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당장 올려요.”
척추가 오싹해질 만큼 시원한 대답이었다. 도운은 저 올곧은 눈과 굳은 의지가 담긴 입술이 좋았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 모습. 무언가 감추는 듯하다가도 한번 결정 내린 건 가차 없이 나아가는 결단력. 아픈 저를 보호했던 누나가 이제는 스스로를 챙길 줄 아는 솔직한 모습을 보이니 도운의 심장은 더 없이 뛰었다.
도운은 짙어진 시선으로 망설임 없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몇 번 눌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윽고 도운은 책상을 짚고 제인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하듯 호흡이 섞였다.
“넌 이 시간 이후로 내 사람이 되는 거야.”
분명 둘 사이에 커다란 책상 하나가 더 있는데 서도운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승인 도장부터 찍자.”
제인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눈이 감겼고, 입술이 성급하게 엉키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물린 입술은 젤리처럼 달고 끈적했다. 중간중간 뜨거운 숨이 입꼬리를 간질일수록 발화점은 더 타올랐다.
도운은 제인의 뒤통수를 바짝 끌어당겼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머리칼이 피부를 간질이자 전율이 인다. 고개가 자꾸 뒤로 젖혀져 제인은 두 팔을 도운의 목에 걸었다.
이 얼마나 배덕한 입맞춤인가. 여기저기서 탐내는 손제인. 우리 두 사람을 방해하는 심채연.
‘회장님께 아이가 있었습니까?’
‘……소문일 뿐이야. 내일이면 결혼 기사가 날 테니 너도 마음 정리해.’
‘손제인이라면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해도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헛소리. 여자한테 한번 빠지면 내 꼴 나는 거야. 두 번은 없어. 정리해.’
그리고 시한부를 선고한 우리 사 회장님.
자신에게는 손제인을 놔야 할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21년간 자신을 거두어 준 사국현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 그 방법이 실리를 위한 심채연과의 결혼이었다. 하지만 손제인을 붙잡아야 할 이유는 더욱 확실했다.
안 보면 보고 싶으니까. 찰나라도 그녀가 생각나면 하나하나 씹어 먹고 싶으니까. 곁에 두지 않으면 미치겠으니까.
“누나 네 손가락 끝부터 전부 씹어 먹고 싶어.”
더 이상의 잡생각은 무의미하다. 도운은 제인의 손가락을 입 안에 물며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힘에 제인의 엉덩이가 책상 끝에 닿았다.
그녀의 다리 틈으로 도운의 두툼한 하반신이 끼어든다. 거리가 좁혀지자 도운은 다시 성급하게 입술을 훔쳤다. 제인은 영혼마저 가지고 달아날 것 같은 거친 키스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갈증이 이는 듯 게걸스럽게 빨아 대는 입술은 어느 순간 희롱을 하듯 진득하게 꿈틀거린다. 또 어느 순간엔 살점을 떼어 낼 듯 잘근잘근 깨물기도 한다. 넘쳐흐르는 댐처럼 폭발하는 서도운의 열정을 감히 이길 수가 없다.
“자, 잠깐, 읏!”
서도운의 가슴께에 얹어진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밀어내려고 하자 강한 힘이 손목을 덥석 잡아 왔다. 그의 손끝에 스친 쓰라린 감촉은 붉은 열기를 주춤하게 했다. 제인의 통증에 도운은 그제야 입술을 뗐다.
“뭐야. 치료 안 했어?”
“네.”
눈살을 구긴 도운의 시야 안으로 빨갛게 덴 손등이 보였다. 도운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인의 다리와 목 뒤에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제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하는 거예요. 내려 주세요.”
도운은 어림도 없다는 듯 집무실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들은 초코가 벌떡 일어나 그들을 따라왔다. 제인의 발버둥이 멈춘 건, 도운이 발로 차 연 비밀의 방이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여긴…….”
“내 집이자 내 방.”
제인을 침대에 앉힌 도운은 곧장 서랍 문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잠깐의 시간 동안 제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이라고 한 이곳은 정말 사람이 살 법한 커다란 방이었다. 대리석 바닥은 잿빛이었고 벽은 검은색이었다. 드넓은 거실 가운데엔 일인용 카우치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새하얀 침대 옆에는 커다랗고 긴 붙박이장이 붙어 있었다.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에 있는 드레스룸까지 완벽하게 북유럽식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온기에 제인은 정면을 바라봤다. 연고를 짜 검지에 묻힌 도운은 제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파?”
“……아니요.”
“난 아파.”
마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처럼.
도운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에 연고를 얇게 펴 발랐다. 자신이 더 아픈 듯 찌푸려진 눈살이 눈에 띈다.
“누나 손이 뜨거운 수프에 적셔졌을 때 달려가고 싶어도 못 나간 내 심정, 누나는 절대 모를 거야.”
어느새 다가온 초코가 제인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둘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회장님이고 뭐고, 양심이나 그 얄팍한 책임감마저 다 집어던지고 싶었어.”
“…….”
“이미 그랬지만.”
