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손제인 기자 호출이다, 이놈아.
“알겠어요.”
아버지 경식에게서 온 내선 전화를 받은 교진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사태가 내가 내쉬는 작은 바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롭진 않아도 견딜 만했던 회사 생활에 큰 태풍이 몰아친다. 바로 전담 기자라고 하지만, 결국 제 옆자리를 꿰찬 이 여자 때문에.
교진은 곁눈질로 제인을 주시했다.
‘개 같은 사이요.’
혹시 거침없는 언사는 빠른 일 처리에도 해당되는 건가?
도운이 회장실로 올라간 후, 기사 수습과 대응에 정신없던 교진은 제인을 미처 챙겨 주지 못했다. 그러자 제인은 알아서 자리에 앉아 일하기 시작했다.
전담 기자이니만큼 무분별한 기사와 억측을 PDF로 정리해 교진에게 넘겼고, 바쁜 교진을 대신해 난무하는 전화를 대신 받으며 손과 눈은 또 바쁘게 새로운 기사를 뽑아 냈다.
에덴 호텔 공식 입장, “손제인 기자의 영입은 에덴 호텔 내의 새로운 바람.”
막무가내인 친구와 달리 손제인은 무척이나 공과 사가 뚜렷하다는 걸 교진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의심돼 혹시 돈 때문에 건국 일보를 포기했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계약서를 본 그녀의 반응에 상당히 놀라기도 했다.
‘아니, 이 금액이 지금 한낱 기자한테 줄 돈입니까?’
고생길이 열렸다고 생각한 자신의 착각을 단박에 정리해 주는 멘트였다.
‘어쩐지 더 지켜보고 싶단 말이지…….’
책상을 톡톡 두드린 교진은 마침 타 언론사와 통화를 끝낸 제인에게 입을 열었다.
“손제인 기자님.”
“편하게 불러 주셔도 됩니다.”
“그럼 제인 씨라고 할게요. 방금 회장님 호출이 왔어요. 지금 회장실로 급히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팁 하나 드릴게요.”
이러나저러나 동고동락해야 하니 교진은 먼저 호의를 베풀었다.
“회장님은 상당히 눈치도 빠르고 무서운 분이시니 말은 특히 조심하셔야 해요.”
틀림없이 서도운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을 텐데, 그때 아까처럼 개 같은 사이라는 망언은 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글쎄요. 눈치 상당히 없으신 것 같은데.”
28년간 제 존재도 모르고. 불퉁한 마음에 제인은 건조하게 말했다. 교진은 화들짝 놀라 검지를 황급히 제 입가에 갖다 붙였다.
“그런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쉿! 비밀!”
“그새 둘이 친해져서 속닥거리네.”
그 순간, 교진의 뒤로 도운이 다가왔다.
“질투 나게.”
도운은 제인을 보며 웃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보아하니 심하게 깨지진 않은 것 같다.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젠 제 차례다. 그러나 그대로 지나가려고 하는 제인의 손을 도운이 붙잡았다.
“어디 가.”
“회장님 호출이요.”
“가지 마. 너랑 계약한 게 나지, 회장님이야?”
“야, 그래도…….”
교진이 끼어들 새도 없이 도운은 집무실을 턱짓했다.
“들어와. 면접 보게.”
도운의 손에 질질 끌려간 제인은 남은 팔을 뒤로 뻗어 얼른 계약서를 집어 올렸다.
* * *
“앉아.”
도운이 팽팽하게 조여진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쳤다. 제인은 당연히 본 척도 안 했다. 대신 그에게 잡힌 손을 빼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럼 그렇지. 예상한 듯 피식 웃은 도운은 접대용 테이블에 놓인 서류 뭉치를 흔들었다.
“간단한 면접 좀 보려고 하는데.”
“순서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입사 후 면접이라뇨.”
“뭐 어때. 우린 섹스 먼저 했는데.”
낮아진 목소리가 유혹하듯 속살거렸다.
“그것도 길고, 깊게.”
맞지? 반듯한 일자였던 눈썹이 능글맞게 올라간다. 제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기할래?”
도운은 들고 있던 서류를 제인 쪽으로 밀었다. 커다란 글씨가 제인의 눈에 띄었다.
<건국 일보 손제인 조사서>
도운은 거만하게 꼰 다리를 까딱였다.
“술 먹고 기억 안 나고. 뇌가 망가져서 사람 얼굴을 못 알아봐도 내 직감과 촉감은 확실해. 그걸 떠올려 달라고 우리 손제인 기자님을 부른 거고, 기자님은 내 제안에 응했어. 우리 마음, 조금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은데?”
너도 나한테 끌리잖아. 맞잖아.
“혹시나 했는데 제 뒷조사를 하셨네요.”
“내가 호기심을 못 참는 성격이라.”
단번에 꼰 다리를 푼 도운은 제인의 옆에 가 앉았다. 훅 끼쳐 오는 그의 향이 제인의 가슴을 사슬처럼 조였다. 흠칫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자 커다란 손이 날아와 몸을 꽁꽁 묶어 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서도운의 시선은 너무나도 짙어 마치 밤하늘 같았다.
“딱 두 가지 찝찝한 게 있어. 네 부모와 출생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과 하태웅과의 관계.”
