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교진은 파리처럼 두 손을 비볐다.
“야, 넌 안 떨려?”
“떨려. 손제인 볼 생각에 흥분돼서.”
이런 미친…….
욕을 눌러 삼킨 교진은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헤아렸다. 23층. 정확히 5초 후면 기자들이 쫙 깔린 호텔 정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인 교진은 도운의 앞에 척 섰다.
여유롭게 웃던 도운은 뭐냐는 눈빛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 도운아. 이왕 저지른 거 당당하게 행동해, 당당하게.”
“얼씨구?”
교진은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도운의 넥타이를 정돈해 주고, 재킷까지 탁탁 난리를 쳤다. 다시 도운의 옆에 선 교진의 침착함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깨졌다.
“손제인 기자! 기자끼리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장난하나.”
이번엔 도운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도운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제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무를 스치면 낙엽도 떨어뜨릴 도운의 기세에 기자들은 순간 합죽이가 되었다.
덩달아 그를 바라보게 된 제인은 재빨리 생각했다. 이 이상 일을 키우면 안 된다. 제인은 도운의 앞을 막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쉬어야 하는 호텔입니다. 이 이상 대응하면 에덴 호텔 고객의 원성이 커질 겁니다.”
“고로 가만히 있어라?”
“네,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입니다.”
제인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과 사를 구별하는 제인의 결단력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런 제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도운은 등을 돌렸다.
“좋아. 올라가.”
단번에 도운을 제어하고 움직이는 제인의 능수능란함에 교진은 입을 벌렸다.
“뭐야……. 뜻밖의 인재?”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자 기자들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경호원에게 정리하라 손짓한 교진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 뒤를 제인과 교진이 빠르게 따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도운은 제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계약서 읽어 봤어?”
“아니요.”
고집스레 정면만 보는 제인의 옆모습을 도운은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배교진, 올라가자마자 계약서 뽑아서 넘겨.”
“알았어.”
문제는 넘어야 할 태산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서도운.”
엘리베이터 도착음에 고개를 돌린 국현은 성난 걸음을 재촉했다. 타오르는 듯한 국현의 시선은 도운에서 제인으로, 그리고 다시 도운에게 흘렀다.
서서히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제인은 중앙선을 침범하듯 도운과 국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사 회장님.”
그녀가 불쑥 내민 손에 국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제인은 시린 시선을 올곧게 응시하며 다시 한번 왼손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서도운 전무님을 전담하게 된 손제인입니다.”
거리낌 없는 자기소개에 국현은 실소를 터뜨렸다.
“맹랑하기 그지없군.”
인사는 처참하게 무시당했다.
“서도운, 따라와.”
국현은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제인을 스쳐 지나갔다. 허공에 우뚝 멈춰 선 제인의 손을 도운이 대신 그러잡았다.
“우리 회장님이 낯을 좀 가려. 교진이랑 놀고 있어.”
나긋한 음성엔 다정함이 가득했다. 도운마저 자리를 뜨자 교진이 쭈뼛대며 물었다.
“초면에 묻기 죄송한 질문이긴 하지만, 혹시 도운이랑 무슨 사이십니까?”
제인은 국현과 도운이 사라진 통로를 한참 응시했다. 대답은 하나였다.
“개 같은 사이요.”
“네?”
주인의 손길을 받길 원하고, 타인의 이기심으로 어긋나 버린 개 같은 사이.
뜻을 모르는 교진은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제인 씨,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제인 씨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계약서에 이 말도 안 되는 조항도 빼라고 할게요!”
그는 도운이 작성한 계약서를 제인에게 펼쳤다. 갑과 을의 조항을 꼼꼼히 읽어 보던 제인은 순간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 * *
국현은 이른 아침에 터진 기사를 보고 크게 격노했다. 분명 시작은 만족스러운 결혼설이었다.
아침마다 마시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천천히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데 문득 눈에 걸리는 대목을 발견했다. 기사를 작성한 이는 건국 일보 손제인이 아니라 하태웅이었다.
그는 분명 손제인을 콕 짚어 기사를 쓰라고 했다. 더는 도운이와 엮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섞으며. 그런데 기사는 엄한 기자가 쓴다?
그건 기다렸다는 듯 터진 황당한 결혼 일축 기사와 에덴 호텔 전담 기자 손제인이라는 소속으로 모조리 설명되었다.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마.”
