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도운은 혀를 입 속에서 굴리며 긴 다리를 꼬았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태도에 국현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심창진이 심채연과 너의 결혼을 허락했어. 오늘 금도와 만나려고 하니 그런 줄 알아.”
거절은 없다는 단호한 갈무리에 도운은 비스듬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심창진이 갑자기 심채연과 저의 결혼을 허락했다 이 말씀입니까?”
“그래, 너무 좋아 웃음이 나오냐?”
“너무 나이스한 타이밍이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네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하필 손제인에게 출입증을 주자마자 이러다니. 심창진이 또 뭐에 홀려서 결혼을 추진할까, 곰곰이 생각하니 답은 하나였다.
“심창진과 회장님은 많이 닮았어요.”
“그런 망언은 넣어 둬라. 난 오늘 보기 드물게 기분 좋으니까.”
“복수, 배신, 한 여자를 사랑하는 지고지순함. 그리고 뛰어난 머리.”
국현은 눈썹을 들썩였다.
“심창진은 회장님처럼 집안의 결합으로 우리 에덴을 잡아먹을 생각인 거죠.”
“알고 있다. 네가 그게 무서운 건 아닐 테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을 텐데, 손제인 정리하라고.”
국현의 목소리에는 여과 없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네가 이 회사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내 귀에 다 들어와. 눈감아 주고 있을 때 그만해라, 도운아.”
“…….”
“약속 장소는 여기 에덴 호텔이다. 가서 일 봐.”
“알겠습니다.”
도운답지 않은 수긍이 이어졌다. 보기 드물게 도운이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자 국현은 미심쩍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미치겠네.”
도운은 회장실을 벗어나자마자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교진이 도운의 뒤를 다급히 쫓았다.
“이건 또 무슨 전개야. 심채연이 보육원 출신이면 너도 회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도운의 머릿속엔 많은 가설이 떠올랐다. 만약, 손제인이 정말 나의 누나라면. 보육원 출신인 심채연을 심창진과 최연정이 어떤 의도로 감추고 있는 거라면. 그게 만약, 우리 회장님과 관련이 있다면?
이야기는 꽤 복잡해진다. 때로는 숨기고 있는 게 강한 무기이니.
“금도는 예정대로 만나 봐야겠어.”
정면 돌파로 하나씩 알아내는 수밖에.
* * *
창진은 회사로 연정과 채연을 호출했다.
“오늘 7시에 에덴 호텔로 갈 거야.”
곧바로 국현의 얼굴이 떠오른 연정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특별한 행사가 아니고서야 이 사람이 에덴을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설마? 의중을 읽으려는 연정의 시선이 창진을 지나 채연에게 흘렀다.
“저와 도운이의 결혼을 추진하려는 거예요.”
차분한 통보에 연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창진은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이번에 채연이 너의 생각은 무척이나 훌륭했어. 그래서 용서해 주는 거야. 네가 흘린 결혼 기사,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당장 결혼 기사를 뿌린 건국 일보 연예부부터 잡아 족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일파만파 퍼지면 최연정과 사국현이 또 엮일 수 있으니 조용히 뒤에서 알아보았다. 익명의 제보. 그건 원우의 짓이었다.
더 정확히는 채연의 명령이었고. 하지만 기발한 수를 생각해 옴으로써 채연은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손제인 기자한테 부탁해 볼 셈이야. 사국현이 자기 비리를 터뜨린 기자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창진이 슈트 상의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김 국장님, 금도의 심창진입니다.”
그 한마디에 제인과 국현의 접촉이 떠오른 연정은 표정을 무섭도록 굳혔다.
* * *
호출이었다. 한층 더 딱딱해진 분위기 속에서 제인과 태웅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장담하건대 이번에도 에덴 아니면 금도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한순간 많은 걸 알게 됐지만, 정작 시원하게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 수수께끼 속에서 태웅은 보고야 말았다. 제인이 몰래 꺼내 만지는 에덴 호텔 출입증을.
에덴과 금도. 서도운과 심채연.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 세 사람은 분명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게 뭘까.
제인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벨크로 운동화 끈을 의미 없이 떼었다 붙였다. 치익, 긴 소리 끝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단정하게 노크하고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왔군.”
창진은 국장실이 제 집무실인 것처럼 앉아 손을 들었다. 제인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국장은 굽신거리며 제인과 태웅에게 신속히 행동할 것을 강요했다.
“오늘 심 회장님께서 중요한 기사 하나를 우리 건국에 맡기셨어. 어서 앉지 않고 뭐 해.”
제인은 억지로 자리에 앉아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손제인 기자입니다.”
“구면인데 그런 인사치레는 안 해도 됩니다. 하태웅 기자도요.”
“어쩐 일로 저희를 찾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길게 끌지 않고 본론을 말하는 태웅의 태도가 창진은 마음에 들었다.
