남을 권했다. 사국현은 늘 그렇듯 피하지 않았다.

최연정도, 그리고 죽었다고 믿는 제 아이들도. 국현은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늘 제게 도전했다. 우스운 투지였다. 최연정과 심채연. 제 것이었던 사람들을 빼앗기니 본능처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게 바르작거려 봐야 허공에 칼질만 할 뿐이다.

‘사국현이 후원하는 그 꼬맹이가 누나를 찾는다고?’

이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심채연을 데리고 온 후였다. 창진은 사국현과 서도운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동안 감시했었다. 어린 서도운은 그렇게 누나를 찾으며 울고불고한다고 했었다.

‘서도운이 찾는 그 애는 누구야.’

‘제 동생이에요.’

간담이 서늘한 예감이 들 무렵, 서재 안으로 말간 얼굴이 빼꼼 등장했다. 최연정을 닮아 예쁜 얼굴이지만, 저 앵두 같은 입술에서 나온 말은 무척 거슬렸다.

‘동생?’

‘네.’

성큼 다가온 창진은 채연의 앞으로 무릎을 굽혔다. 채연의 손에는 한 장을 북 찢은 스케치북 종이가 들려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는 아빠와 엄마라며 자신과 연정이 그려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채연이라며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단란한 세 가족을 뒤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아이.

구태여 이름은 묻지 않았다.

‘아니, 넌 동생 같은 건 없어.’

찌익!

도려내듯 없애 버리면 그만이니까.

창진은 세 가족을 제외한 뒤편의 아이를 가차 없이 찢어 냈다. 그리고 애정은 단 하나도 없는 눈빛으로, 채연의 창백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서도운이 찾는 누나는 너야. 네 아빠는 나고.’

‘…….’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동생이 있다는 소리 지껄이면, 다시 돌아갈 줄 알아.’

원래 네 세상이었던 보육원으로.

그때 채연은 처음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쏟아 냈다. 그 후로 동생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안녕, 도운아. 내가 네 누나야.’

데리고 온 보람이 있게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도 하고.

과거를 떠올린 창진은 일식집 프라이빗 룸으로 향했다. 다시 사국현을 만나야 하는 현실로의 복귀였다. 조용한 방에 들어온 창진은 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국현이 오기 전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

신호음이 끊겼지만, 부녀지간의 도란도란한 대화는 없다. 창진은 흥얼거리듯 느리게 물었다.

“서도운이 보육원에서 만난 누나를 찾는다던데.”

다 알고 있으니 알고 있는 걸 읊으라는 명령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급하게 들이쉬는 숨이 창진의 귓전을 스쳤다. 채연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맞아요.

“걔 어디 있어.”

-저한테 동생 같은 건 없다고 한 건 아빠예요.

채연은 곧 음성을 가다듬었다.

-그런 애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알아봤더라면 아빠 귀에 진즉 들어갔을 텐데.

때마침 문이 스르륵 열리며 사국현이 등장했다. 창진은 전화를 끊고 가설을 세웠다. 최연정과 심채연은 그 아이의 존재를 모른다. 그럼 역시…… 국현이 숨기는 건가?

손제인을 시켜 이 결혼을 막고, 서도운을 통해 제 아이를 찾아내기 위해? 그래서 채연이도 가져가기 위해?

“할 말이 많은 눈치군.”

슈트 재킷을 앞으로 당긴 국현은 창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치열한 제 머릿속과 달리 사국현은 여전히 품격 있다. 창진은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대나무 수액으로 성대를 축였다.

저 견고함을 부숴 버리고 싶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 결혼이 자꾸 무마되고 있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야. 으레 있는 일이니, 예정대로 하면 될 것 같군.”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자꾸 소문이 들려서 말이야.”

“무슨?”

국현은 손을 닦던 물수건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에 도운과 손제인 기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서도운 전무의 애인. 그게 애인이 아니라 사실은 열렬한 첫사랑을 찾고 있다는 소리가 있던데…….”

도운이 녀석과 손제인의 관계를 심창진이 알면 머리가 꽤 아파질 거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 국현은 팔짱을 꼈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 태도에 창진은 급격히 불쾌해졌다.

