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살뜰히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담백한 말투와 달리 국현의 심장은 자꾸만 울렁거렸다.
“손제인 기자, 목적이 뭐지?”
이유 없이 자꾸 그러기에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마주한 시선이 짙어질수록 이 생소한 감정도 깊어져 말을 더 빠르게 쏟아 내 본다.
“하룻밤의 인연이라고 하기엔 도운이는 손 기자한테 강하게 끌리는 것 같고. 손 기자도 자꾸 결혼을 막는 거로 봐서는 도운이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또 내 비리를 터뜨리고, 심채연을 폭로하는 거로 봐서는 금도에도 일이 있는 것 같군.”
역시, 한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라 그런지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 제인은 뜨끔한 심장을 누르며 대답했다.
“전 그저 제가 빼앗긴 걸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빼앗겼다? 돈을? 사람을?”
의외의 대답에 국현은 실눈을 떴다. 그녀의 심중을 파악하려는 눈치라 제인은 힘주어 말했다.
“제 전부요.”
이름, 사랑, 사람, 그리고…….
“돈 주고도 못 바꿀 제 전부를 찾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아빠를 찾으려고 이곳에 왔어요.
“하지만 에덴과 서도운 전무님께 피해 가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제 밥줄은 챙겨야 하거든요.”
내뱉지 못한 말을 꾹 눌러 삼킨 제인은 올곧은 눈빛을 내세웠다. 국현은 안다. 저 진중한 눈빛이 어떤 뜻인지.
저런 올곧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본인이 다치는 한이 있어도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본인이 그나마 가진 것도 놓지 않는다.
“어쩐지 나와 비슷하군.”
지금껏 국현이 그래 왔기에 제인이 더 투명하게 보였다.
아이가 있었다는 걸 도운에게 감춘 이유는 어렸던 도운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서였다. 편모 손에 버려져 입양과 파양을 반복한 아이에게 ‘네가 내 아이를 대체했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이 나이까지 장성한 도운이 모든 걸 잊고 지내는 줄 알았다.
‘뭐? 하하! 그럼. 아저씨는 집도 아주 많고, 돈도 아주 많아.’
하지만 자신이 도운을 데리고 왔을 때 했던 말.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운이 스스로를 도구로 여기며 국현이 언제든 자신을 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너무도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면 도운은 욕심이 없는 아이였다. 집을 달라던 아이는 무엇 때문인지 집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되어도 집무실에서 생활했으며 국현의 뜻대로 경영 수업을 받고 금도와 적정선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랬던 아이가, 눈앞의 여자를 욕심낸다. 난생처음으로.
“금도에 붙을 거였으면 심창진이 영입 제안을 했을 때 받아들였겠지.”
“맞습니다. 제 뜻은 에덴에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아이가 새로이 보인다. 기죽지 않고 오목조목 말하는 것 하며 말은 잘 들어도 종잡을 수 없는 도운을 한 번에 휘어잡는 것 또한 새롭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는 건가.
심창진과 최연정에 대한 복수는 국현에게 큰 의미였다. 저를 짓밟은 마음이야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쳐도 아이를 죽인 그 이기심은 도무지 용서가 안 됐다. 고로 국현이 행하는 복수는 줄곧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떠난 제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도운이를 보육원에서 데리고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때는 도운이가 정말 제 마음을 줄 아들이 될지 몰랐기에. 그저 잘 키워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한 건데…….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식의 행복이 곧 부모의 행복 아니겠는가. 국현은 말끔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눈앞의 손제인을 조금 더 지켜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손제인 기자가 우리 에덴으로 들어와서 본 피해는 막대하지. 수습해야 할 거야. 도운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나 보자고.”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빠도 날 알아봐 주세요.
태연하고자 했지만, 다시 한 번 불쑥 내민 왼손이 떨린다. 어쩌면 자석처럼 당기는 부녀지간의 신호일 수도 있겠다.
제인의 당돌함에 피식 웃은 국현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이 왼손을 보니 갑자기 옛 생각이 나는군. 나에게도 전부를 줘도 바꾸지 못할 게 있었어.”
제인은 멍하게 굳은 채 뻗은 손을 내려놓았다. 국현의 표정은 도화지처럼 온갖 감정을 그려 내고 있었다. 후회, 원통함, 미안함, 그리움, 애절함. 바로 눈앞에 있는 제 딸을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코끝으로 알싸함이 몰린 제인은 황급히 눈을 깜빡였다. 몰려오는 울컥함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에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지?”
“여기.”
마주한 시선을 다시 한번 아로새기듯 제인은 왼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
“회장님의 전부는 항상 회장님 마음에 있으리라 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순간, 국현에겐 희미하게 미소 짓는 제인만 보였다.
