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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14화 (14/79)

14화

제인을 거실에 앉혀 둔 창진은 침실로 들어왔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는 그의 뒤를 연정과 채연이 뒤따랐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죠?”

“아침에 손님 온다고 얘기했을 텐데.”

“그게 기자라는 소리는 안 했잖아요.”

그것도 손제인이라는 말은.

연정은 늘 가면을 쓴 것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창진을 안달 나게 했고, 불안에 떨게 했다.

가진 듯 가질 수 없는 갈증도 있었지만, 저 속에 사국현을 품은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지독한 질투와 소유욕이 목구멍을 조여 왔다. 그런데 이번엔 연정의 차분함에 실금이 갔다.

“왜 이렇게 초조해하지?”

“초조한 게 아니라 당황스러울 뿐이에요.”

“혹시 손제인이 사국현의 기사를 쓴 기자라 그런가? 그래서 신경 쓰여? 아직도 그 새끼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새까만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른다. 창진의 집착은 재가 되기는커녕 더 커다란 화산처럼 부풀어 올랐다.

연정은 습관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손제인과 사국현의 접촉도 물론 문제지만, 아무도 모르는 과거가 더 큰 문제였다. 지레 불안해 과잉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제인이 저 아이는…….

궁지에 몰린 연정을 막아 세운 건 또 다른 불안이다. 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손제인 기자가 왜 우리 집에 온 거예요?”

“오늘따라 두 모녀가 이상하군. 알고 싶으면 조용히 거실로 나와.”

명쾌한 답을 주지 않은 창진을 채연이 붙잡으려고 했다. 그보다 빨리 연정이 채연의 손을 잡아챘다.

“침착하렴.”

“……엄마.”

단 네 글자에 채연의 심장이 크게 울렁였다.

이상하다. 엄마는 내가 초조할 이유를 모를 텐데. 갓난아이를 바로 보육원에 맡겨 모정이란 게 없는 사람이라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텐데.

‘아니겠지. 아닐 거야.’

고개를 저은 채연은 거실로 향했다. 이미 가장 상석엔 창진이 앉아 있었고 그 기준으로 왼쪽엔 제인이, 오른쪽엔 연정이 앉아 있었다.

채연은 재빨리 연정의 옆에 자리 잡았다. 모두 열리는 창진의 입술에 집중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손제인 기자, 나와 일해 보겠나?”

거침없는 창진의 제안을 제인은 당돌하게 응수했다.

“사국현 회장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요?”

“역시 유능하군.”

창진의 입가가 뱀처럼 길게 찢어졌다.

“저번 인수 합병 때도 상당히 정감 가고, 익숙하더라니 이러려고 그런 느낌이 왔을지도 모르지. 내 생각엔 우리가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은데.”

제인은 잠시 시선을 틀었다. 찔릴 법도 한데 흔들림 없는 최연정의 무표정과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심채연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호화스러운 집 내부까지.

자신이 이 속에 있으니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되자는 말씀이시네요.”

“그것도 좋지. 뜻이 맞으면 전부 가족이니까.”

“하지만 전 반대해요.”

제인이 슬쩍 도발을 던지자 연정은 망설임 없이 칼을 빼 들었다.

“뜻이 맞아도 가족이 될 수 없는 경우가 있죠. 게다가 피도 통하지 않는데 가족이라는 말, 너무 거창하지 않나요, 손제인 기자?”

시선의 줄다리기가 팽팽하게 이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완벽히 들어맞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걸 폭로하면 불리해지는 건 저뿐이다. 보아하니 심창진은 아직 제 정체를 모른다.

그건 사국현도 마찬가지겠지. 씁쓸함을 삼킨 제인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심창진의 도발에 다른 사람들이 동요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 안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것은 더욱 기분이 나빴고.

“그러네요. 말씀대로 저 또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원대로 꺼져 줄게요.

하지 못한 말을 남겨 둔 제인은 드넓은 마당으로 나왔다. 헐레벌떡 뒤따르는 인기척은 뻔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제인은 뒤를 돌았다. 채연이 새빨간 뺨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넌 나한테 다 뺏겼어. 서도운도 그럴 거고.”

그러니까 제인은 제가 가진 걸 다시 빼앗지 못한다.

“그래?”

차분히 응수한 제인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시선은 담담하게 채연을 응시했다.

“네, 서도운 전무님.”

채연의 바람은 하나였다. 모자랄 것 없던 손제인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버렸으니, 서도운도, 그 무엇도 되찾지 못하는 것. 그러니 제인의 입에서 나오는 서도운의 이름은 더없이 최악이었다.

채연이 입술을 꽉 깨물며 제인을 노려보자 그녀는 보란 듯이 속삭였다.

“저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거 할게요.”

“너……!”

화가 난 채연이 제인의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채연보다 키가 월등히 큰 제인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채연에게 있어 제인은 늘 큰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나 제인에게 있어 채연은 그저 악랄한 도둑일 뿐이다.

“어때. 눈앞에서 네 것을 빼앗긴 기분이.”

