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28화 (28/79)

28화

문을 열자마자 다가오는 늠름한 자태에 제인은 손등을 내밀었다.

“초코, 안녕.”

꼬리를 무아지경으로 흔들던 초코는 그녀의 손등을 할짝거렸다. 간지러운 감촉에 살포시 미소를 지은 제인은 집무실에 도운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 목적지는 한곳이었다.

제인은 굳게 닫힌 도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전무님, 손제인입니다.”

“들어와.”

단정한 명령에 제인은 문고리를 돌렸다.

“어젯밤 뜬 기사 보고를…….”

그러나 버젓이 보이는 도운의 상반신에 할 말이 턱 막혀 버렸다.

“그렇게 빤히 보면 나 떨리는데.”

뻐근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는 도운의 어깨와 가슴이 그의 말처럼 꿈틀거렸다. 날렵하게 올라간 입꼬리엔 짓궂음도 가득하다. 정신을 번뜩 차린 제인은 눈을 내렸다.

“나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냉정하면 또 내 가슴이 울고.”

거짓말. 서도운의 가슴은 단 한 번도 운 적 없는 것처럼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팔을 뒤로 돌려 셔츠를 날렵하게 입을 때도 서도운을 둘러싼 근육은 늘어졌다가 조여지기를 반복했다.

“어제 집엔 잘 들어갔고?”

“네.”

“갑자기 심채연 튀어나와서 당황했겠네.”

“어쩔 수 없죠. 그런데 목격담이 떴더라고요.”

제인은 미리 인쇄한 목격담을 도운에게 건넸다. 기자들의 눈을 피할 순 있어도 세상만사에 관심 많은 국민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다행히 사진은 없지만, 어제 두 사람이 만난 한정식집의 이름과 둘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작성한 주식 커뮤니티 글이었다. 댓글에는 역시나 결혼은 진행 상태 아니냐며, 서도운과 심채연이 잠시 사랑싸움을 한 게 아니냐는 소설까지 적혀 있었다.

빠르게 읽어 내린 도운은 종이를 성의 없이 뒤로 던졌다.

“이런 건 지워 내면 그만이고. 손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그럼 나 넥타이 좀 매 줘.”

“…….”

“요, 누나.”

불쑥 또 선을 넘으려는 도운에게 눈을 치켜뜨자 존댓말로 응수한다. 진짜 능글맞다니까. 하아, 한숨을 쉰 제인은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셔츠 깃에 넥타이를 끼워 주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도운의 뜨거운 숨도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짙고 야릇한 시선이 얼굴을 배회하기에 제인은 신속히 손을 움직여 넥타이를 매 주었다.

“넥타이도 매는데 신발 끈은 왜 못 묶어?”

“신발 끈은 줄곧 묶어 주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럼 넥타이는?”

“넥타이는 가끔 태웅 선배…….”

도운의 넥타이를 흔들어 올리던 제인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야 태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멈칫함이 거슬린 도운은 망설임 없이 매듭이 지어지기 직전의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뭐 하세요.”

노골적인 짜증이 묻어난 손길이었다. 제인은 허망하게 풀어진 넥타이가 어이없어 물었다.

“질투 나서. 앞으로 네 손이 닿아야 할 남자는 나뿐이니까.”

도운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다시 매줘.”

그러니까 하태웅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마.

타이를 건네는 도운의 손길은 한없이 단호했다. 그 순간 제인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강한 독점욕에 발끝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문득 묻고 싶다.

“전무님은 왜 여기서 주무세요?”

도운이 제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가 내 집이고, 방이니까.”

“그러니까 왜요?”

도운은 허공에 얽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제인의 시선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어릴 때 누나랑 약속했어. 집을 주겠다고.”

그게 미치게 예뻤다. 도운은 손을 뻗어 제인의 새하얀 뺨을 감싸 쥐었다.

“처음으로 갖는 내 집에는 누나랑 같이 살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내 약속은 아직 유효하니까.”

도운은 키스라도 할 듯 고개를 깊숙이 기울였다. 제인은 입을 달싹였다.

그 약속, 기억하고 있었구나. 사탕을 쥔 어린애처럼 가슴이 들떴다. 기분이 좋아져 서도운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제인은 도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나른했던 도운의 근육이 팽팽히 조여졌다.

“전무님은 손의 감촉으로 사람을 기억한다고 하셨죠. 그럼 누나를 떠올릴 만한 기억법을 찾아보세요.”

“예를 들면 어떤.”

“말투나 생김새 혹은, 신체 특징 같은 거요.”

은근한 터치로 힌트를 준 제인은 뒤를 돌았다.

“아, 그런데.”

하지만 다시 멈춰 섰다.

“제가 만약 누나라면 전무님이 이런 곳에서 지내는 게 무척 마음 아플 겁니다.”

약속은 지킬 수 없을 때 누군가의 속박이 된다. 과거의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그게 못내 속상한 제인은 속마음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걸음을 옮겼다.