너무 새까매서 빨려들 것 같다. 또 너무 새까매서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영원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도운은 제인에게 고개를 더 기울였다.
“하태웅은 그냥 내가 신경 쓰이는 거고. 출생은 신경 쓰이게끔 누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고. 누나는 어디서 컸어요?”
“……혼자 컸습니다.”
“나랑 큰 거 아니고?”
속살거리는 숨결이 은근하다. 잡혀 있는 제인의 손등을 엄지로 느리게 문지른다. 피부로 돋아나는 소름에 제인은 손끝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지금은 바쁩니다. 농담할 시간 없어요.”
“교진이 말로는 일 잘한다던데.”
“이왕 들어온 거 열심히 해야죠.”
“그럼 면접은 이따 저녁 먹으면서 하죠. 어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서는 몇 가지 시정해 주셔야겠습니다.”
서도운은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느슨히 놓아줬지만, 또 그러지 못하도록 옥죄었다. 떨리는 가슴을 억누른 제인은 계약서를 하나하나 짚었다.
우선은 월급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스카우트라고 해도 기자한테 매달 1억을 주는 상사가 어디 있습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도운은 심드렁했다.
“내 한 달 월급이 얼마인 줄 알아? 24억이야. 그만큼 줘도 값어치 있는 여자니까 됐고. 다음은?”
“……손에 관한 부분은 제가 내킬 때 만지게 해 드리는 거로 하죠.”
그 부분에서 눕듯이 깊숙이 묻은 도운의 상체가 세워졌다.
“말이 돼? 그것 때문에 데리고 온 거고, 내 기억에 도움이 되기로 한 건데.”
“그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주무르실 텐데 그럼 언론과 대중들에게 전무님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나 걱정하는구나?”
“기억을 되찾고 싶다고 해서 계속해서 떠올리는 것을 습관으로 두지 말라는 겁니다. 익숙함은 곧 망각이 될 테니까요.”
기억의 다른 매개를 찾아라, 이 소리 같은데…….
“그래, 좋아.”
원래 바보 온달 옆에는 평강 공주가 있다고 했다. 지적인 제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럼 계약 체결입니다.”
“도장 찍어.”
“…….”
“아, 입술 도장 말고 진짜 도장.”
하지만 가끔은 저 견고한 유리성 안에서 진짜 손제인을 꺼내 보고 싶다. 그건 또 얼마나 깜찍할까.
“됐죠?”
제인은 인주에 엄지를 꾹 눌러 인장을 찍었다. 곧 그녀가 일어났다. 동시에 초코도 벌떡 일어나 제인의 다리에 얼굴을 비빈다.
“안녕.”
잠시 멈칫했던 제인은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집무실을 나갔다. 찰랑이는 머리칼과 굴곡진 몸매. 그 모습을 눈에 차곡차곡 담은 도운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초코야, 아빠 애인 될 사람이야.”
초코의 꼬리 짓이 더욱 거세진다.
“너도 엄마 마음에 들지?”
* * *
채연은 여전히 외출 금지 상태였다. 이번 결혼은 서도운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어 손제인과 이루어지지 못하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제인은 이번에도 제게 올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서도운에게 날아가 버렸다. 직접 이 결혼을 제안했던 채연은 다시 한번 창진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도 발생했다.
‘가만히 있으렴. 소란스러워지는 거 딱 질색이니까.’
제인이 손을 데자 그녀를 붙들어 잡는 연정의 손. 채연은 그것에 관해 물어볼 것이 아주 많다.
그녀는 1층으로 내려갔다. 액자에 갇힌 듯 매일 거실 소파에 앉아 체리 차를 마시던 연정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에스테틱에 가셨습니다.”
정갈한 고용인의 대답에 채연은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물었다.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과 불안이 가슴을 불안정하게 때린다.
엄마는 분명 그녀에 대해 모를 텐데. 자신이 이 집에 들어온 뒤 제인을 알아보거나 입에 담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또 보육원에 버린 것도 갓난아이 때니 다 큰 지금의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전화를 해 봐도 받지 않는다. 참을 수 없었던 채연은 이번엔 다른 대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니 원우가 채연의 어깨에 얇은 실크 가운을 걸쳐 주었다. 동시에 얄미운 음성이 귓가를 때린다.
-요즘 전화가 잦네.
“서도운.”
이 이름을 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제인을 저에게서 또다시 앗아 갔다는 질투가 발끝부터 활활 타오른다.
“네 뜻대로 되니까 좋아?”
-좋기만 할까. 기분 째지지.
여유롭게 굴리는 말에는 대단한 유희를 맛본 후의 녹진함이 담겨 있었다. 채연이 핸드폰을 부서질 듯 쥐자 원우가 그녀의 어깨를 다잡았다. 침착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기어오르랬잖아.
“너 후회할 거야.”
-글쎄. 내가 네 비밀을 쥐고 있는 게 많아서.
경고를 버무린 전화는 무례하게 끊겼다. 스르륵, 핸드폰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채연은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가자.”
채연이 어디로 향할지 아는 원우는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고 2층으로 발걸음을 맞췄다. 작게 헐떡이는 어깨는 점 하나 없이 희고 매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