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나는 널 안 떠나. 설령 네가 서도운과 결혼을 할지라도 네 그림자가 돼서 널 지켜 줄 거야.”
“그래. 너만큼은 날 알아 주니까.”
그런데도 왜 마음은 자꾸 공허하고, 애정에 허덕이게 되는 걸까. 이성이 주는 애정과 달리 더 진한 연결 고리가 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나는 그저 그런 마음이 필요했을 뿐인데…….”
채연은 왜 저를 버리고 서도운을 안아 줬을까. 제가 가질 수 없다면 서도운도 가질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연은 침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원우는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를 핥듯이 훑어 내렸다.
“금방 다녀올게.”
대범한 발걸음만큼 마음도 독해진다. 본채로 들어가자 연정은 체리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딸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일갈했다.
“아버지한테는 가지 않는 게 좋을 듯싶구나. 자꾸만 뜨는 사국현과의 염문설로 심기가 불편하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지어져 있다. 딸의 일탈을 알면서도 함구하는 모정은 자신의 감정에만 치중되어 있다. 그 감정을 망가뜨려 주고 싶다.
“엄마는 사국현 회장을 아직도 사랑하세요?”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읽을 수 없는 연정의 눈동자가 꽂혔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제가 아빠 복수를 도와 보려고요.”
애초에 대답은 필요 없다.
“뭐야. 노크도 없이.”
서재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목구멍을 건드리는 매캐한 향처럼 채연은 창진의 약점을 가감 없이 찔렀다.
“사국현을 무너뜨리고 싶은 거라면 손제인 기자가 아니더라도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지?”
“저하고 서도운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어차피 제인은 서도운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서도운을 빼앗아 버려야 한다.
“사국현 회장이 그걸 노리는 거 아시잖아요. 우리라고 못할 것도 없고. 우리 금도엔 건설만 없으니 결혼을 통해 사국현의 건설을 빼먹고 버리면 그만이죠.”
결국, 그애가 저에게 달려와 애원할 수 있게끔. 제 것을 욕심낸 서도운이 무너질 수 있게끔.
“그리고, 지금 엄마랑 사국현 스캔들 뜨는 거 두고 보실 건가요? 아예 집안을 합쳐야 그런 루머도 사라지죠.”
마지막 쐐기를 박는 채연의 말에 창진의 눈엔 살기가 어렸다.
* * *
“서도운 전무님은 취임 몇 년 전부터 에덴 호텔의 경영 보고를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에덴 호텔의 개혁 작업을 이끌 주역이라는 기대가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한 수식어라고 생각합니다. 전무로 취임하기 전부터 저는 자체 감사와 고객 서비스 평가를 하며 고객이 만족할 방안을 실행하였고, 가장 공들인 면세업을 대폭 강화하였기에 에덴 호텔의 중장기 매출액과 성장 전략은 전도유망할 것입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제인이 눈치를 보고, 교진은 불안해하며, 태웅이 질투를 보이는 것과 달리 도운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했다.
하지만 이 VIP룸. 이곳에서 어떤 정열을 퍼부었는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제인은 자꾸만 도운이 의식됐다. 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모순적인가.
서도운 밑에서 참을 수 없는 교성을 내뱉던 그녀가 지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술과 성적 욕망에 난잡했던 남자는 지금 가장 단정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데.
심지어 그날에는 서도운이 주는 감각에만 취해 있어서 지금 앉아 있는 대리석 테이블과 베이지 톤 거실은 그녀에게 초면이었다. 제인이 기억하는 이곳에서의 장소는 바로 저기.
잘 익은 벼처럼 정수리만 보여 주던 제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아닌 척하지만, 제인의 작은 기척도 샅샅이 엿보고 있던 도운은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그래, 너도 저기가 의식될 테지.
살짝 열린 여닫이문 사이로 커다랗고 새하얀 침대가 보였다. 그게 태웅의 눈에도 띄었다는 게 흠이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말씀하시죠.”
다시 반듯해지는 그녀의 표정에 균열을 내고 싶다.
“심채연 씨와의 결혼설은 진실입니까?”
태웅의 질문은 푹 숙인 제인의 고개를 올리기 충분했다. 이건 상의한 적 없는 질문이다.
“사전에 공지하지 않은 질문은…….”
“다들 제 결혼에 관심이 많네요.”
교진이 나서려고 했지만 여유롭게 한 손을 들어 올린 도운이 제지했다. 허를 찌르는 질문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태웅은 혀에 가시를 세웠다.
“세간의 화제긴 하죠. 심창진과 사국현, 그들은 맹수처럼 물어뜯는데 서도운 씨와 심채연 씨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사랑.”
도운은 우스운 단어를 들은 것처럼 비웃었다. 어째서인지 바짝 약이 오르는 건 태웅이었다.
“그런데 심채연 씨는 압니까? 인터뷰를 호텔 방에서 하는 거. 손제인 기자도 있어서 상당히 불쾌할 것 같은데요.”
“뭐 하는 거야. 그만해.”
