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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27화 (27/79)

27화

이젠 화조차 나지 않는다. 심채연에 대한 감정은 이미 일곱 살 때 겪은 모든 배신으로 동이 났으니까.

그래도 불필요한 자리는 아니었다. 서도운이 왜 자신을 떠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쩌면 서도운이 그녀를 더 빨리 알아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을 무렵, 집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두 실루엣은 서로를 향해 걷는다. 그렇게 가까워졌을 때, 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신발 끈 좀 묶어 주라.”

제인을 기다리고 있던 채연은 기꺼이 묶여 있던 신발 끈을 풀었다. 자그마한 정수리 위로 제인은 숨결을 떨어뜨렸다.

“내가 왜 지금까지 신발 끈 하나 못 묶는 줄 알아?”

채연의 손이 부드럽게 교차해 신발 끈을 엮는다.

“네가 평생 묶어 줄 줄 알았거든.”

그러곤 멈춘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듯. 채연은 시야를 어지럽게 하는 신발 끈을 주시하다 무릎을 세워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니까 선택해.”

서도운이야, 나야?

꾹 깨문 속마음은 아무 힘이 없다. 제인은 채연을 직시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도운이 다신 안 놓쳐.”

그리고 뒤를 돈다. 저의 속마음이 고작 서도운에 대한 감정인 줄만 알고, 또 자신을 혼자 둔다. 망망대해에 다시 홀로 남은 기분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뒤에서 원우의 놀란 인기척이 들렸다. 채연은 빨개진 눈으로 이 사태를 만든 시발점에게 원망을 쏟았다.

“엄마는 채연이를 언제 알아보셨어요?”

그 뒤에는 언제나 고고한 연정이 서 있었다.

“아니, 질문을 바꿀게요.”

“네가 제인이라는 걸 언제 알았느냐고?”

가려운 곳을 긁듯, 겨우 정돈시킨 혼란을 헤집어 놓듯 연정은 채연의 궁금증을 간파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운 얼굴에 띤 표정은 고상했고, 눈빛에는 서느런 초연함이 맺혀 있었다.

채연은 그 뻔뻔함이 놀랍지도 않았다. 이미 그녀가 제인에게 가지 못하도록 저지했을 때 충분히 놀랐으니까.

“우선 차에 타렴.”

채연은 연정을 따라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아 준 원우는 보닛을 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연정이 차 안의 적막을 뚫었다.

“넌 모르겠지만 부모는 원래 자식을 알아보는 법이야.”

“그런 분이 집안의 반대로 저랑 제인이를 버리셨나요?”

“착각하나 본데, 내가 말한 건 자식에 대한 절절한 모성이 아니야.”

정면만 고집하던 연정이 채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지나가는 야경이 연정의 얼굴 위를 빠르게 스쳤다.

그 때문일까. 빛이 밝히는 연정의 눈가와 입가엔 미묘한 비웃음이 어룽대는 듯했다.

“알고 싶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알아차리는 거지. 적어도 너희를 낳은 사람으로서 너희의 신체 구조 정도는 잘 알고 있고.”

어깨에 닿는 서늘한 손의 온도에 채연은 몸을 흠칫 떨었다.

“너, 어깨에 점이 없더라. 손제인은 왼쪽 어깨에 점이 세 개나 있는데 말이지.”

원우는 룸미러로 두 사람의 동태를 확인했다. 채연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금거렸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하셨어요? 왜?”

“넌 손제인의 삶을 빼앗아 모든 걸 누렸고, 결국 네 아빠 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지.”

“그럼 제인이는요? 걔도 엄마, 아빠 딸이에요.”

서도운이 아픈 제인을 고치기 위해 덥석 사국현을 따라간 것처럼 어린 날의 채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훔치면, 부모님을 따라가면. 자신이 버린 나를 뒤쫓아오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곧 데리고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정은 채연이 자라는 동안 은근히 제인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도록 입단속시켰고, 창진은 무서운 얼굴로 그녀는 자신의 딸이라고 세뇌시켰다.

물론 손제인이란 존재를 입에 담을 수야 있었지만, 끝끝내 함구한 이유는…….

그녀 또한 가족이 생긴 데다가 안락하고 부유해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커 보였던 제인이가 가족과 집을 얻어 완벽해지지 않았으면 싶어서.

제아무리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여도 채연은 어릴 적 가족의 품을 떠난 후 다시 얻게 된 가족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손제인은 내 딸이야.”

그런데 다 알고 있었다니? 알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묘하게 어긋난 대화를 채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너하고 나는 무척 닮았어.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그런데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어. 넌 네가 저지른 짓에 미련이 질질 흐른다는 거지. 난 그 아이를 동정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아.”

“어째서…….”

“애초에 남자 둘한테 마음을 줬는데, 자식한테 줄 마음이 있었겠니?”

당당한 범죄자를 만난 형사의 심정이 이런 걸까. 혀가 빳빳하게 굳는다.

