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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22화 (22/79)

22화

함정에 들어섰으니 인사를 해야 하는데. 살얼음 같은 도운의 표정을 보자 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인을 대신해서 태웅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건국 일보 사회부 소속 하태웅입니다. 이쪽은 손제인 기자고요.”

태웅은 심창진이 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제인은 이들과 엮이면 위험하니 한사코 빠지라고 했지만, 그는 서도운과 제인이 가지고 있는 두 기업의 비밀이 무엇인지 기필코 알아내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제인은 태웅의 말을 빌려 힘겹게 인사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신경은 온통 뒤로 쏠렸다. 그때 침묵하던 국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진짜 속셈이 뭐지?”

국현은 앞뒤로 앉은 불청객 중 가장 증오하는 창진에게 서슬 퍼런 경계를 내보였다.

“속셈이라니. 30년 우정 무너지는 소리를 하는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창진은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로운 태도에 국현의 얼굴은 더욱 굳어 갔다.

“내내 결혼을 반대했던 네가, 내 비리를 퍼뜨린 기자를 데리고 왔어. 이게 그냥 넘어가야 할 문제인가?”

“듣는 손제인 기자 멋쩍겠어. 편하게들 식사하면서 이야기 듣고 기사 적어요. 사진도 몇 장 찍어도 좋고.”

“심창진.”

“웃어, 사국현. 네가 바라던 바잖아.”

두 사자가 허공을 가르며 으르렁거린다. 제인은 살짝 고개를 틀어 서도운을 봤지만, 뒷모습만 보여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감히 예상하건대 분명 냉기가 흐르고 있겠지. 심채연은 따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진정하고 식사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최연정의 말처럼 불편한 식사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두 기업의 내밀한 이야기이니 녹음은 불가능했다. 수기로 모든 말을 캐치하고 적어야 하는 게 번거롭긴 했지만, 제인은 오히려 거기에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어 좋았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는 짧고도 묵직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창진이 먼저 운을 뗐다.

“자, 그럼 본격적인 상견례를 시작해 볼까?”

상견례. 그 단어에 펜을 쥔 제인의 손등에 뼈가 불거졌다.

교진은 그런 제인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입술만 질겅질겅 씹는다.

‘지켜야지, 곁에 두려면.’

과연 진심을 내보인 친구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단언컨대 저 녀석, 지금 꽤 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결혼, 정말 괜찮겠습니까?”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질문이 그 반증이었다. 도운은 기고만장한 창진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안 될 게 있나. 채연이가 먼저 제안한 거고, 그만큼 채연이도 서 전무를 좋아하는데 부모로서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에 피식 비웃음이 샌다. 시선을 기울여 보니 최연정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나 썰고 앉아 있고, 심채연은 고즈넉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네가 이제 뭘 더 어쩔 거냐며.

그러나 도운은 물러나지 않은 칼날이었다.

“그래요? 전 심채연한테 다른 남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도운이 입꼬리를 올리자 채연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동시에 곁에 앉은 태웅이 눈치챌 정도로 원우의 몸도 움찔했다.

그러니까 까불긴 어디서 까불어.

도운은 의자에 팔을 걸치고 뒤를 돌았다.

“하긴. 그런 거였으면 우리 지 비서가 나한테 말해 줬겠지.”

제대로 된 경고에 원우는 정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아이들을 보며 연정은 작게 혀를 찼다.

“서 전무, 농담이 지나친 것 같네요.”

채연도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소리야. 네 첫사랑이 나이듯 나도 네가 좋은 건 마찬가지야.”

“아, 그래? 내가 착각했나 보네.”

원우에게 못 박혔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인에게 흘러 들어갔다. 제인은 언제부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둘이 이러한 사이였다니. 이래놓고 도운을 욕심내다니. 교통사고처럼 부딪친 시선에 제인은 얼른 카메라를 들고 일어섰다.

“마침 손제인 기자께서 사진을 찍으려나 보군. 자세 바로 해, 서도운.”

의자가 찌익 끌리는 소리가 들리자 국현은 말했다. 평범한 언어를 둘러싼 일종의 경고였다. 국현은 내내 도운과 제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도운이 지금 어떤 감정이고, 얼마나 이 자리를 박차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안다. 하지만 번복은 없다.

“도운이도 집안의 결합이 필요한 나이긴 하지.”

“나도 웬만한 인간들보다야 에덴 사위가 좋을 듯해.”

