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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16화 (16/79)

16화

평화는 녹아내리는 눈이었다. 도운과 약속을 하고, 꽁꽁 언 몸으로 눈사람까지 만든 제인은 며칠 후 혹독한 감기에 걸렸다.

채연은 쌕쌕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제인을 보고 세모눈이 되었다.

이게 다 서도운 때문이다. 동생을 빼앗고 아프게 하다니.

제인이가 아픈 틈을 타 흠씬 패 줄 생각이었다. 고사리 같은 주먹을 불끈 쥔 채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도운! 서도운 어디 있어!”

그런데 서도운이 의문의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도운? 네 이름이 서도운이라고?”

“네. 아저씨는 누구세요?”

도운이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사국현이라고 한다. 내가 널 데리고 가고 싶은데 도운이 생각은 어떠니?”

사국현. 이름도 멋있는데, 얼굴도 무척 잘생긴 남자였다. 우와. 탄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채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제가 가면 아저씨는 저한테 뭘 해 줄 거예요? 집 주실 수 있어요?”

“뭐? 하하! 그럼. 아저씨는 집도 아주 많고, 돈도 아주 많아.”

“그럼 저 갈래요! 우리 누나 집 주기로 했어요! 누나도 치료할 수 있겠다!”

순수한 대답에 채연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 틈에 서도운이 없어진다면 채연이는 다시 나만 보겠지?

서도운이 나타나기 이전에 동생은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손을 꼭 붙잡아 주었고, 그녀가 싫어하는 반찬은 몽땅 먹어 주고, 못된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런 제 동생이 이젠 저보다 서도운을 더 아끼기 시작했을 때, 채연은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서도운이 제인이 옆에서 사라지다니! 채연은 신나서 발을 굴렀다.

그 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제인은 도운이 떠날 채비를 하는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완벽한 채연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서도운이 떠난 지 3일째가 되던 날. 채연은 제인의 앞에 엎드려 누워 다리를 팔락였다. 눈엣가시 같은 서도운이 없으니 콧노래도 절로 나왔다.

“자장, 자장.”

작은 손으로 제인의 가슴을 토닥여 주며 채연은 만족감이 들었다.

이런 걸 해 줄 사람은 네 인생에서 나뿐이어야 해. 네가 먼저 이 세상엔 우리 둘뿐이라고 했잖아?

그 말에 응답하듯 내내 감겨 있던 제인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채연아!”

“언니…… 도운이는?”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하는 말이라곤, 다시 서도운이었다. 반듯하게 펴진 마음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복구되지 않는 배신감이었다.

그동안 아픈 제인이를 간호한 건 자신이었다. 손에 비해 수건이 커 힘들었지만 원장님이 하시는 것처럼 직접 물수건을 짜 제인의 열을 내려 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너는.

너는 또 서도운이야?

“……너 미워.”

너를 보살펴 준 건 난데! 서도운은 이미 떠나고 없는데!

“언니! 언……! 콜록!”

목이 다 쉬어 버린 제인이 고통스럽게 불러도 채연은 거칠게 눈물을 닦아 대며 원장실로 향했다. 이 속상한 마음을 정옥에게 안겨 풀어 내고 싶었다.

“헝……! 원장님!”

그래서 원장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여긴 왜……!”

채연을 보자마자 숨을 급하게 몰아쉰 정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연은 남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신기하네요. 데리러 온 날, 마침 한 명만 오다니.”

여자는 무감각한 얼굴로 우아한 음성을 냈다.

“누구……세요?”

“심창진, 최연정. 너의 부모님이지.”

데려가? 나를? 엄마, 아빠가?

입만 뻥긋거리는 채연에게 창진은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했다.

“그래, 이름은?”

가지 않아요. 저는 동생이랑 떨어지지 않기로 했어요.

머리는 그렇게 말하는데. 마음은 따로 놀았다. 서로 떠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먼저 나를 떠난 건 동생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도 지금 내 감정을 똑같이 느껴봤으면 한다.

“제 이름은, 채연이에요.”

그 꼬맹이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채연의 이름마저, 내가 가질 것이다.

창백한 정옥이 나서려고 했지만, 연정이 매서운 눈으로 저지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은선 또한 입을 막고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창진은 비틀린 감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채연이.”

사채연이다 이 말이지.

“하지만 넌 앞으로 심채연이 될 거야. 집으로 가자.”

“네.”

창진은 채연이를 안아 올렸다. 처음 느껴보는 따스함과 높은 공기에 채연이는 다리를 달랑거렸다.