“너희를 낳을 때 난 지독하게 힘들었어. 네 아빠와 연애를 했지만, 대단한 집안의 반대로 널 가진 채로 도망쳐야만 했지.”

그러다 사국현이 날 찾아 달려왔지만, 이 백치 같은 아이가 이 이상 알아서는 안 된다. 그럼 자신만 피곤해질 터이니.

“난 가난을 참을 수 없어 네 아빠를 택한 거야.”

심창진과 사국현은 타이밍이 굉장히 안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연정은 이렇게 된 자신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번 결혼 결렬의 최대 수혜자는 자신이니까.

사국현과 사돈이 되면 남녀 사이였던 우리가 집안으로 묶이는 가족이 된다는 건데 그건 용납 못 한다. 더군다나 창진에게 채연이와 손제인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그저 이 상태 이대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둔 치정 로맨스가 더 전개되었으면 한다. 아주 만족스럽고 달콤한 사랑은 강한 중독이니까.

“그러니 아빠한테는 모든 걸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진한 행복의 미소를 머금은 연정은 채연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너도 피차일반이잖니.”

사실을 빙자해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한다. 채연은 혼란스러운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 밤의 야경은 사라져 가는 그녀의 판단력처럼 이지러지고 있었다.

* * *

출근하기 위해 운동화 안에 발을 넣던 제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독일군 스니커즈가 제인의 시야에 밟힌 탓이었다.

정확히는 예쁘게 묶인 신발 끈이 유난히 돋보였다. 망설이던 제인은 오늘만큼은 리본 달린 신발을 신기로 했다. 그 신발을 신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따뜻한 봄바람을 만끽하며 어제 일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었다. 채연이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는 서도운도 자신도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서도운을 빼앗기기 싫어 발악하는 언사는 그대로였지만, 수확이 많은 하루기도 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찾아와 신발 끈을 묶어 주며 선택하라니. 그건 마치 이 신발을 신고 자신에게 다시 오라는 강경한 표현 같기도 했다.

문득 어린 날에 심채연이 울먹거렸던 일이 떠오른다.

‘난 서도운 싫어. 자꾸 나한테서 널 빼앗아 가잖아.’

설마, 서도운이 아니라 나를 원하는 건가.

‘네가 자꾸 내 손 놓고, 서도운한테 가잖아! 난 자꾸 혼자 남잖아!’

내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버스에 몸을 실은 제인은 창가에 이마를 붙였다. 직업이 기자여서 좋은 점은 상황을 여러 서사로 펼쳐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장점은 그 무수한 시나리오 속에서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냉철함이 있다는 것.

창밖으로 바쁜 출근길을 주시하는 제인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래 봤자 핑계에 불과한걸.”

만약 그런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어긋난 관계를 돌릴 순 없다. 그녀의 행동은 성인이 된 서도운의 태도와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서도운은 어린 날의 단순한 생각으로 사국현에게 가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과 새로운 매듭을 짓고자 어떻게든 이를 되돌리려고 한다. 얼마나 갸륵한 생각인가. 투명한 창문으로 제인이 짓는 미소가 비친다.

오늘로 에덴 호텔로의 출근 이틀 차. 벌떼처럼 몰린 기자들은 이미 다 정리한 모양이다. 제인은 금빛으로 도배한 회전문에 몸을 실은 뒤 곧장 호텔 카페로 향했다.

“혹시 체리 에이드 있나요?”

“네, 잠시만요.”

직원은 금방 체리 에이드를 만들어 냈다.

“에덴 직원은 카페 무료 이용이 가능하세요.”

“감사합니다.”

제인은 받아 든 체리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이 혀끝에 닿았다. 호텔 직원들의 시선이 피부를 깊숙하게 찔러 온다. 한낱 기자인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웅성거리는 눈치다.

“체리를 생과일로 만들면 더 맛있을 텐데.”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라 제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도운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마침 집무실에서 나오는 교진과 맞닥뜨렸다.

“안녕하세요, 배 비서님.”

“제인 씨 왔어요?”

“네, 일찍 출근하셨네요?”

“저 녀석 깨우는 게 제 첫 업무거든요.”

어깨 너머를 엄지로 가리킨 교진은 데스크톱을 켜며 말했다.

“제인 씨 오전 일과는, 지난밤 뜬 기사를 추려서 도운이한테 보여 주면 돼요.”

“안 그래도 어제 해 놨어요.”

체리 에이드를 책상에 내려놓은 제인은 두툼한 기사 더미를 꺼냈다.

“바로 보고 올리고 올게요.”

숙달된 경력자처럼 움직이는 제인을 보며 교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하셔.”

교진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제인이 놓고 간 체리 에이드를 보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런데 잠깐!”

서도운 저 자식.

“지금 옷 갈아입고 있을 텐데……?”

하지만 제인은 이미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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