약을 다 바른 도운은 제인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으로 가져다 댔다. 자석처럼 착 붙는 온기에 제인의 손끝이 떨렸다.
“여기까지 와서 발 빼려는 건 아니겠지.”
“후회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는다는 말에 매섭게 치켜뜬 도운의 눈이 유순하게 풀어진다. 제인은 그 새까만 눈동자에 각인을 새겨 넣었다.
“그러니까, 전무님은 책임지셔야 할 거예요. 저도, 전무님이 찾으시려는 기억에도.”
“맹세할게.”
도운은 제인의 다섯 손가락에 차례대로 입술을 뭉갰다.
“이 예쁜 손가락에 대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피식, 웃으며.
* * *
다음 날 오전 9시, 서도운과 심채연의 결혼 기사가 공식적으로 떴다. 그러나 정확히 30분 후, 손제인이라는 이름으로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의 공식 입장이 방패처럼 등장했다.
금도 그룹 장녀 심채연과의 결혼설은 사실이 아니며 지금까지는 그저 좋은 동료이자 두 기업 간의 불화로 함구하고 있었지만, 사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연인이 있다는 진실된 기사로 말이다.
여러 소문만 있었던 두 사람의 사이를 깔끔히 단정하는 도운의 입장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지만, 세상은 또 다른 논점에 떠들썩해졌다.
청렴 기자로 유명했던 손제인 기자의 타락. 그것도 결혼설을 터뜨린 건국 일보 동료 하태웅 기자에 대응하듯 에덴 호텔의 공식 입장을 냈다는 것에 말이다.
이때다 싶어 아침 뉴스는 에덴과 금도의 결혼설을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사국현의 비리 혐의를 터뜨린 후 검은 손길의 유혹을 떨쳐 내지 못했다는 불명예한 기자라는 타이틀을 제인에게 안겨 주었다.
이 모든 입방아에 창진은 결국 폭발했다.
“도대체 어느 놈이랑 놀아나는 거야!”
창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백자기를 집어 던졌다. 이보다 진한 굴욕이 어디 있으랴. 복수가 코앞이었는데. 기고만장하게 사국현 앞에서 떠들었는데!
“네 주인 하나 제대로 보필 안 하고 뭐 했어!”
“읏!”
굴욕을 참지 못한 창진은 원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두 주먹만 무릎에 올려 두고 있던 채연이 움찔했지만, 원우는 긴밀한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오늘은 몇 번이고 맞아 줄 수 있었다. 매번 채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손제인이 이번만큼은 이 결혼을 막아 주었으니까. 원우의 음험한 속을 모르는 채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툭하면 외출 금지만 당하는 제게 누가 있겠어요.”
“그럼 저 개소리는 뭔데!”
“딱 봐도 아빠 엿 먹이려는 사국현의 지시 아니겠어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창진은 숨을 거칠게 씨근덕거렸다. 채연은 자신을 또 한 번 버린 제인을 떠올리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이 결혼, 무조건 추진해야 해요.”
난리 통에도 연정은 고고한 태양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이 결혼이 어그러져 만족스러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찻잔에 가려진 입가엔 의뭉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 * *
제인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데스크 위로 사직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오늘부로 퇴사하겠습니다.”
“야, 손제인. 너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우리 사회부를 이렇게 물 먹여? 이래서 왼손잡이는 옛날부터 간신배들의 습성이랬어!”
꾸벅 숙인 고개 위로 온갖 폭언이 쏟아졌다. 동고동락한 사회부 직원들과 구경 나온 타 부서 직원들의 시선도 정수리를 콕콕 찔렀다.
“넌 태웅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어?”
양심 좀 찔리라는 팀장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태웅은 그녀를 묵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인이 서도운을 택한 만큼, 기사를 퍼뜨린 태웅은 비밀리에 금도의 사람이 되었다. 심창진이 필요로 할 때마다 움직이는 충직한 기자로.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욕심 많은 기자, 개인의 욕망을 추구한 기자라고 떠들어 대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 뒤에서 쏟아지는 욕설처럼 제인에게 또 다른 꼬리가 붙었다.
“너 지금 온갖 수식어 다 붙었어.”
마지막 간절함을 끄집어내는 태웅의 음성이 제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부패한 기자, 타락한 기자, 역시 여자는 남자를 잘 물어야 한다.”
“알아.”
“이런 모멸을 다 감당하면서까지 네가 얻는 게 뭔데. 서도운이야?”
“응.”
“그럼 네가 쓴 기자의 애인은 너고?”
제인은 대답 대신 뒤를 돌았다. 잠을 자지 못해 까칠해진 태웅의 얼굴이 보였다. 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내 욕심대로 살아 보려고.”
무려 21년을 참았다. 폭발한 감정은 제대로 닫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자꾸만 새어 나와 걷잡을 수 없었다.
“다 뺏겼으니까, 나도 서도운 하나. 내 가족 한 번만 얻어 보자.”
도무지 해석될 수 없는 말에 태웅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멀어지는 제인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