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오후가 되자 교진은 집무실로 통하는 내선 버튼을 눌렀다.
“회의 가시죠.”
-나가.
아침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처음 듣는 목소리다. 제인은 애써 기억을 억누르고자 모니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손제인 기자도 준비하세요.”
밖으로 나온 도운이 다른 호칭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직함을 뗀 이름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수습한 제인은 노트북을 챙겨 도운의 뒤를 따랐다.
회의실로 가는 동안 직원들의 시선이 별똥별처럼 이어졌다. 교진은 제인을 확인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너 어쩌려고. 회의실까지 데리고 가면 꼬장꼬장한 이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면 대놓고 지랄 한번 해 줘야지.”
보폭을 시원하게 넓힌 도운은 회의실 문을 커다랗게 열어젖혔다.
“제가 늦었나 보군요.”
이미 회의실 안에는 국현과 이사회들이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혹처럼 따라오는 제인을 보고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인사드리죠.”
도운은 부드럽게 제인의 어깨를 감싸며 소개했다.
“보시다시피 제 전담 기자이니 오늘처럼 핵심 회의나 핵심 일정을 소화할 땐 대동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전무로서의 제 행보도 대중들에게 더 확실히 밝힐 수 있겠죠.”
제인이 고개를 숙이려고 하니 어깨를 잡은 단단한 손이 제인을 제지했다. 의자를 빼주고 제 옆에 앉히기까지 하면서 아주 애지중지했다. 저게 어딜 봐서 상사와 부하 직원의 모습이란 말인가.
국현의 차디찬 시선이 도운과 제인에게 길게 이어졌다. 떨떠름한 이사회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전무로서의 첫 행보가 결혼설과 또 그걸 막는 기사이니, 이거야 원.”
“차라리 결혼설이 떴으면 주식이라도 오르지. 지금은 주가도 미친 듯이 하향세를 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결혼은 어떻게 될 예정입니까?”
결혼의 주인공은 도운이지만, 모두의 시선은 국현에게 흐른다. 흉흉한 민심을 국현은 가뿐히 다스렸다.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도운보다도 제인을 서느렇게 응시하며.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 이 바닥에서야말로 무작정 진행하는 결혼만큼 개연성 있는 건 없죠. 안 그렇습니까, 손제인 기자?”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제인에게 꽂혔다. 만년필을 굴리던 도운의 움직임 또한 멈추었다.
“결혼 문제는 저와……”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가볍게 제 손을 잡는 제인으로 인해 말문이 막혔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임원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전무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에덴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스카우트된 인재고요. 그래도 저의 의견이 듣고 싶으시다면…….”
우선은, 서도운에게 유리한 방법을 펼쳐 내야 한다.
“전 이 결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침착하게 내었다. 동시에 도운의 눈빛이 차게 내려앉았다.
“대답이 되셨다면 회의, 진행하실까요?”
국현은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저 흔들림 없이 이끄는 자세 좀 보시라. 알 수 없는 저 이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한 건데 오히려 명확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지 않나.
‘저놈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군.’
국현의 예상대로 도운의 속은 있는 대로 꼬였다. 면세 사업의 확산, 패키지권의 확산 등등 갖가지 의견을 조율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옆에 앉은 제인에게로 흘렀다.
조금만 나한테 매달려 줬으면 하는데. 항상 주인 손길 갈구하는 개새끼는 나뿐이지.
지금도 제인은 회의실에 오가는 주요 내용을 받아 적고 있다. 이 예쁜 손이 오늘따라 미워 보여 도운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제인의 손바닥을 펼쳐 냈다. 깜짝 놀란 제인이 채 반항을 하기도 전에 도운의 검지가 간지럽게 무어라 끄적인다.
바보.
제인의 미간이 왈칵 구겨져서야 도운의 얼굴이 녹았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비밀 신호를 보내는 시간은 잠깐뿐이었다.
“서 전무의 의견대로라면 실적은 당연히 상승세를 타겠죠.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건 지금 당장 떨어진 주가를 복구하는 겁니다.”
“주가야 내려갔다가 오르는 거죠. 너무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서 전무에게 심채연 양은 큰 것이었습니까, 작은 것이었습니까?”
훅 들어오는 비열한 질문에 도운의 잇새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든 하라는 소심한 협박인 거다. 경영의 경 자도 모르는 제인도 알아챌 정도였으니 그녀의 손에는 불끈 힘이 들어갔다.
탁!
그녀는 참지 못하고 노트북 엔터를 거세게 눌러 버렸다.
아무리 서도운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듣고만 있던 제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저 회사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저들은 서도운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그들 사이의 진실이야 저들은 당연히 모를 테지만, 말끝마다 심채연이 붙는 것 또한 용납이 안 됐다.
그러자 임원 한 명이 제인에게 매섭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뭡니까?”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소리가 컸네요.”
“뭐요?”