낮은 음성으로 읊조린 국현은 경식을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갔다. 난처해진 경식은 느릿한 인기척을 향해 간곡히 부탁했다.
“전무님.”
워워, 경식은 두 손바닥 아래로 지그시 내려 보였다. 회장님을 더 자극하지 말라는 눈치였다.
그건 모르지 않지만, 글쎄.
“노력은 해 보죠.”
손제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러나고 싶지 않다. 경식에게 한쪽 눈썹을 찡그린 도운은 집무실 문을 닫았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국현은 그를 돌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에덴 건설에 있지도 않은 전담 기자 자리 만들어 놨다고 해도 눈 감아 줬다. 어제 네가 손제인 보자마자 목줄 풀린 개처럼 날뛰려고 했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그런데 이게 뭐야!”
이미 언론 지우기가 시작된 모양인지 국현은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은 기사를 도운의 앞으로 흩뿌렸다. 팔랑거리는 종이가 도운의 발치에 힘없이 떨어졌다.
“벌써 두 번째야. 두 번이나 결혼설이 났는데, 그 두 번을 손제인이 다 막았어! 너한테 애인이 어디 있어!”
도운은 허리를 숙여 가장 눈에 띈 기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인사드릴까요? 지금 제 집무실에 있긴 한데.”
<의혹 하나> 밝혀진 에덴 호텔 후계자의 애인, 알고 보니 기자 본인?
도운은 진한 미소로 검지를 튕겨 기사 제목을 정확히 짚었다.
“너!”
“장난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국현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도운은 밀봉했던 속마음을 가감 없이 보였다.
“회장님도 남자로서 지독한 사랑을 한 번쯤은 해 보셨잖습니까.”
“그래서. 저 기자를 사랑이라도 한다는 거야?”
“네, 첫사랑입니다.”
“허.”
사춘기 아이를 상대하면 이런 기분일까. 국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네 애인은 네 젊은 날의 패기라고 생각하고. 심채연에게 남자가 있다는 소리는 뭐야?”
“심창진의 새장 속에 갇힌 심채연이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지원우죠.”
그렇게 말하는 도운의 눈빛엔 심채연을 향한 일말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심채연이랑 저, 이성적인 감정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저 맺어 가야 할 관계라 그 선을 지켰을 뿐입니다.”
국현은 뻐근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너 지금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보여? 결혼설이 두 번이나 났다고. 원래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야. 그런데 손제인은 아주 영악하게 기사를 썼어. 처음엔 내 비리를 터뜨려 너와 무관하다는 걸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며 결혼을 일축했고, 이번에도 네게 애인이 있다면서 자기한테 따라올 논란을 차단하고 결혼을 막은 거라고.”
그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여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도운은 손제인이란 여자가 더욱 섹시하게 느껴졌다.
“네가 그래도 이 결혼 못 피해. 심창진 쪽에서도 약이 바짝 올랐어. 그 자식, 이번에야말로 우리 에덴을 흡수하려고 작정한 거라고.”
“그것 또한 압니다. 회장님께서 저를 내치지 않으시면 저는 이 모든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할 예정이고요.”
“내가 너를 내쳐?”
“복수를 위해 저를 데리고 오신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왈칵 구겨진 국현의 눈썹이 더욱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분명 심창진과 최연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데리고 온 도운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 큰 이 녀석의 불장난을 잡아 줄 생각뿐, 다른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입으로 제가 도구라고 말하니, 국현은 괜히 입이 썼다.
“……어그러진 거 알면 가서 뼈 빠지게 일이나 해. 여자한테 한눈팔려서 물어뜯기지 말고.”
“손제인 기자, 받아 주시는 겁니까?”
“난 내가 도장 찍지 않은 사람과는 일 안 해. 나가 봐.”
“적어도 내치진 않겠다는 소리군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이는 도운이 나가자 국현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사 빠진 놈.”
피 한 방울 안 섞였으면서 하는 짓이라곤 자신과 똑같다.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것까지.
“쯧.”
사랑은 엎질러진 물이다. 도운의 감정은 한마디로 수습 불가능. 국현은 호출기를 눌러 경식과 연결했다.
-네, 회장님.
“당장 손제인 기자 올라오라고 해.”
막을 수 없다면 만나는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