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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15화 (15/79)

15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부모님이란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또 서글퍼졌다.

버림을 받았구나, 우리는 또.

그들이 남기고 간 작은 불안에 7살의 세상은 더욱 치열해졌다.

“동생보다 키 작은 바보래요, 바보래요!”

“아니야! 나 바보 아니야!”

이 세상엔 이제 우리 둘뿐이다. 그 생각에 좀먹혀 제인은 채연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겐 똑같이 응수해 줬다.

“야. 그럼 너는 못생기고, 뚱뚱한 게 뭐가 잘났다고 우리 언니 괴롭혀.”

“뭐? 너 이씨!”

“제, 제인아! 흐헝!”

여자아이의 몸으로 남자애들과 바닥에 뒹굴며 치고받고 싸우고.

“어머. 넌 이름이 뭐니? 무척 예쁘게 생겼다.”

“아줌마. 저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왜?”

“전 귀신을 봐요. 그래서 저를 데리고 가면 틀림없이 아줌마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누군가 언니와 저를 갈라놓으려고 하면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더 악독한 어린 애가 되어야 했다.

그때는 일부러 괜찮은 척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창진과 연정이 정말 그들의 부모님인지, 그들을 왜 버린 건지 알고 싶은 서러움이 제인을 더 발버둥 치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날 선 나날을 보내던 와중, 보육원에 새로 입소한 서도운을 만나게 됐다.

“어, 엄마! 엄마아악!”

서도운은 첫 등장부터 요란했다. 깡마른 몸으로 목이 쉬어라 울기만 했고 얼굴엔 눈물과 콧물 자국이 흥건했다. 어째서인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정옥이 달래 주려고 손을 뻗어도 도운은 바닥을 뒹굴기만 했다.

“엄마 손 아니야! 엄마 줘! 엄마아아아아악!”

밤낮 가리지 않고 울어 대는 서도운을 보며 보육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혀를 쯧쯧 찼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트라우마가 됐으면 저래.”

“듣기로는 편모 손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자랐대. 편모가 술만 먹었으니 애를 잘 보살피기나 했겠어?”

“쟤도 참 기구해. 저렇게 울어 대고 악다구니를 퍼부으니 입양해도 다시 파양 신세였다잖아. 그것도 벌써 4번째인가?”

“에휴, 쯧쯧쯧…….”

달래 줄까.

겪어본 사람이 그 마음을 안다고 제인은 도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떻게든 달래려는 정옥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보다 못한 은선이 말려도 도운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보육원 운동장 위를 데굴데굴 구르기만 했다.

또 웃긴 게 손대지 않으려고 하면 도운은 흥건한 얼굴을 마구 저었다.

“안 돼요. 손 놓지 마. 손 줘. 손 안 돼.”

제인은 그때 처음 동질감이라는 걸 느꼈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자신의 마음과 도운의 갈망은 너무 흡사했으므로.

달래 주고 싶어.

결정을 내린 제인은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꽁꽁 매듭 묶인 손이 자신을 쭉 끌어당겼다.

“가지 마. 나 두고 어디 가려고?”

“도운이 같이 달래 주자, 언니.”

채연은 뾰족해진 눈으로 도운을 보다 제인을 째려봤다.

“난 쟤 싫어! 나 버리고 갈 거면 네 마음대로 해!”

“언니!”

휙 돌아서는 채연의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결국, 제인은 도운에게 가기를 포기하고 언니를 달래 줘야만 했다.

그날 새벽. 제인은 끙끙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제인은 저도 모르게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언니, 도운이 아픈가 봐.”

아침에 달래 주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제인은 채연이 자신을 잡기도 전에 도운에게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흐으…….”

“괜찮아.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껍데기뿐인 말이다. 힘없는 어린 애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이 뭔 큰 힘이 된다고.

하지만 도운에겐 아니었다. 편모에게 버려진 손의 온기는 아직도 도운의 손바닥 안에 얼룩처럼 남아 있어 그 흡사한 감촉을 놓칠 수 없었다.

땀에 전 속눈썹이 파르르 열렸다.

“엄마…….”

“엄마 아니고, 누나야.”

“누나…….”

“응.”

“계속 만져 줘……. 나 계속 만져…….”

“알았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매일 같이 울던 눈이 사르륵 접혔다. 제인은 내심 기뻤다.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 줄 수 있어서.

도운을 재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제인은 미처 알지 못했다. 뒤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연이 살포시 맞잡은 둘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걸.

* * *

“아야.”

깊은 잠을 깨우듯 따끔한 통증이 손끝에 퍼졌다. 눈을 뜨니 제인의 엄지가 축축한 동굴 속으로 밀려 들어가 있었다.

“너…… 뭐 하는 거야?”

끔뻑끔뻑 속눈썹만 여닫기를 몇 번. 제인은 도운이 모로 누운 자신을 마주한 채 그녀의 엄지손가락을 빨고 깨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린 도운은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누나 손 좋아. 누나 손 내 거야.”

“……너 아직 덜 나은 거야?”

쪽쪽 소리 나도록 빨아 대는 엄지를 잡아 빼니 뽁, 하는 강한 마찰음이 났다. 도운이 걱정스러운 제인은 작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7살은 이 체온이 열인지, 정상 체온인지 알지 못했고 도운은 실성한 것처럼 헤헤 웃기만 했다.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언니. 도운이가…….”