본래 채연이었던 제인은 그날, 언니를 달래 주려고 쫓아왔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울지도 못한 채 멀어져 가는 언니를 멀거니 바라만 봤다. 때로는 순수해서 더 빨리 알아차리는 것도 있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도운이. 제 이름으로 불리고, 저를 봤으면서도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언니.

“어떡해. 어떡해, 우리 채연이…….”

은선은 그날 울지 못하는 채연을 대신해 펑펑 눈물을 쏟았다. 거짓을 방관한 정옥은 시름시름 앓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채연의 삶을 빼앗은 제인은 다시 만난 도운에게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자신이 제인이라는 거짓말을 말이다.

그렇게 자매의 신분은 한 영악한 거짓말로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렸다.

채연은 제인으로, 제인은 채연으로.

* * *

채연이었던 제인, 제인이었던 채연의 시선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넌 서도운이 싫었던 게 아니야. 서도운이 좋아했던 나를 싫어한 거지.”

“아니야. 넌 내 마음 몰라.”

“훔쳐 간 내 이름으로 도운이 앞에서 내 행세까지 했는데 모를 리가. 우리 사이는 그때 끝장난 거야.”

“그쯤 하시죠.”

치열한 말싸움에 원우가 끼어들었다. 제인은 원우가 뒤로 뻗은 손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채연은 다부진 손을 퍽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 저의 임무고 손님은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변명 안 해도 돼요.”

다만 의구심이 들 뿐. 두 남자 사이에서 아주.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너 너희 엄마 꼭 빼닮았다.”

철저한 이방인을 자처한 제인은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채연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서도운이야. 또.”

어렸을 때도 제인은 늘 자신에게 뒷모습만 보였다. 물론 그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든든한 품이었다. 그러나 서도운이 나타난 후로는 아니었다. 자신이 아닌 서도운을 향한 걸음이었다.

지금도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또 서도운을 만나겠지. 채연은 마지막 동아줄처럼 원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키스해 줘.”

내 불안이 다 녹아내리게.

원우는 쓰라린 채연의 표정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마당에 심은 커다란 소나무로 채연을 이끈 원우는 망설임 없이 여린 입 속을 파고들었다.

심창진의 운전기사였던 아버지가 암 투병으로 돌아가시고, 원우는 혼자가 되었다. 알량한 동정으로 심창진이 거두어 주긴 했지만, 결핍된 애정을 채울 수는 없었다.

이를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어린 날의 채연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과 비밀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서도운을 싫어하고, 손제인을 원망하는 건 채연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흔드는 손제인이나 그녀가 결혼까지 감행하려는 서도운이나 원우에게는 피차일반이지만, 그는 채연이 가지고 싶은 건 모조리 안겨 주고 싶었다.

채연은 실패했을 때 더한 보상을 주니까. 오늘도 채연은 그에게 매달려 뜨겁게 안아 달라 조를 것이다. 그는 그런 채연을 지금처럼 채워 주고.

“별채로 들어가자.”

제각각 비틀린 감정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다.

* * *

고양된 흥분을 흩뿌린 채 별채로 들어가는 딸을 보고도 연정은 고요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침실로 향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창진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채연이는.”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손제인 기자 배웅해 줬어요.”

“그렇군. 이리 와.”

연정은 제게 뻗어 오는 두툼한 팔에 사뿐히 안겼다. 꽉 조여 오는 강한 힘이 퍽 마음에 들어 요사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대학 시절 연애를 했을 때부터 심창진에겐 남다른 집요함과 집착이 있었다. 날 적부터 가난하고 빈곤했던 연정은 그런 포만감 있는 사랑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돈도 명예도 있는 근사한 남자가 사랑까지 주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예상치 못한 임신을 했을 때도 그와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할 줄 알았다.

‘난 너 같이 천박한 게 우리 창진이 곁에 머무르는 거 못 본다. 몇 달 생활비는 될 거다. 조용히 떠나.’

하지만 신분이란 좁혀지지 않는 차이였다. 아이를 갖게 된 그녀는 결국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심창진은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자존심에 그녀를 찾지도 않았다. 홀로 힘겹게 아이를 낳고, 다시금 시작된 가난과 결핍에 허덕일 무렵이었다.

‘연정아, 너…….’

‘오빠가 여길 어떻게 왔어요?’

갑작스러운 국현의 방문은 또 다른 사랑을 피워 내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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