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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20화 (20/79)

20화

“오늘은 어떤 고민으로 오셨어요?”

보육원 운동장을 거닐던 국현의 귓가에 상냥한 미성이 들려왔다. 포근한 은선의 향기가 느껴지자 국현은 옅게 미소를 띠었다.

“도운이가 통 말을 안 듣습니다.”

“도운이 고집은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남달랐어요. 기사에서 보니 멋지게 성장했던데. 잘 지내고 있죠?”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뒤늦게 엇나가는 것 같습니다. 늦바람이라도 불었는지, 웬 기자 한 명을 회사에 들인다고 자리까지 빼놨더군요.”

그게 누구인지 아는 은선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이 순간 그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 참 다행이었다.

“혹시 은선 씨는 자식이 있습니까?”

운동장에서는 보육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따뜻하지만 참 가슴 시린 장면이다.

“여기 있는 모든 아이가 제 자식이죠. 그리고…….”

망설이던 은선은 다시금 말을 이어 붙였다.

“배 아파 낳진 않았지만, 마음으로 낳은 소중한 딸이 한 명 있어요.”

“저랑 같네요. 마음으로 낳은 도운이 이 녀석을 때릴 수도 없고. 제 누나가 살아 있었다면 도운이 군기가 좀 잡혔을까요?”

그리움이 불러일으킨 씁쓸함은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옛 기억에 국현은 가슴이 아팠고, 은선은 괴로웠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도운이보다 한 살 더 많았겠군요. 태어나면 아주 예뻤을 내 딸.”

그 아이는 살아 있어요.

은선은 아우성치는 속마음처럼 소리 내어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건 해맑은 보육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야! 네가 술래야!”

“계속 나만 걸려! 재미없으니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자!”

“음. 좋아!”

누군가를 짊어진다는 책임감은 이런 것일까. 사람은 늘 뒤늦게 깨닫는 법이다. 20대의 은선이 정옥을 위선자라고 했던 건 짊어지는 게 없었기에 가능한 폭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이 남자에게 그날의 진실을 알려 주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떨리는 손을 심장께에 올리자 동시에 뺨에 온기가 닿았다.

“이런.”

경련이 이는 속눈썹 사이로 걱정 어린 국현의 얼굴이 깊숙이 파고든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안색이 안 좋아요.”

“아……. 그런가요?”

“네, 은선 씨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까요.”

아, 그런데 마음은 또 눈치 없이 지진을 일으킨다.

은선의 심장 박동과 비슷해 보이는 속도로 국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날카로운 기운이 잠시나마 사라졌었던 국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무슨 일일까 싶어 본 액정에는 끔찍한 이름이 보였다. 국현은 차갑게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심창진.”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받는군.

“용건이 뭐야.”

그때까지도 국현의 왼손은 격정적인 목소리와 달리 나긋한 온도로 은선의 뺨에 들러붙어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채연이와 서 전무 결혼, 추진하고 싶은데.

“갑자기 혼사를 논하는 건 무슨 저의지?”

수화기 건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예측하기에는 충분했다.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켠 은선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손끝으로 긴밀한 반응을 눈치챈 국현은 하얗게 질린 은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냥 통화하면 되는데.

“내일 애들과 같이 만나도록 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은선 때문에 이성을 다잡을 수 있었던 국현은 다시 안면 근육을 부드러이 늘어뜨렸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군요.”

“아니에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살펴서 들어가세요, 회장님.”

고개를 숙인 은선은 다급하게 원장실로 들어갔다.

도운이와 채연이가 결혼이라니.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은선은 황급히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끊기고, 제인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성마른 숨결을 토해 냈다.

“방금 사 회장님이 왔어. 심 회장이랑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제인이 네가 꼭 들어야 할 것 같아.”

제인은 짙은 고요를 걷어 냈다.

-지금 바로 갈게요.

* * *

서도운의 파급력은 컸다. 제인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입고 싶지 않은 옷이었다.

학창 시절엔 제인이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싫었고, 여전히 채연이란 이름이 익숙해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것을 반항이라고 단정 짓는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일찍이 사회생활에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기자가 된 후로는 이름을 불릴 일이 거의 없었다.

손 기자 혹은 그냥 기자. 기자라는 직함은 듣기 싫은 이름을 완화하기 딱 좋은 매개였다.

‘불장난이 아니라는 거야, 제인아.’

그런데…….

서도운이 이처럼 진심으로 이름을 불러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 몸 위를 군림하던 우직한 몸과 낮은 중저음은 이제 더 이상 6살 꼬맹이가 아니었다. 남자가 된 서도운은 향기로운 언어로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심장을 두들겼다.