이상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뒤를 돌아보니 구겨진 채연의 이부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설마!

심창진, 최연정.

절대 잊지 못할 이름이 머릿속에 스친 제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나?”

“언니! 어디 있어!”

도운은 제인을, 제인은 채연을 부르며 보육원을 한바탕 들쑤셨다. 그녀는 불안했다.

도운이를 간호해 준 사이 언니를 빼앗긴 건 아닐지. 언니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건 아닐지.

“채연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너 이름도 영어라서 말도 잘 못 하는 거지? 바보네, 바보!”

헉헉거리며 보육원 놀이터로 가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채연은 남자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눈물만 글썽이고 있었다.

“야! 너희 내가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말랬지!”

“악!”

언니가 떠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도 아드레날린은 가라앉지 않아 제인은 남자아이의 어깨를 흙바닥에 밀어뜨려 그 위에 올라탔다.

“너 왜 자꾸 우리 언니 괴롭혀!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언니가 없어졌을까 봐. 언니를 데려갔을까 봐!

옴팡지게 쥔 주먹을 휘둘렀다. 밑에서 버둥거리던 남자아이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파! 아프다고! 원, 원장님!”

“야, 너 준석이 왜 때려!”

“아!”

이내 제인은 몰려온 남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채연은 단지 제인이가 눈을 뜨면 자신을 찾아 줬으면 했다. 제게는 제인이밖에 없는데. 제인이는 그녀를 버리고 어젯밤 서도운을 택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원처럼 제인이가 달려왔지만, 두들겨 맞는 동생을 보고도 채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나 괴롭히지 마!”

그때, 겁먹은 채연의 앞으로 날렵한 새끼 호랑이가 달려왔다. 도운은 제인을 때리는 남자애들을 밀치고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날렸다.

“왜 우리 누나 괴롭혀! 왜 때려!”

“악! 워, 원장님! 흐어어엉!”

“도운아. 그만해!”

“얘들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소란을 듣고 온 은선의 제지에 싸움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누나 나 잘했지. 아이 예쁘다 해 줘.”

“안 예뻐. 너도 다쳤잖아. 왜 끼어들어.”

“그야 누나가 다치니까.”

그러나 채연은 매번 자신을 지키기만 했던 제인을 처음으로 도운 것이 서도운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제인이 그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배알이 뒤틀렸다.

서도운을 향한 조악한 질투가 자꾸만 치밀었다.

* * *

그 후로 제인은 도운을 살뜰하게 챙겼다. 채연의 짐작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보호해준다는 것에 감동한 제인은 어린 도운이 좋았다.

하지만 둘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채연은 위기감이 들었다.

“내 동생이야!”

“누나는 내 거야. 저리 가.”

“어어. 도운아, 잠깐만.”

늠름한 나무 같았던 동생은 서도운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채연은 자신의 손을 매섭게 떼어 낸 후 제인을 끌고 가는 도운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는 제인이 보였지만, 앙다문 입술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안 가.”

내가 왜 가? 맨날 네가 왔잖아. 나는 너를 기다리는데 지금도 네가 내 손을 놓고 서도운한테 갔잖아.

끓어오르는 누군가의 속마음이 무색하게 소복하게 쌓인 보육원 운동장의 눈은 새하얗기만 했다. 두 아이의 대화는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누나. 누나는 이름이 뭐야?”

“안 알려 줄 거야.”

“왜? 내가 싫어?”

그 순간 사박사박,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던 제인의 걸음에 흠칫 제동이 걸렸다. 누나의 손을 꼭 잡은 도운도 덩달아 덜렁 멈춰 섰다.

쌍꺼풀진 큰 눈망울은 풀려 버린 왼쪽 신발 끈을 난처하게 바라본다.

“나는 신발 끈 못 묶는데.”

언니가 묶어 줘야 하는데.

오늘도 꼬맹이는 언니에게서 저를 빼앗아 왔다. 언니는 이 꼬맹이를 싫어한다.

자꾸만 그녀를 훔쳐 간다고.

“정말 내가 싫어서 안 알려 주는 거야?”

“아니야.”

하지만 제인은 이 꼬맹이가 싫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 펑펑 내리는 눈송이처럼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살살 달랬다.

“이름을 알려 주면 친구들은 항상 보육원을 떠났어. 너는 특별히 2주 동안 안 가면 이름 알려 줄게.”

친구가 생기면 그 친구는 언제가 됐든 새 가족의 품으로 날아갔다. 언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다시 혼자가 된다는 건 엄청나게 슬픈 일이다. 그래서 떠나지 말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 보았다.

“좋아! 난 누나 손 좋으니까! 누나도 좋아! 커서 나랑 살자. 내가 집 줄게.”

도운은 두서없이 말하며 활짝 웃었다. 자그마한 손에는 도운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이 실려 있었다.

“알았어.”

“대신 누나는 평생 내 거야.”

순수한 소유욕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도운은 주인을 향해 맹목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헤헤 웃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귀여워 제인은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줬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에 제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괜스레 눌러 참았다. 이 애를 속절없이 믿어 버렸다. 이제 제 세상엔 저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 2명이나 된다.

언니와 이 꼬맹이.

제인은 코를 훌쩍이며 이 순간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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