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17화 (17/79)

17화

이토록 끊이지 않는 사랑이라니.

‘창진이는 너 아이 가진 거 모르는 것 같던데. 내가 책임질게. 네 아이.’

얼마나 흡족한가. 감정적인 심창진과 달리 사국현의 이성은 단단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감내하기 위해 경영을 물려받으려고 행동했다. 그렇게 그들은 첫째 아이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사국현의 아이를 갖게 됐다.

‘분명 너를 닮은 딸일 거야.’

‘왜요?’

‘자꾸만 체리 먹고 싶다고 하잖아. 딸이면 이름도 채연이라고 지어줄 거야. 체리 연정을 줄인 거야.’

그는 그렇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고, 경영 수업을 받으러 해외로 떠났다. 여자 홀로 아이를 품고, 키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금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애정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쯤에 심창진이 찾아왔다.

‘나를 떠나더니 사국현 그 새끼와 배가 맞았을 줄이야.’

제 아이마저 사국현의 아이라고 착각한 채.

‘다시 나한테 와. 돈, 명예. 그 호화스러운 거 내가 다 누리게 해 줄게. 대신, 사국현의 아이들은 버려.’

그 오해를 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심장은 이미 두 남자에게 가 있는데 아이들에게 줄 모정이란 게 있을 리가. 일사천리로 사국현에게 이별을 고했다.

‘당신 아이 지웠어. 나 혼자서는 안 되겠더라. 다시 창진 씨랑 재결합하기로 했고.’

아이들과의 이별도 쉬웠다. 그래도 엄마라고, 누가 누구인지는 구분이 됐다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가 있을까.

저를 옥죄는 이 남자는 제 아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제 딸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사국현의 애증은 온갖 미움으로 뒤범벅될 텐데.

“기분이 좋나 보군.”

“네. 당신 품에 있어서요.”

연정은 창진의 거미줄에 일부러 걸려든 나비였다. 나비에게는 언제든 날아갈 날개가 있었다.

* * *

“손제인 기자 뭔데? 왜 심창진이랑 집으로 들어간 건데.”

“회장님 오너 리스크 터졌으니까 역으로 영입하려는 거지. 뒤통수 한 번 세게 치려고.”

심창진의 집에서 나온 지 오래지만, 근처에 차를 세운 도운은 창밖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교진은 기겁하고 백미러로 비치는 도운에게 소리쳤다.

“그럼 안 되지!”

교진은 도운과 제인이 가까워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인이 금도 쪽으로 넘어가 에덴에 위협을 주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파리가 꼬일 줄이야.

인내의 심지가 끊겨 갈 때쯤 제인이 나왔다. 도운은 총알 같이 문을 열고 제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심채연 씨는 안에 있으세요. 그럼.”

놀라기도 했지만, 심채연과의 대화로 분한 마음이 더 컸다. 냉정하게 일갈한 제인이 다시 가려고 하자 도운이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딜 가. 너 하나만 기다렸는데.”

“…….”

“심창진이 뭐래.”

“같이 일해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대답은?”

“생각해 본다고 했습니다.”

“영입은 내가 먼저 시도했잖아.”

“그것도 생각해 볼 거예요. 들어가세요.”

과거의 복기와 짧은 심채연의 대화로 이성이 흐트러졌다. 불퉁한 마음이 치솟는다. 지금껏 심채연 집에 있었으면서. 날 기억도 못 하면서.

“잠깐만.”

“멋대로 제 손 잡지 마세요.”

다시 붙잡아 끌어당기는 도운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도운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왜?”

“결혼할 여자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하룻밤 보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게 혹시 저는 아닌가 헷갈리는 마음에 붙잡으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불장난이라도 하고 싶으신 거냐고요.”

“고작 장난 같은 걸 할 거였으면 너를 찾아가지도 지금처럼 붙잡지도 않았겠지.”

제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엉망이 된 이성을 다시 차분히 쓸어 모았다.

“전무님은 양심에 안 찔리세요? 첫사랑이라던 심채연과 20년 넘게 키워 준 사국현 회장 사이에서.”

본래 자신을 향했어야 할 마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바람은 도운의 침묵으로 다시 구겨졌다. 제인의 입매가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맞나 보네요.”

나에 대한 감정은 그저 하룻밤의 쾌감이었던 것일까.

“부디 품위를 지키세요, 전무님.”

제인은 주먹을 꾹 쥐고 매섭게 질타했다.

* * *

도운은 자신의 정강이를 코로 밀어내는 초코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젯밤 손제인은 허를 찔렀다. 양심이라는 거, 그게 바로 도운을 짓눌러 왔던 문제다.

회장님은 어째서인지 아이에 관해 예민했고, 자신을 데리고 온 이유도 심창진과 최연정에 관한 복수 때문이었다. 집안의 결합 후 금도를 삼키려는 게 그의 최종 목표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냐.”

때마침 들어온 국현은 양반은 못 되는 호랑이였다. 도운은 벌컥 열리는 문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어쩐 일이세요.”