뭐지? 이 감정은?
국현은 무거워진 공기를 체감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게 강한 위로라는 건 저릿한 심장을 통해 알았다. 이래서 이 아이가 밉지만은 않았던 건가. 이래서 가슴이 울렁거렸던 건가.
다시 한번 제인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수상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때 이 오붓한 분위기를 방해하듯 국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제인은 국현이 꺼내 든 핸드폰을 자연히 보게 되었다.
“이런 내가 있는 반면, 어디든 악인도 있기 마련이고.”
심창진. 꼭 결정적일 때 산통을 깬다.
제인은 주먹을 쥐며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한 회의실 안이라 대뜸 용건부터 말하는 심창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아이들 문제로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시간 되나?
먹먹한 감동을 쓰나미처럼 몰고 간다. 국현은 어느새 싸늘해진 표정으로 제인에게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제인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이 복수의 끝에서 그래도 알게 된 점이 있다.
“전부…….”
나를 모르는 아빠에게는 여전히 내가 전부. 그 사실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행복감을 느끼는 제인의 앞으로 또 하나의 해맑음이 다가왔다.
“컹!”
“초코?”
혀를 축 늘어뜨린 초코는 껑충 뛰어 제인의 다리에 앞발을 올렸다. 놀란 제인이 초코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그러자 다시 앞발을 내린 초코가 바닥에 축 늘어진 목줄을 입에 문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멈춰 선 제인의 손에 목줄을 자꾸만 들이민다.
“잡고 가라고?”
“컹!”
“어, 잠깐!”
목줄을 받아 들자 초코는 냅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초코가 안내하는 이 길 끝에 누가 있을지 제인은 대번 짐작이 갔다.
* * *
예상은 적중했다. 초코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초코가 이끄는 대로 사람이 없는 비상구 계단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니 에덴 호텔 뒤편 산책로가 보였다. 한쪽 어깨를 벽에 기대고 구두 앞코를 바닥에 찍고 있던 도운은 기다리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초코도 기다리고, 나도 기다리고.”
도운은 제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랑 같이 초코 산책시킬래?”
“초코가 저를 데리고 온 거예요?”
“응, 내가 엄마 모셔 오라고 했으니까.”
초코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다는 것보다 엄마라는 호칭에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진다. 마주한 눈빛에 웃음은 가득하지만, 장난기는 없다.
“그럼 전무님은 아빠겠네요.”
“당연하지. 네 옆에 다른 남자 끼워 줄 생각 죽어도 없어.”
목줄이 가죽이어서 그런가.
“내 옆에 설 여자는 너뿐이고.”
자꾸만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다.
목줄을 고쳐 잡은 제인은 걸음을 옮겨 근처 벤치에 앉았다. 멋쩍어진 제인은 해맑게 서 있는 초코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초코, 손.”
그러자 초코는 투박하게 손을 얹는다.
“앉아. 엎드려.”
완벽하게 알아듣고 이행하는 초코의 옆에 도운이 섰다. 내려다보는 제인의 정수리가 어쩐지 빨간 것 같아 귀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게 내가 개를 키우는 이유야. 개는 주인 말이라면 다 듣거든.”
도운은 검지를 뻗어 제인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한번 해 봐.”
초코는 이미 저 멀리 있는 풀밭을 뛰어다니고 있다. 대상을 명확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제인은 도운에게 명령했다.
“손.”
그러자 도운은 제인의 턱 끝에 닿은 손을 넓게 펼쳐 그녀의 뺨과 귀를 커다랗게 감싼다. 너무도 느린 손길이라 제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앉으면 이 손이 멀어지지 않을까.
“……앉아.”
하지만 도운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리에 앉으며 제인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을 쥔다. 덩달아 제인의 상체가 기울며 도운의 이마와 아프지 않게 쿵 닿았다.
너무 가까워 눈을 위로 올려 뜨자 안온함이 가득한 눈빛이 보인다.
“다음은?”
포근한 숨결이 인중을 간질였다. 제인은 갈피 잃은 시선을 도운의 얼굴 위로 두며 무작정 입을 열었다.
“엎드려.”
이건 못 하겠지.
“못 할 것 같아?”
속내를 간파한 듯 짓궂게 되물은 도운은 이마를 떼지 않은 채 서서히 일어났다. 몸이 빳빳하게 고정된 제인은 그 반동에 벤치에 점점 등이 닿게 됐다.
그 순간, 아예 눕지 못하도록 도운이 제인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얼굴을 감싼 손은 이미 떨어졌지만, 여전히 거리는 가깝다. 마치 아침에 나눈 키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