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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26화 (26/79)

26화

“배 비서, 잠깐 들어와.”

채연과의 전화를 끊은 도운은 곧장 교진을 호출했다. 기를 쓰고 왈왈대는 심채연 따위는 도운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진의 눈 밑은 거무죽죽했다.

“왔습니다. 사고 치시고 천하태평한 이 개 같은 전무님아.”

“어때? 일하는 거.”

“그럼 그렇지.”

부른 이유를 어림짐작했지만, 굳이 또 닫힌 문을 친히 눈짓하신다. 포기 상태인 교진은 오늘 보고 느낀 제인에 대해 술술 읊었다.

“기자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알아서 뭘 해야 할지 알고, 머리도 비상해. 네 컨펌으로 나가야 할 기사랑 본인이 적당히 지어내야 할 기사도 잘 구분하고.”

“내가 여자는 잘 봐.”

팔짱까지 끼며 휙 꼬는 다리엔 거만함이 가득하다. 교진은 한숨을 쉬고 차분히 짚었다.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 심 회장이랑 우리 회장님 기사 봤어?”

“봤지. 심 회장은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받기 싫어서 우선 결혼설은 오보라고 둘러대고, 우리 회장님은 결혼설이 무관하다고 하셨고.”

어차피 만난 장소는 에덴 호텔 VVIP만 올 수 있는 국빈관이라 에덴과 금도의 만남을 목격한 자는 없다.

심 회장은 이 결혼이 목적이었지만, 아니라고 제대로 선수를 쳐 버렸으니 또 반박 기사를 내면 에덴에게 빌빌거리는 수준이라 절대 그러지 못할 테고. 우리 회장님은 내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우선은 모른 척하실 테고.

현재까지는 태엽이 착착 맞물려 달콤한 승리에 도취할 수 있지만, 방심할 순 없다.

“너 오히려 호랑이들 코털 건드린 거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언제 다시 결혼이 화제에 오를지 모르고, 너하고 심채연이 쉽게 끊어질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도려낸 내 기억을 찾아서 손제인을 잡아 끼워 넣어야지.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또 뭐.”

“사람마다 저마다의 기억법이 있을 거래. 그걸 잘 찾아보라고 나를 조련하더라고. 귀엽게.”

이젠 일일이 놀라기도 지친다. 교진은 핑 도는 눈동자를 굴렸다.

“야,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기억 좀 잘 찾아봐라. 네 기억은 네 머리 안에 있어.”

“내 기억은 내 머리 안에 있다…….”

“당연하지. 하다못해 네가 정말 심채연이랑 보육원에서 같이 자랐으면 그때 당시를 좀 떠올려 봐. 네가 찾던 누나가 심채연이 아니라면 그건 제인 씨라는 거잖아.”

“나랑 같이 자랐다는 뜻이고.”

“그렇지.”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톱이 책상을 친다. 도운은 허공을 빤히 주시하며 캄캄한 기억을 뒤져 보았다.

여섯 살의 기억에는 21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침식된 부분이 많다. 게다가 머리를 부딪혔을 때 안면인식장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도 약간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두 얼굴이 있다.

“……아.”

뭐더라.

분명 제인을 처음 마주친 그날부터 흐릿하게 기억나는 얼굴이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고장 난 가로등처럼 깜빡이는 그 ‘얼굴들’은…….

도운은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실눈을 떴다. 현재와 과거, 그 사이를 잇는 기억의 거리감이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 * *

오후 8시가 됐다. 오늘 터진 결혼설과 서도운, 심채연의 애인 유무로 퇴근 시간이 많이 지연됐다.

교진과 제인의 발 빠른 대응으로 언론은 조금 잠잠해졌다. 도운의 연인 이야기는 제인의 영입 건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지만, 세간에는 그것 역시 거짓말이라는 둥, 이젠 유명인의 애인 여부까지 알아야 하냐는 둥 원성이 자자했다.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어 대든 도운은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애인이 있다는 기사가 이미 손제인의 손으로 끝내주게 탄생했으니까 말이다. 당분간 주가가 오락가락할 테지만, 언제든 다잡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블랙 슈트 재킷을 팔에 꿰며 집무실 문을 연 도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면접을 핑계로 제인과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은 제인 앞에서 교진이 다정하게 신발 끈을 묶어 주고 있었다.

“어쭈.”

“야, 이!”

성큼 걸어간 도운은 뾰족하게 세운 무릎으로 교진의 옆구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진 교진이 소리쳤다.

“말로 해! 말로!”

“민 걸 고맙게 생각해. 하마터면 주먹이 날아갈 뻔했으니까.”

“신발 끈이 풀려서 대신 해 드린 거다!”

도운은 불만족스러운 시선을 제인에게 돌렸다.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면서 왜 신발 끈은 못 묶어?”

“잘 안 되더라구요. 신발 끈은 예전부터 못 묶었어요.”

“그럼 앞으로 나한테 묶어 달라고 해. 네 앞이라면 무릎도 꿇을 수 있으니까.”

교진에게 눈인사를 한 제인은 돌아서는 도운의 뒤를 따랐다. 일부분이 기억 안 난다고 하더니. 어렸을 때도 신발 끈을 묶지 못했던 그녀의 습관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차에 탄 도운은 의외로 제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제인은 남자가 된 그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핸들을 거머쥔 다부진 손, 슈트 안에서 도운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팔 근육, 날렵하되 강인해 보이는 옆모습. 심심하지 않은 눈요기를 하며 예약한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서도운 전무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일행분도 와 계십니다.”