말을 하는 제인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21년 전 네가 내 인생을 강탈해 갔을 때의 내 기분을 이제 좀 알겠니?”

제인은 도무지 회상하고 싶지 않던 자신의 최초를 떠올렸다.

7살, 당시 제인의 하루는 무척이나 추웠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 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비좁은 보육원에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피부를 맞대곤 했다. 아이들의 공통점은 웃지 않고, 매일 같이 운다는 점이었다.

“흑, 엄마! 아빠!”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그때 제인은 어렴풋이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아, 우리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구나. 하지만 버림받은 제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채연, 그 애만큼은 세상에 처음 날 때부터 늘 그녀의 옆에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놀이터에서 놀 때도. 둘은 늘 손을 꼭 붙들고 다니며 세상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둘도 없을 서로의 기둥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육원 친구가 물었다.

“너희는 왜 맨날 붙어 다녀? 친구야?”

“아니. 우린 친구 아니야. 얘는 내 언니야.”

친구도 맞지만, 채연은 제인보다 1살 더 많았다. 1살 많은 것치고 채연은 제인보다 체구도 작고 소심했기에 항상 제인은 그녀를 지켜 내고 대변했다.

친구의 대답에 제인은 그때 제인은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

“그럼 자매겠네!”

“……자매?”

“너네 같이 언니 동생 하는 사이를 자매라고 하잖아! 너희는 부모님 찾기 쉽겠다! 부모님이 같을 테니까!”

자매. 생소한 단어의 정의에 제인은 누군가 던진 눈두덩에 머리를 맞은 듯했다.

원장님은 아니랬는데? 원장님은 우리가 친구랬는데? 원장님도 모르는 게 있었구나. 가서 자랑해야지!

“언니, 잠깐만 여기 있어.”

“나 두고 가면 어떡해.”

“아니야. 나 금방 올 거야.”

채연은 제인이 자신의 곁을 비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채연을 차분히 달랜 제인은 무작정 원장실로 뛰어갔다.

“원장님, 원장님!”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니?”

“언니랑 전 친구가 아니었어요! 자매였어요! 가족!”

제인은 그때 무척이나 기뻤다. 늘 제 옆에 있던 채연이가 사실은 나의 언니라니.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니.

“너, 그걸 어떻게…….”

하지만 만개한 제인의 웃음은 저물어 버렸다. 아이의 별것 아닌 말에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 큰 원장 정옥이 제인의 작은 어깨를 잡으며 당부한 것이다.

“그 사실은 너하고 언니만 알아야 해, 알았지?”

“왜요?”

“그래야 너희가 무사해. 너희는 무조건 친구인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다. 다 원장님 잘못이야……. 그때 그 사람들의 협박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아니, 거의 애원하다시피 흐느꼈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제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정옥의 눈물에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로부터 2주란 시간이 흘렀다. 보육원의 겨울은 더 혹독해져만 갔다. 계절이 주는 찬 바람과 부모가 없다는 모진 시련은 채연을 시름시름 앓게 했다. 이른 아침부터 열이 펄펄 오르는 채연의 상태에 놀란 제인에겐 원장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원장님! 언니가……!”

바로 그때가 힘껏 내달린 발걸음으로 결핍의 근원지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살짝 열린 원장실 문틈으로 근사한 남자와 여자가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심창진 씨와 최연정 씨가 여긴 왜…….”

심창진과 최연정.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정옥의 얼굴은 2주 전, 제인을 향했던 새파란 얼굴빛과 흡사했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숨을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클래식처럼 잔잔하고 우아한 연정의 언어가 나풀거렸다.

“두 아이 중 한 명을 다시 입양하려고 하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왜…….”

“그쪽도 알다시피 내 여자와 사국현. 둘의 염문이 아직도 떠들썩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이용해 소문을 덮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문제가 될 건 없죠. 내 아이는 아니더라도, 어차피 이 사람의 아이인 건 변함 없는 사실이니까.”

사람의 직감은 무섭다고 했던가.

“설마, 거절하진 않겠죠? 원장님은 이 보육원 아이들의 부모일 테니 뭐가 합당한 선택인지 잘 알 거라고 믿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제인은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다 원장님 잘못이야……. 그때 그 사람들의 협박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원장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아이들.

엄마 최연정과 아빠일지도 모를 심창진을 제인이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 * *

결국, 둘 중 하나라는 건 그들이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인은 덜컥 무서워졌다. 하나뿐인 채연을 잃을까 봐.

아니.

“언니, 제인 언니.”

“응?”

“내 이름이 뭐야?”

“채연이! 내 동생 채연이!”

“맞아. 난 채연이야. 언니는 제인이고. 혹시나 우리가 떨어져도 내 이름 잊으면 안 돼?”

평생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언니, 제인이. 또래보다 작고 맹해서 늘 당하기만 했던 우리 언니.

혹시나 날 잃어버릴까 이름을 꼭꼭 새기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나는, 채연이.

너는, 제인이.

그것이 우리의 진짜 이름이자 신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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