곧 단꿈에 젖은 듯한 기억들에서 그녀는 거칠게 끄집어 올려졌다.

“서도운이랑 무슨 얘기 했어.”

숨소리마저 격양된 태웅의 음성에 제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나야말로 묻자. 어쩌자고 서도운한테 우리가 사귄다는 거짓말을 한 건지.”

“거짓말을 한 게 화나는 거야, 서도운한테 그런 말을 한 게 화나는 거야.”

핸들을 움켜쥔 손에서 적나라한 질투가 돋아났다.

“한쪽에게라도 마음이 있으면 가능성 있는 관계잖아.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렇다고 내가 선배한테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야.”

“알아. 그래서 일부러 말한 거야. 혼란에 혼란을 더하면 다른 생각은 안 나기 마련이거든.”

“뭐?”

즉, 서도운의 생각을 지우고 자신의 고백으로 제인의 속을 시끄럽게 하겠다는 유치한 생각이었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발상 아닌가. 그녀를 좋아한다면서 오히려 힘들게 한다는 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차 세워.”

때마침 은선과 만나기로 한 카페가 보이기에 차갑게 말했다. 태웅은 더 덧붙이지 않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제인은 태웅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원장님.”

“제인아.”

초조하게 두 손을 맞잡고 있던 은선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한동안 보육원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 에덴이랑 금도랑 접촉 잦아지는 거, 너한테 괜찮은 거야?”

“그게 제가 기자가 되고자 한 이유였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울지는 몰랐어요.”

제인에게 은선은 언니이자 엄마였다. 가장 은밀한 비밀과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제인의 표정이 흙탕물처럼 흐려졌다.

“기억나세요? 제 어렸을 때 소원이 집을 가지는 거였잖아요.”

“기억해. 다른 애들은 산타 할아버지한테 장난감 소원을 빌 때 너는 집을 달라고 했지. 도운이랑 약속도 했잖아.”

‘좋아! 난 누나 손 좋으니까! 누나도 좋아! 커서 나랑 살자. 내가 집 줄게.’

안락함과 유대감을 느끼고 싶었던 어린 날의 그녀에게 그보다 더 어렸던 도운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훗날 에덴 호텔의 차기 승계자가 도운이라는 뉴스를 봤을 때, 제인은 내심 기뻤다.

그의 무의식에 아직 자신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가장 화려한 집과 무수히 많은 방으로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 무의식이 지금은 그녀를 헷갈리게 한다.

“도운이가 저를 기억 못 해요. 어렸을 때처럼 제 손엔 집착하는데, 얼굴을 못 알아봐요.”

“그게 무슨 소리니?”

“안면 인식 장애래요. 머리를 다친 적이 있대요.”

“세상에……. 그래서 채연이와 결혼을 한다는 거니?”

은선은 허망하게 벌어진 입으로 오늘 들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오늘 심창진이랑 국현 씨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 심창진이 갑자기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고.”

제인은 차갑게 웃었다.

“심채연 짓일 거예요. 심채연이 분명 뒤에서 심창진을 회유한 거고요.”

“설마 도운이를 빼앗기기 싫어서?”

“네.”

서도운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랬더라면 아까 출입증을 주었을 때 솔직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절망한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은선은 제인의 두 손을 잡았다.

“오늘 국현 씨한테 도운이가 너를 곁에 두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제인아, 어떻게 보면 기회야. 이제 네가 하고픈 거 다 해.”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지 주머니 안에서는 서도운이 건넨 출입증이 제인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은선의 말처럼, 언제든 자기를 꺼내라고.

* * *

새벽 6시에 기상한 도운은 초코를 산책시키고 집무실로 향했다. 고고한 도베르만의 자태와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굵직한 남성적인 선이 눈에 띄자 교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호출 내려왔어.”

눈썹을 찌푸린 도운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지금 시각은 오전 7시였다.

“이 시간에?”

“그러니까. 일찍 나오신 거 보면 급한 일인 것 같아.”

“불길한데.”

초코의 밥그릇에 적당량의 사료를 쏟아 준 도운은 교진과 함께 회장실로 올라갔다. 이른 아침이라 고객들의 눈에 띌 일은 없지만, 트레이닝복 팬츠 주머니에 손을 꽂은 도운은 누가 봐도 이곳의 실세였다.

“부르셨다고요.”

회장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 앉아 있는 국현이 보였다. 그의 뒤에 있던 경식이 도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초코 산책시킨 모양이지?”

“예, 하실 말씀이 뭡니까.”

“네 세력을 좀 더 키울 때가 왔다. 오늘 저녁 7시. 시간 비워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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