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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18화 (18/79)

18화

극도로 가시 세운 신경이 옆자리를 의식한다. 태웅은 제인이 일어나는 기척을 느끼자 번뜩 고개를 돌렸다.

“어디가?”

“화장실.”

제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언제부터 사소한 행동까지 보고했는지. 지나친 간섭이 거북했지만, 제인은 태웅에게 던진 눈길을 회수했다.

서도운부터 심채연, 그리고 심창진의 역영입 제안까지. 머릿속이 엉망인 제인은 굳이 태웅의 감정까지 끌어오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로 간 제인은 찬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전무님은 양심에 안 찔리세요? 첫사랑이라던 심채연과 20년 넘게 키워 준 사국현 회장에게.’

그렇게 말했던 건 충동 반 오기 반이었다. 제인의 마음 안에는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다. 가장 저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눈뜬장님이 되었으니. 그 심술은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부풀려 갔다.

어쩌면 서도운이 단번에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찔릴 양심 같은 건 없고, 심채연은 내 첫사랑도 아니라고. 그러나 부메랑처럼 돌아온 대답이 침묵이라, 어이없이 품위를 논했다.

“정작 품위 없게 행동하는 건 난데.”

어쩌다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 버렸을까. 확실한 건, 최연정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것이다. 사국현을 버리지도 그렇다고 취할 수도 없는 몸일 테니 사국현과 가장 관련 있는 그녀를 몰래 감시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야만 심창진과 사국현. 둘 사이에서 완벽한 사랑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걸 모르는 심창진에게 갈 생각은 죽어도 없다. 오히려 제인이 향해야 할 사람들은 극명했다.

“서도운과 사국현…….”

나의 에덴, 그들이 있는 천국으로. 비록 그들이 저를 버렸을지라도.

거울을 빤히 직시하던 제인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화장기 없는 완벽한 민낯 아래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난다.

서도운이 남긴 키스 마크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있을 땐 대답을 가져오라는 서도운의 말에 있는 대로 초조했는데, 없어지니 또 그거대로 혼잡하다.

정말 두 사람은 결혼하는 걸까. 그녀가 던진 말이 서도운을 자각시켜서 다시 심채연에게로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제인은 다시 사회부로 향하며 은선에게 문자를 보냈다.

[원장님.]

늘 제인 걱정뿐인 그녀의 답장은 빨랐다.

[그래,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와.]

나를 알아봐 주는 유일한 사람. 너도 이렇게 날 알아 주었으면.

갈증처럼 일렁이는 열망의 발자국을 디뎠을 때, 기적 같은 동아줄이 내려왔다.

“마침 잘 왔다, 손제인. 너 태웅이랑 오늘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 인터뷰 따러 가. 사국현 회장이 너희를 지목했어!”

심장의 파동이 물살처럼 거세진다.

“손제인. 다시 한번 말하는데, 사국현 기사 네가 퍼뜨린 거라 이거 위험 부담 큰 건이다? 이번에 잘해야 해.”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장소는 어디죠?”

“에덴 호텔 VIP층. 왜, 거기서 심채연하고 스캔들 난 곳!”

이번에야말로 우리에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 역시 날 놓지 못하니까.

* * *

침묵 속에 에덴 호텔 VIP층에 도착했다. 일반 객실보다 더 크고 웅장한 VIP층에는 고작 인터뷰 하나를 하는데도 삼엄한 경호가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나라 간의 회담이 있을 때 대통령이나 귀빈이 오는 자리를 제인은 두 번이나 온 셈이었다. 태웅은 이 비밀스럽고, 화려한 지붕 아래 엉킨 두 남녀를 생각하니 눌러 둔 깨달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국현도 아는 거야. 너와 서도운이 뭔가 있다는 걸.”

사국현은 정확히 제인을 콕 짚어 지목했다. 의도는 명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인 기사를 터뜨린 너한테 인터뷰를 따라고 할 리 없어. 미리 경고하는 거지.”

조심하라고. 서도운과는 거기까지 하라고.

국현이 하고 싶은 말은 곧 태웅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알아.”

“알면 넌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마. 인터뷰는 내가 딸 테니까 옆에서 녹음해. 알았어?”

이미 정해진 계획에 번복은 없다는 듯 태웅은 카메라 렌즈를 힘주어 돌려 끼웠다. 태웅도 아는 것이다.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제인이 사실대로 토로했으니 감히 합리화도 못 할 것이다.

그러니 더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태웅의 감정을 긁어내릴 필요가 있다.

“선배.”

“어.”

“서도운에 이어 심창진까지 나를 영입하려고 하더라. 저번에 심창진 집 다녀왔어.”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참지 못한 태웅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제인은 태웅을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기어이 터져 버린 태웅의 감정에 시선이 마주했다.

“정작 중요한 건 말해 주지 않으면서 막상 결정적인 정황만 알려 주는 건 뭐냐고. 같이 있자고 너를 잡아 달라는 거야, 아니면 포기하라는 거야.”

“그냥. 나 친구 없잖아.”