“알아본 바로는 그 애인도 손제인 기자는 아니라더군. 난 또 기사를 계속 터뜨리길래 일부러 막는 줄 알았더니 정말 오너 리스크로 스카우트한 기자인가 봐?”

마주한 사국현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창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만족감에 번진 미소에 당사자인 창진의 눈빛은 한층 낮아졌다.

“내 씨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이런 면에선 나랑 참 닮은 모양이지. 그런 말이 있잖나.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뻔뻔하게 저와 최연정의 이야기를 대입시키기까지 한다. 창진은 국현의 도발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가? 남녀 수만 다르지 결국 서 전무를 둘러싼 채연이와 이름 모를 여자의 치정 싸움이라는 건데…….”

기꺼이 과거의 자신들을 떠올릴 수 있게끔 말을 은근히 낮췄다.

“넌 모르겠지만, 난 아빠로서 좀 걱정이 되는군. 서 전무는 다른 쪽을 열렬히 사랑하는데 혹여나 아랫도리 간수 못 해서 우리 채연이가 아이를 가질까 봐.”

그건 과거 국현의 동태를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국현의 턱 근육이 콱 조여졌다. 국현의 손이 빠르게 창진의 멱살을 조였다.

“그렇게 말해 주니 아주 고맙군. 아이들 문제라고 했으니 어디 한번 말해 볼까?”

제대로 폭발한 사국현을 보니 창진은 입술을 뚫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와 최연정 사이의 아이는 멀쩡히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지만, 내 아이는 세상의 빛 한번 보지 못하고 죽었지.”

결국,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제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멍청함으로 내게 승기를 안겨 주니까.

“네 그 더러운 집착과 최연정의 갈대 같은 마음이 내 아이를 죽여 버렸으니까!”

그러니 몇 번이고 울부짖어.

실실 흘리던 창진의 웃음이 자신의 멱살을 강하게 잡고 흔드는 국현의 모습을 보며 더욱 강하게 터져 나왔다.

* * *

창진은 국현이 연정을 찾았고, 둘이 눈이 맞았다고 했을 때 정신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감히 나를 떠나고 사국현과 배가 맞아?

그깟 집안의 반대로 그를 떠났으면서 사국현을 택했다는 건 결국 돈 때문이었다. 최연정은 지나치게 가난했으니까.

그런 거라면 다시 돈으로 불러들이면 된다. 창진은 국현이 경영 수업을 위해 해외로 떠났을 때, 연정을 찾아냈다.

그녀의 곁에는 갓난아이 한 명이 있었고 배 속에도 아이가 있었다. 창진은 그 두 곳으로 스산한 시선을 던졌다.

‘둘 다 사국현의 아이군.’

‘…….’

최연정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창진은 그 침묵에서 더욱 확신했다.

‘그래, 날 버리고 다른 놈과 놀아나니 좋아? 그런데 어쩌나. 이제 사국현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 최연정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얼굴로 사국현에게 웃고 함께 뒹굴었다고 생각하니 집착의 불씨는 배가 되었다.

‘제안 하나를 하지. 너한테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부를 줄게.’

창백하던 눈빛에 생기가 실렸다. 창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물론 사국현의 아이를 버리면.’

너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좋아요. 당신한테 갈게요.’

최연정은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버리는 것에, 사국현을 버리는 것에. 그렇게 최연정은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이다. 사국현의 아이인 심채연마저도.

그리고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또 다른 사국현의 아이까지도.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삼박자는 사국현이 죽을 때까지 몰라야 할 진실이다.

심채연도, 최연정도 다 제 것이니까.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은 창진은 국현의 손을 강하게 떼어 냈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니 비소가 자꾸만 새어 나온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난 그저 아이들 결혼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이야.”

“……그래, 어차피 누군가는 이 매듭을 지어야겠지.”

어떻게든 엮였으니 누구든 나락에 떨어져야 한다. 국현은 상을 뒤집을 기세로 일어나 창진을 내려다봤다.

“애들 결혼 문제는 충분히 고민 후 연락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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