은근히 비꼬는 것 같은 언사에 도운을 공격한 임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보 아니고 예쁜이네.”
도운은 입가를 가리며 제인에게만 속삭였다. 교진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음을 감내해야만 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국현의 용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손제인 기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사적인 이야기는 저와 하시죠.”
“네 이야기니까 손제인 기자랑 얘기하겠다는 거 아니냐.”
이번만큼은 국현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제인은 맹렬한 두 시선 사이에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전무님. 올라가 보시죠.”
“같이 올라가.”
“아니요, 초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저도 곧 올라갈 거고요.”
그러니까, 나도 올라가서 널 얌전히 기다려라? 도운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제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감히 이 말을 거역할까.
“하여튼, 내 목줄은 제대로 잡고 있어.”
도운은 대신 국현에게 당부했다.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아프지 않게 다뤄 주세요.”
국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는 도운의 뒷모습을 주시하다 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앉아요.”
어딘가 의심스러운 얼굴. 오래 마주하자니 가슴이 묵직해진다.
* * *
“야, 제인 씨 대박이다, 진짜.”
“누구 여자인데.”
“제인 씨 없는 김에 이것 좀 확인해라. 심채연 조사서야.”
교진은 회의 도중 온 조사서를 도운에게 건넸다. 도운은 빠르게 핵심만 읽었다.
“출산한 병원도 없고, 보육원에서 있던 8년은 죄다 그럴싸한 외국 학교로 도배됐네.”
“뭔가 있다면 금도 쪽에서 철저하게 막아 놨을 테니까.”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도 않다. 책상에 조사서를 던져 놓은 도운은 초코의 목줄을 풀었다.
“야. 그런데 제인 씨 회장님이랑 둬도 되는 거야?”
“그럴 리가.”
먼저 제 손 냄새를 맡은 도운은 흡족한 표정으로 초코의 코로 손을 내밀었다. 아까 잠깐 잡은 것으로 제인의 포근한 향이 물씬 배어 있다. 그걸 지켜본 교진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야, 너 설마…….”
도운은 초코에게 부드러이 속삭였다.
“초코도 알겠지?”
“컹!”
“가서 엄마 데리고 와.”
곧 초코는 타닥타닥, 발톱을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갔다.
* * *
막 샤워를 마친 채연은 습기가 들어찬 거울을 응시했다. 욕실 거울 위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기다란 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너, 어깨에 점이 없더라. 손제인은 왼쪽 어깨에 점이 세 개나 있는데 말이지.’
하필 물방울이 궤적을 그린 위치는 왼쪽 어깨였다. 연정의 말처럼 채연의 어깨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걸로 저와 제인의 정체를 알았다니. 알고도 자신을 채연이라 부르고 지난 20년이란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니.
“기뻐해야 하는 거야, 슬퍼해야 하는 거야?”
고조 없는 음성이 욕실에 퍼졌다. 심채연이 심채연에게 내던진 질문에 거울에 갇힌 입꼬리는 파르르 떨린다.
손제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시작해 본인을 채연이라 속이며 살아왔다. 이제 와 채연이란 이름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지금 자신의 손에 가진 게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이 교활한 이기심에 채연은 문득 창진과 연정의 얼굴을 거울 위로 겹쳐 보았다.
분명 생김새로 따지면 자신은 두 사람의 딸이 맞다. 하지만 엄마에게 모정이란 탈수된 감정이었고 아빠는 자신을 끊임없이 미워했다. 아마 엄마와 사국현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계속 그러겠지.
“내가 서도운을 떼어 내고 싶은 것처럼.”
손제인이 택한 서도운에 대한 질투. 나를 버린 손제인에게 그 무엇도 내어 줄 수 없지만, 한 번만 나와 같은 심정을 느껴 봤으면 하는 바람.
연분홍색 슬립 원피스를 입은 채연은 욕실 문을 열었다. 원우는 그녀의 방에 얌전히 앉아 채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빠가 사국현이랑 만난다고 했어. 사국현은 분명 아빠 말에 흔들릴 거야.”
원우는 채연에게 팔을 뻗었다.
“흔들리면?”
“제인이가 돌아올 곳은 나밖에 없는 거지.”
채연은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의 종착지는 원우의 허벅지였다. 채연은 원우의 뺨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짙은 애정이 깃든 두 눈동자 속에 그녀가 비쳤다.
“단 한 번만 제인이가 나한테 매달려 봤으면 좋겠어.”
제가 누구인지, 지대한 애정을 그에게 확인하려는 것처럼.
“난 너밖에 없어, 채연아.”
“알아. 그래서 내가 널 아껴.”
지원우란 눈동자의 거울 속에는 오로지 한 여자가 존재한다. 혼란스러울 틈 없이 확신을 주고 사랑해 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어진 입술이 강하게 부딪쳤다. 바짝 말라 가는 결핍이 포만감을 되찾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