친구,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

“선배가 나한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다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 나도 사람이라 가끔은 미칠 것처럼 답답하거든.”

그러니까 하태웅. 너는 손제인에게 딱 그 정도의 사람.

제인이 긋는 선은 과감하고 정확한 일직선이다. 무감각한 눈동자엔 어떠한 색채도 없다. 그가 호의라고 포장한 모든 언사와 언행은 결국 민낯인 상태였다. 이 관계를 훼손시킬 수도, 발전시킬 수도 없는 태웅의 숨결은 거칠었다.

“그럼 말해봐. 너랑 관련 있는 사람이 서도운이야, 금도야.”

“둘 다.”

“둘 다?”

태웅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과거를 음미하는 제인의 음성은 지독하게 담담했다.

“나 보육원에서 나고 자랐잖아. 서도운도 나랑 같은 보육원 출신이야.”

“……뭐?”

전혀 몰랐던 둘의 깊숙한 인연에 태웅은 한숨 같은 충격을 내뱉었다.

그러려면 서로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서도운은 제인에게 강하게 끌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일면식을 표출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딱 한 사람 빼고는 몰랐어.”

“딱 한 사람이라면…….”

그녀를 흔드는 서도운을 말하는 건가. 태웅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머릿속에 명령어를 내린 것처럼 익숙한 얼굴들이 입력된다.

심창진과 최연정 그리고 사국현은 제인과 애초에 접점이 없었다. 서도운은 취임식 이후 갑자기 제인과 엮이기 시작했고, 그다음 후보는 설마?

“심채연?”

태웅은 제인을 닮은 듯 또 미묘하게 다른 심채연의 얼굴이 스쳤다. 그가 짚은 헛다리에 제인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가방 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태웅은 그 손을 날렵하게 낚아챘다.

“제인이 너,”

“크흠.”

그 순간 그들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헛기침을 한 교진이 고갯짓을 했다. 그 앞에는 두 사람의 동향을 살피는 도운이 서 있었다. 그는 낮게 뇌까렸다.

“인터뷰로 왔는데 인터뷰를 하고 싶은 심정이네요.”

늘어진 입꼬리는 일순 제자리를 찾는다. 도운은 제인의 손을 포박하고 있는 불순한 사내의 손을 주시하며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교진이 말릴 새도 없이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태웅의 입가에 안착한다.

“두 분은, 연인 사이?”

여차하면 도운을 끌어낼 셈이었던 교진은 어깨를 크게 늘어뜨렸다.

주먹이라도 날리는 줄 알았는데.

짝다리를 짚은 도운은 가볍게 쥔 주먹을 마이크처럼 태웅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손등의 새파란 핏줄을 본 제인은 태웅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주먹을 앞세운 명백한 도발과 서도운이 짓는 승리자의 미소. 패배감이 물씬 느껴지는 빈손의 공허함을 느끼며 태웅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연인 사이.”

놀란 교진과 제인의 시선이 쏟아지든 말든 태웅은 도운의 주먹을 그대로 손바닥으로 감쌌다.

“안녕하세요. 건국 일보 사회부 하태웅 기자입니다.”

“아시다시피 서도운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도운은 여유로웠다. 태웅의 자극에도 꼼짝도 하지 않은 도운은 물 흐르듯이 제인에게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손제인입니다.”

이윽고 길게 뻗어진 두 손이 포개어졌다. 강인한 손이 묵직하게 와 닿는다. 마치 태웅의 감촉을 지우겠다는 듯 몇 초간 지그시.

여운을 남기듯 엄지로 제인의 손등을 길게 쓸고 지나간 도운은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반갑네요, 이렇게 또 여기서 만나 뵙고.”

도운은 제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인터뷰 시작하죠.”

* * *

창진의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는 원우의 보금자리이자 채연의 도피처였다. 작지만 아늑한 공간 속에서 채연은 안정을 느낄 수 있는 품에 나체로 안겨 있었다.

“원우야.”

“응.”

채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기던 원우는 그녀의 정수리에 숭고한 입맞춤을 내렸다.

“너 심장 엄청 빠르게 뛴다.”

당연한 소리였다.

“널 사랑하니까. 날 이렇게 만드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좋다. 네 심장 소리 들으면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지거든. 예전에도 그랬어. 보육원이 무섭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채연이 품에 안겼어. 그럼 채연이는 날 다독여 주면서 자기 품에 안기라고 했고.”

“…….”

“그때 들리는 심장 소리가 나한테는 이 세상 하나뿐인 자장가였어. 그때는 그게 전부 다 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너도 날 떠날 거니?

불현듯 들어 올리는 눈빛엔 정제되지 못한 불안이 있다. 처음 채연의 입에서 채연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십자가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것처럼 채연은 원우에게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었다.

투명하게 떨어지는 눈물은 순수한 이슬일 뿐이다. 적어도 원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채연은 너무 순수하기에 어떤 색이든 금방 물들어 버릴 여린 마음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 방아쇠를 당긴 건 무관심한 최연정과 냉철한 심창진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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