재빨리 녹음기를 끈 제인이 태웅의 어깨를 잡았다. 순식간에 공기는 얼음장이 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도운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미간을 나른하게 문질렀다. 교진은 재빨리 자리를 수습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죠.”
“당장 나와.”
가장 먼저 정리하고 일어난 제인이 태웅에게 턱짓했다.
“배웅해 드리죠.”
먼저 나가라는 듯 도운은 매너 있게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씹을 듯 노려본 태웅은 교진이 열어 준 문을 향해 걸었다.
“아, 하태웅 기자님.”
태웅이 문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불길했다. 도운의 앞에 등을 보인 먹잇감인 제인 또한 도운을 돌아보았다. 그는 벽에 한쪽 팔을 기대고 불량스럽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옥같이 엿 같은 말만 지껄여 주셔서.”
“무슨…….”
“네가 타이밍을 만들어 줬다는 거야.”
그 순간에 도운의 팔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제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태웅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도운이 교진에게 눈짓했다.
닫아.
“잠깐!”
굳어 있던 몸을 뒤늦게 움직였지만, 문은 이미 닫힌 후였다. 태웅은 문지기처럼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교진에게 윽박을 질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잠수교의 흘러넘치는 물처럼 불안정한 짐승이 도대체 무슨 이빨을 드러낼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문 열어요!”
“죄송합니다. 전 전무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듯 교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교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도운이 이토록 손제인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심채연은 원정 출산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여덟 살까지 나랑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어. 그걸 본인의 입으로 비밀로 하라고 했고, 나한테 누나라고 속였어. 문제는 손제인도 나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것 같다는 거지.’
그럼 금도 그룹 일가 전부가 각각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저놈의 행동이다.
‘도대체 에덴 호텔에 전담 기자실 자리가 어디 있었냐고.’
교진은 부디 저 대화가 빨리 끝나길 빌었다.
* * *
순식간이었다. 훅 다가온 우드 향이 심장을 내려앉게 했고, 시야가 어지럽더니 숨이 턱 막혔다. 시공간에 빨려 들어간 듯 도운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제인의 종착지는 새하얀 침대였다.
바스락거리는 침구에 머리칼을 비비듯 고개를 돌리니 얼굴 양옆을 지탱한 우직한 팔이 보였다. 제인은 자신의 지붕이 된 도운에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성과 감정 중에서 골라 볼까 했는데, 솔직한 심장을 따라 보려고.”
뜨거운 눈동자가 거리를 좁혀 온다. 키스할 듯 입술이 가까워지자 제인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너 맞아. 그날 나랑 잔 사람.”
“…….”
“근데 내 누나가 네가 맞는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워. 어렸을 때 작은 사고가 하나 있었거든.”
틈 좁힌 거리는 서로의 시선을 샅샅이 헤쳤다. 숨결은 무거운 고백처럼 피부를 짓눌렀다.
“금수저의 탈을 쓴 유기견.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회장님 집으로 들어가고 처음으로 유치원이란 곳에 가 봤어. 왜 그런 곳 있잖아. 대가리는 커서 세상보다 악을 먼저 배운 애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곳.”
“…….”
“거기에서 걔네가 날 패더라고. 그때 나는 몸도 작고, 대가리도 작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넓었어. 여기서 반항하면 날 데리고 온 회장님이 난처해질 거란 걸 알고 반항 한번 못 했지. 그때 어떤 녀석이 날린 발길질에 뒤로 고꾸라져서 사물함에 머리를 박았는데.”
도운은 난처한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내 올곧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다.
“그 후로 사람 얼굴을 잘 인식 못 해.”
제인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또 웃긴 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게 짧아서 여섯 살 때 봤던 누나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거야. 그래서 감촉에 더 예민해지긴 했는데……. 심장이 손제인이라고 외친단 말이지.”
침구 위로 어설프게 내려앉은 제인의 손을 도운이 자신의 입가로 가져왔다. 지문 위로 뭉근하게 닿아 오는 도운의 숨결은 숭고했다.
“그래서 난 심장을 따르기로 했어.”
“…….”
“그러니까 누나도 나한테 기회를 줘. 내 옆에서, 내가 너를 알아볼 기회를 달라고.”
알아본다는 것. 네가 나를 알아보는 거. 사실은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벽에 막혀 있었는데도, 나를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게 제가 아니면요? 누나가 심채연 씨인 채로 살아왔잖아요.”
“그래도 난 어떻게든 너를 위한 판을 짜겠지. 지금처럼.”
그대로 제인의 허리를 감싸고 일어난 도운은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곧장 주머니에 넣어 둔 에덴 호텔 출입증을 건넸다.
“에덴 호텔 전담 기자 자리 하나 마련했어. 네가 오기만 하면 난 어떻게든 널 알아봐.”
“…….”
“불장난이 아니라는 소리야, 제인아.”
그 순간 큰 타격을 입은 듯 제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딱딱한 직사각형의 출입증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처음이었다. 제 이름이 아닌 이름이 불렸을 때 가슴에 파동이 인 것은. 채연이란 이름을 되찾고 싶었던 제인에게 이 신호는 정말이지, 큰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