“손제인 기자.”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쫓아오는 음성이 들린다.

“제인아.”

발걸음이 멈춘 건 비단 도운이 잡아 세워서가 아니었다. 자유로이 내뱉던 숨이 어느 순간 맞물렸기 때문이다.

제인의 팔과 뒤통수를 끌어당긴 도운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제인의 입술을 탐했다. 입술이 온통 윤기로 가득해져서야 도운은 거리를 벌렸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하길래.”

도운의 눈 속엔 욕망이 그득했다.

“숨도 달콤한가 싶었지.”

* * *

골프공에 우드를 댄 창진은 신발 밑창을 푸른 잔디에 딱 붙였다.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야. 지금 내가 휘두르는…….”

쨍!

“이 골프공처럼.”

“나이스 샷!”

긴 포물선을 그린 골프공은 정확히 멀리 있는 홀 컵에 안착했다. 태웅은 캐디의 요란한 박수보다도 창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난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뤄 내고 말지. 봐, 골프공도 굴곡을 그렸지만 난 명중을 했잖나.”

“저를 부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하얀 장갑을 잡아 뺀 창진은 골프채를 캐디에게 건넸다.

“다음 홀은 이따가 하죠. 하 기자는 나와 잠시 걷고.”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후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다. 결혼 반박 기사가 터진 후 여러 소문이 나돌았지만, 창진이 연락이 없었던 동안 그가 제대로 열이 받았다는 걸 태웅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그것 또한 기자의 예리한 직감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서도운과 내 딸의 결혼을 밀어붙일 생각이야. 어제 두 사람이 따로 밀회를 했다는 건 이미 들었을 테고.”

역시. 결혼설과 반박 기사가 동시에 떴을 때, 암암리에 도는 지라시에는 사국현의 충직한 개인 서도운이 사국현과 최연정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이루어 주고자 없는 애인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 있었다.

어젯밤 서도운과 심채연이 만나기도 했고. 딱 서사를 만들어 내기 적합한 먹잇감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질문 하나를 하지.”

푸른 잔디를 느긋하게 걷던 창진이 돌연 태웅을 돌아보았다.

“서도운의 애인이라는 여자. 그게 혹시 손제인 기자인가?”

먹잇감을 낚아채기 전, 제아무리 흉포한 육식 동물일지라도 충분한 탐색은 기본이다. 그게 태웅을 이 드넓은 골프장으로 불러들인 이유다.

태웅은 창진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제인이는 서도운의 여자가 아닙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을지언정 지금은 아니다. 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가 보군.”

“회장님 앞에서 말을 허투루 내뱉을 수야 없죠.”

그러니 이까짓 거짓말쯤은 식은 죽 먹기다. 창진은 태웅을 이용하고 있지만, 태웅은 그런 창진을 이용해 제인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녀의 과거엔 금도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으니 더더욱 입을 조심해야 한다. 진실을 알아내려면 반은 주고 반은 남겨야 한다. 기자가 상태를 유도할 때 쓰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태웅은 작위적인 미소를 그려 내며 언변을 꾸며 냈다.

“제인이가 서도운의 애인이었다면 진작에 염문설이 떴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도운 전무는 단 한 번의 스캔들도 없었죠.”

“내가 거슬리는 부분이 바로 그거야. 웬만한 수컷은 한 번쯤 스캔들을 뿌리기 마련인데 서도운은 지나치게 깔끔해.”

창진이 손짓하자 태웅은 다시 잔디를 거닐며 입을 열었다.

“그러므로 제인이는 서도운의 연인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사국현 측에서 먼저 손을 썼을 테니까요.”

“그럴 테지. 그런데 난 왜 자꾸 손제인이 서도운의 기사를 막는 것 같을까…….”

이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럴 수밖에 없죠. 서도운은 지금 보육원에서 만난 제 누나를 찾고 있으니까요.”

“보육원……. 누나?”

과거의 키워드를 절묘하게 두드린 단어의 조합. 흘리듯이 내뱉은 창진의 고개가 단박에 태웅에게 향했다. 대뜸 마주친 두 눈에는 언뜻 수상한 이채가 서렸다.

틀림없다. 심창진은 제인이가 살았던 보육원에 대해 알고 있다.

태웅은 밀려드는 긴장을 삼켰다.

“저도 소문으로 들은 말입니다. 어쩌면 서도운은 보육원에서 만난 누나를 찾으려고 이 결혼을 막는 게 아닐까요?”

“……그런 소문이 돈단 말이지.”

보육원에 있던 누나. 제가 데리고 온 심채연이 아니라면 또 다른 사국현의 딸임이 분명하다.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던 아이. 보는 순간 잔인한 충동이 들 것 같아 심채연만 덜렁 안아 든 그 후로 그 보육원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무수한 가설을 그려 내는 창진의 눈동자가 골프장을 바쁘게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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