“오늘 저녁 7시. 에덴 호텔에서 내 딸과 서도운 전무의 결혼 이야기가 오갈 겁니다. 확실시되는 사항이니 그 부분을 두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고.”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결혼이라는 말에 제인의 입술은 순식간에 건조해졌다. 그녀는 아닌 척하며 귀를 기울이는 국장을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창진은 그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완벽히 세 사람의 공간이 되자 제인은 국장 앞에선 할 수 없었던 말을 시원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아직 심 회장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영입 제안에 확답을 드린 적이 없는데요.”
“알고 있어요. 손제인 기자가 훌륭한 기자라 곁에 두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강요는 안 합니다. 대답은 오늘 기사가 터지는 거로 받으려고 했고.”
뱀같이 스산한 미소가 태웅에게 향했다.
“손제인 기자가 싫다면 하태웅 기자가 올렸으면 하는 바람에 둘을 같이 부른 거예요.”
창진은 영악했다. 제인을 영입하려는 목적은 사국현의 몰락이었다. 한번 오너리스크를 터뜨렸으니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 있겠다는 미끼였다.
하지만 이 결혼으로 에덴을 먹어 치울 생각인 창진의 계획은 더 이상 제인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다. 다만 오늘 그 자리에 데리고 가 사국현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가 하지 않겠다면 당장 기사를 터뜨려 줄 태웅이 필요한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창진이 들여다보고 있는 시계가 맹수의 이빨처럼 번쩍였다.
“두 시간 남았군. 준비들 하세요.”
* * *
저녁 7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은 기어코 빨리 찾아온다.
“금도 그룹 도착하셨단다.”
“가자, 초코야.”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초코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도운과 걸음을 맞춘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한 교진은 도운에게 물었다.
“초코는 왜 데리고 가는데.”
“개판 만들려고.”
교진은 슬쩍 도운을 바라보았다. 워낙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도운에게 오늘만큼은 묘한 예민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교진은 한숨처럼 현실을 토해 냈다.
“난 너 너무 걱정돼. 네 행복? 물론 중요해. 너 그동안 회장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으니 이 결혼도 은혜를 갚기 위해 네 한 몸 던지는 거였겠지. 그런 줄 알았는데 회장님 명을 들으면서 동시에 거부하겠대. 아니, 지금 상황에서 손제인 기자가 만약 에덴 들어온다고 해도 네가 어쩔 건데.”
“교진아.”
“왜.”
“답이 너무 뻔하지 않냐?”
때마침 띵, 울리는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교진의 머리를 거세게 때렸다.
“지켜야지, 내 곁에 두려면.”
여유로움을 무장한 듯 길게 늘어지는 입꼬리를 본 교진의 눈이 커졌다.
“서도운, 너…….”
그렇게까지 진심이라고?
교진은 거리낄 것 없이 나아가는 도운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도운은 VVIP만 입장할 수 있는 레스토랑 입구 앞에서 채연과 원우를 발견했다. 그들이 과녁이라도 되는 듯 도운은 성큼성큼 다가가 채연 앞에 멈춰 섰다.
“너지. 네가 또 심창진 꼬셨지.”
의문 없이 확신으로만 가득 찬 말에 채연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응, 기분이 어때?”
사람 잘못 건드린 도발이었다. 도운은 픽, 헛웃음을 지었다.
“한 방 먹은 것 같아서 새롭긴 하네.”
그의 시선은 여유롭게 원우에게 흘렀다.
“그럼 지원우 씨는 기분이 어때?”
묘한 말씨. 갑자기 변화구를 트는 공격에 채연과 원우는 둘 다 굳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지.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데도 상냥한 개 행세를 하는 지원우도 이해 안 가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순애보를 뒤로한 도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찍어 내며 국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심창진은 보기 드문 여유를 내보였다.
“처음 자리 맡으면 바쁠 테니 이해해.”
“마침 다 도착했군.”
국현은 이제 막 들어오는 채연과 원우를 도운의 어깨 너머로 확인했다. 도운은 잠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의 눈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보통 비서들은 모시는 상사와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식사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오늘은 원우와 교진 사이에 두 자리가 더 있었다.
왜 이 순간 손제인이 생각나는지.
싸한 직감이 들 때, 창진이 한마디 얹었다.
“아니, 올 사람들이 더 있지.”
동시에 도운의 발밑에서 얌전히 엎드려 있던 초코가 벌떡 일어났다. 코를 연신 씰룩거리던 초코는 갑자기 문을 향해 컹컹 짖었다.
도운은 저 간악한 인간이 또 무슨 수를 펼쳤는지 확인하고자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그가 문 쪽에 시선을 두자마자 인기척이 들렸다. 막 들어온 인영을 확인한 도운의 얼굴에 서리가 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기사화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유능한 기자를 불렀지. 인사해요.”
도운은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삼키기 위해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이 제인에게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