“마치 에덴 건설을 잡아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럴 리가. 함께 힘을 합치면 더 좋은 기업이 될 수 있을 테지. 너도 결국 이러려고 서 전무를 보육원에서 데리고 온 것 아니었나? 우리 채연이를 미국에서 데리고 온다고 기사가 터진 그 날 바로.”

들고 있는 나이프로 살갗을 뚫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의 혀는 몇 번이고 서로의 피를 맛보았다. 한마디로 전부 속 보이는 게임이었다.

제인은 긴장을 감춘 채 카메라 프레임에 집중했다. 선명한 프레임 안에는 스테이크를 먹기는커녕 잘게 잘게 짓이기기만 하는 두 사람의 접시가 보였다.

“솔직해서 좋군.”

“더 솔직해져 볼까? 아, 다른 이유는 당신이 말하는 게 좋겠어.”

무슨 연유인지 창진은 연정에게 대답을 떠넘겼다. 연정은 국현을 향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칼질을 멈춘 국현도 연정을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자신의 부모를, 제인은 카메라 안으로 주시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자꾸만 뜨는 염문설을 일축하기에도 좋겠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것처럼.”

끼이이익.

그 순간, 국현의 나이프가 접시와 강하게 마찰했다. 동시에 셔터를 누르려던 제인의 손에도 힘이 풀려 버렸다. 떨어지는 심장을 부여잡느라 카메라를 뒤늦게 잡아 버렸던 것이다.

“아!”

쨍그랑!

카메라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잡는 과정에서 제인의 손이 뜨거운 수프 그릇에 스쳤다. 화끈한 통증이 손등에 퍼졌다.

외마디 비명이 들리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도운과 채연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꼼짝할 수 없었다.

연정은 테이블 밑으로 채연의 손을 움켜잡았고, 국현은 도운의 팽팽해진 허벅지를 손으로 꾹 내리눌렀다.

국현은 입가에 와인 잔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너 아니어도 나설 사람은 많으니까.”

태웅이 거칠게 의자를 빼며 일어선 뒤, 제인에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괜찮아?”

“살짝 스친 거야.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이런, 기자는 손이 생명인데. 치료 안 해도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도운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초조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손등에 난 새빨간 상처가 마치 제 것처럼 쓰리고 아프다.

작은 생채기도 지금 눈에 밟혀 죽겠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도운의 반동을 국현이 다시 한번 찍어 눌렀다.

“결혼, 진행하지.”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그리고 손제인 기자?”

“……예.”

“지금 당장 결혼 기사 올리세요.”

제인에게는 그 말이 마치 너는 가만히 있을 거냐고 묻는 듯했다.

* * *

넋을 놓은 제인 대신 태웅이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심정처럼 마우스 커서가 시계 초침처럼 움직인다.

째각째각…….

“난 이거 누를 거야. 너는, 할 거야?”

“그걸 누르면 선배는 금도 사람이 돼.”

“내가 누르든 말든 넌 에덴의 사람이 될 거잖아. 정확히는 서도운의 여자가.”

내뱉을수록 상당한 질투가 몸집을 부풀린다. 이번만큼은 제인도 태웅과 같은 심정이었다.

이 기사가 터지면, 서도운은 심채연의 남자가 된다. 제 손으로 제가 인정하는 꼴이다. 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느슨해진 피부가 조이며 덴 곳이 쓰라렸다.

서도운은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다. 자신의 곁에서. 그러니까 이 손으로 결혼설을 터뜨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막을 수는 있다.

“미안, 선배.”

“…….”

“나 손이 아파서 승인 못 하겠어.”

제인은 그대로 내달렸다. 이미 상견례는 끝났을 밤 10시. 뛸 때마다 허벅지를 찔러 오는 에덴 호텔 출입증을 꺼냈다. 삑, 간결한 소리가 캄캄한 1층 로비를 가득 울렸다.

전담 기자실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제인은 무작정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도운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은 캄캄하다.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없이 제인은 집무실 앞에 자리한 데스크톱 앞에 앉아 빠르게 기사를 적었다. 결혼설을 확실하게 부인하는 게 답이었다.

그런데 승인은 어떻게 내리지?

마지막 엔터를 탁, 치는 순간이었다. 모니터가 휙 돌아갔다.

“금도 그룹 심채연과의 결혼설은 사실 무관이며,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연인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전무님.”

제인의 기사를 축약해서 읽은 도운이 제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네가 올까 해서 데스크톱 보안도 다 풀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끝을 흐린 도운의 입꼬리는 긴 초승달 같았다.

“올려?”

마치 악마의 유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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