“업무가 많은 건지 머리에 잡생각이 많은 건지 확인 좀 해 보려고 왔다. 그래도 20년 넘게 키워 준 사람이 검찰 조사를 받는데 연락 한 통 없어?”

“뒤에서 조사 인원들 열심히 주무른 거 아시면서. 무사히 빠져나온 건 제 덕분이기도 합니다.”

며칠 보여 주기식의 자숙을 한 국현은 회사에 복귀했다. 국현은 접대용 소파에 두 팔을 널찍하게 늘어뜨렸다.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지. 결혼설 터지자마자 내 비리가 터져 유감이야.”

“그러게요.”

“그 기사 터뜨린 사람이 건국 일보 손제인 기자라지?”

전무실 공기가 싸늘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호텔 CCTV는 너만 돌려 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도운아.”

국현은 도운과 사우나를 한 날, 채연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과 키스 마크를 보자마자 배 실장을 통해 취임식 당일 CCTV를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VIP층 CCTV는 볼 수 없었지만, 연회장 안 CCTV는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서 도운과 이야기를 나누는 손제인 기자를 보게 되었다.

“심채연이었다면 아들 녀석의 혈기 왕성한 모습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었겠지만 손제인이라면 끝내라. 너 이리저리하는 거 나한테 다 들켰단 말이야.”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살을 부대끼고 산 세월은 무시 못 한다. 국현의 묵직한 시선에도 기죽지 않은 도운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회장님이 하려는 복수의 이유는 최연정을 향한 애정입니까, 아니면 심창진에 대한 분노입니까?”

“사랑, 증오 둘 중 뭐냐고 물어본 거라면 질문이 틀렸어. 최연정을 되찾아 온다고 해도 우리는 사랑할 수 없지.”

최연정이 지운 내 아이는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뒷말을 삼킨 국현은 상체를 앞으로 느슨히 당겼다.

“아직도 모르겠어? 금도를 망하게 한다는 건, 심창진과 최연정 둘 다 몰락시키겠다는 뜻이야. 애초에 목적은 확실히 정해야 한다, 도운아. 용서와 복수에서 난 복수를 택한 거야.”

“그럼 전 사랑과 은혜중에 선택해야 한다는 거네요.”

“얼마나 봤다고 사랑이야.”

국현은 냉철하게 일갈하며 다음 기회를 주었다.

“미뤄졌던 네 취임 인터뷰, 건국 일보 사회부에 맡길 예정이다. 손제인 정리해.”

통보를 끝으로 국현은 집무실을 나갔다. 국현에게 인사를 한 교진은 퍼뜩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말씀이 맞아. 정리해.”

“시작도 안 했는데 정리는 무슨 정리?”

“너 손제인 기자한테 흔들리는 거 다 들켰어.”

허, 도운의 잇새로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면 현모양처 두고 바람이라도 피는 난봉꾼인 줄 알겠다.

“교진아. 말은 바로 해. 흔들린다는 건 양 사방에서 나를 잡아당긴다는 건데 심채연은 단 한 번도 내 마음을 잡아당긴 적이 없어.”

“그건 심채연도 마찬가지일 거란 거 알아. 아는데.”

말을 끊은 교진의 말엔 답답한 심정이 가득했다.

“회장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잖아.”

“왜 못해. 지금껏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했으면 사춘기 한 번 세게 와 줘야지.”

도운은 자신의 입술을 야릇하게 쓸었다. 어제, 손제인에게 차마 항변하지 못했던 언어가 미련처럼 입술 위를 노니는 것 같다.

“야. 너 무슨 생각이야?”

‘부디 품위를 지키세요, 전무님.’

교진의 불안에도 도운의 응시하는 허공엔 제인이 수증기처럼 떠다녔다.

지금 누구는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주인만 떠올리는데. 버려진 유기견처럼 예나 지금이나 누나만 찾는데.

“그런데 나한테 품위를 지키라고?”

도운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간다.

“확실히 하라는 말을 참 얄궂게 해.”

손제인도, 우리 회장님도.

“배교진.”

“왜, 왜!”

“당장 에덴 호텔 전담 기자 자리 하나 만들어.”

불장난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보여 주면 되는 일이다.

“야, 도운아. 너 진짜 안 돼.”

회장님이 끝내라고 한 게 불과 10분 전이다. 이 망나니가 겁먹지 않으리란 건 알았지만 적어도 자중하는 기미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기어코 손제인과 엮이겠다는 도운의 선택에 교진은 애원했다.

“왜 그렇게 손제인 기자한테 집착하는지 이유라도 알자. 어? 너도 뭐 짚이는 게 있으니까 그날 호텔 방에서도 심채연이 아니라고 하는 거겠지.”

교진은 국현을 향한 도운의 충성을 안다. 제아무리 날짐승의 면모를 타고났더라도 도운은 제 주인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 너한테만큼은 확실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그런데 지금 서도운의 눈에는 손제인이란 먹잇감만 보이는 듯 일렁이는 것이 의아한 것이다. 교진은 도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댄 도운은 상체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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