그런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하는 말은 뜬금없었다. 일행이라니.

도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 제 손님과 함께 방문한다고 했지 일행이 온다는 말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요.”

“네? 하지만 아까 금도 그룹 심채연 씨께서 오늘 전무님과 만나 뵙기로 했다고…….”

당황한 직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제인과 도운은 같은 속도로 얼굴을 구겼다. 심채연이 왔다니. 제인은 긴 복도를 거침없이 걸어가는 도운의 뒤를 바쁘게 따랐다.

그가 문을 확 열어젖히자 뻔뻔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도운은 하, 긴 헛웃음을 내뱉고 말했다.

“이건 정도가 지나치는데.”

“결혼 상대가 있는데 애인 있다고 기사 낸 네가 더 너무하지. 손제인 기자도 앉으세요.”

“아니? 우린 갈 거야.”

도운은 옆에 서 있는 제인의 손을 잡고 뒤돌았다. 그러나 제인이 힘을 주어 그를 멈춰 세웠다.

“아니요.”

견고한 힘과 비슷하게 단단한 시선은 심채연에게 꽂혀 있다.

“여기서 나가시면 더 이상한 억측이 뜰 겁니다. 앉으시죠.”

심채연 또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손제인을 보고 있다. 도운은 눈썹을 좁혔다. 아까 떠오른 두 얼굴. 이 얼굴들인가?

“내 목줄을 잡은 건 너뿐이야.”

음성은 한층 누그러졌지만, 머릿속은 번뜩인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제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도운은 기꺼이 채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제인도 자연스럽게 도운의 옆자리에 앉았다.

채연은 그 광경을 꾹 참으며 말을 토해 냈다.

“이번 이슈 진정되면 아빠랑 사 회장님 다시 만날 것 같더라.”

“알아.”

“우리 결혼도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야.”

“그건 기를 써서라도 막을 예정이고.”

“그런데 손제인 기자님은 뭘 얻고 싶어서 자꾸 우리를 막는 거죠?”

애초에 일방적인 대화였다. 제인은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전 전무님의 기억을 되찾아 주기 위해 스카우트된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두 여자의 묘한 시선이 공기를 가르며 흐른다. 그 곁에서 도운은 제인과 채연, 다시 채연과 제인을 번갈아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두 아이. 두 얼굴.

“도운이가 그때는 술에 취해 기억의 오류가 있었던 모양인데, 도운이가 말하는 누나는 저예요. 그러니 그 이상 도운이에게 다가가지 않으셨으면 해요.”

뒤이은 심채연의 말로 직감이 예리한 칼날처럼 선다. 도운은 느릿하게 입 틈새를 벌렸다.

“심채연.”

“너도 사 회장님의 복수를 진심으로 위하면 이제 정신 좀 차려. 어차피 그래 봐야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야.”

그 순간 공기가 격변했다.

“입 좀 닥치고.”

“말씀이 심하십…….”

“너 누구냐.”

서도운이란 짐승은 이빨을 공격적으로 드러냈다. 발끈한 원우의 말머리도 날렵하게 잡아먹은 채.

심장이 철렁한 제인과, 채연의 시선이 도운에게 못 박혔다. 채연을 주시하는 도운의 눈은 예리했다. 이 좁은 공간, 제인과 심채연을 나란히 두고 보니 아까 떠올린 두 얼굴의 정체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도운은 경직된 채연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가만 보니까 두 사람 닮았네. 내가 어렸을 때 기억이 누나 말고는 좋은 게 하나 없어서 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눈동자에 섬뜩한 이채가 서린다.

“너, 동생 어디 갔어?”

채연은 목구멍이 꽉 막혀 버렸다. 서도운이 내뱉는 단어가 조각나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정확하게는 친구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매였던 네 동생 말이야.”

“그걸 갑자기 왜 묻는데?”

“뭔가 이상하잖아. 누나 아플 때 난 갑자기 회장님 눈에 띄었어. 누나가 아픈 게 집도 돈도 없어서 그러는 줄 알고 회장님을 쫄래쫄래 따라갔지. 아픈 누나를 고칠 수 있을 줄 알고.”

이건 제인이 모르는 이야기다. 제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후에 네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어. 내 누나라고, 네 이름은 심채연이라고.”

그래서 저를 심채연으로 착각한 거였다. 그래서 사국현에게 간 것이다. 한마디로 도운은 채연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대신 제인에게는 정보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이만큼 떠올렸다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잔떨림으로 다가온다. 그런 제인을 바라보던 채연의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걔 내 동생 아니야. 그냥 한 지붕 아래 있어서 언니 동생 했을 뿐이지.”

“그럼?”

“내가 어떻게 알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러니까, 평생 알아보지 마. 차라리 죽은 듯이 살아.

순식간에 죽은 자가 되어 버린 제인의 표정은 싸하게 굳어졌다. 이름도, 서도운도 훔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목숨으로도 농락한다.

애매한 대답에 도운은 제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제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하러 온 건데 불편한 자리만 됐네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운은 구태여 멀어지는 제인을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손제인은 이제 제 손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손제인은 제가 풀어내야 할 숙제나 다름없었다.

그 전에, 불순물을 강하게 휘저어 볼 필요가 있다.

“피라미 새끼처럼 잘 피해 가네. 날 사랑하는 척하고.”

“서도운.”

“옆에서 듣는 네 남자 서운하겠다.”

애석하게도, 파르르 떨리는 심채연의 입술이 도운의 시선에 걸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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