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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13화 (13/79)

13화

건국 일보 앞에는 억 소리 나는 검은 세단이 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제인 기자님?”

“누구시죠?”

“심 회장님 비서 이 실장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 타시면 됩니다.”

심창진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던 제인은 이 실장이 열어 준 뒷좌석에 올라탔다. 부지런히 달리는 차 안엔 짙은 고요가 존재했다.

그러나 심채연과 최연정, 그들의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제인의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얼마 후 한남동 주택 단지에 도착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부의 상징인 베벌리힐스를 연상케 하는 기품 있고 호화스러운 집들의 향연에 제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심창진이 부동산 투자에 혈안이라고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곧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알아서 내릴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제인은 가방 손잡이를 꾹 움켜쥐고 창밖을 응시했다. 그런데 공원처럼 드넓은 주차장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마침 회장님도 도착하셨나 보군요. 저분은 서도운 전무님 비서인데…….”

창진과 교진이 주차장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다는 건 서도운이 심창진의 집에 방문했다는 것이다.

“우선 내리십시오.”

먼저 내린 이 실장이 창진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하자 교진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제인은 입술을 꾹 한 번 물고 차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왔군, 손제인 기자.”

창진은 인사를 받지도, 하지도 않은 채 입꼬리를 거만하게 끌어 올렸다. 오히려 교진에게 보란 듯이 제인을 선보였다.

“우리 회사에 유능한 기자 한 명이 필요해서 불러 봤지.”

“아, 예. 그러십니까.”

“그럼 우린 이만 들어가 보지.”

저쪽으로 가라는 듯 뻗는 창진의 손짓에 제인은 걸음을 옮겼다. 슬쩍 교진을 바라보니 억지로 웃는 기색이 역력하다. 제인은 기자로서의 냄새를 맡았다.

심창진, 서도운이 나를 찾아온 걸 알고 일부러 나를 끌어들이는 거구나. 그럼 서도운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교진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오, 주여. 어떡해.”

최대한 태연한 척한 교진은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주차장을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분명 도운이가 먼저 영입 시도를 했는데, 심창진이 손제인을 불렀다는 건.

“회장님을 깎아내리려는 수작일 가능성이 다분하잖아.”

그렇게는 안 된다. 교진은 얼른 핸드폰을 들어 도운에게 다급한 SOS를 쳤다.

[야! 지금 심창진이랑 손제인 같이 올라가!]

* * *

“우리 심 회장님은 선구안이라도 있으신가.”

도운은 한남동 고급 주택 부지를 둘러보았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은 벌써 대지면적 452평에 매매 가격은 67억이라는 숫자를 달성했다.

건설 쪽에 몸을 담고 있는 국현과 도운이라고 해도 어떤 땅이 재계 거부들의 성지가 될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창진은 투자하는 땅 족족 전형적인 부촌의 성지로 만들어 냈다. 도운은 그게 언제 봐도 참 수상했다.

“우리 회장님을 이겨 먹으려고 여러 편법 쓰시네.”

그래봤자 못 오를 나무다. 금도 쪽에 없는 건설은 우리 에덴이 꽉 잡고 있으니.

잘 깎은 푸릇한 잔디를 짓밟은 도운은 현관 벨을 눌렀다. 열린 문틈 사이로 부드러운 숄을 두른 연정이 눈에 띈다. 그들에게 예의나 살가움은 없었다.

“서 전무도 알다시피 채연이는 결혼 기사 때문에 외출 금지를 당한 상태야. 남편 오기 전까진 가 줬으면 해.”

“저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입가에 기계적인 곡선을 만든 도운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운은 심창진과 심채연보다 최연정 저 여자가 더 싫었다.

심창진과 심채연은 의외로 속이 빤히 보이지만, 최연정은 아니다. 표백된 표정 뒤에 어떤 생각과 감정을 품었는지 해석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두 남자를 가지고 노는 재주가 있는 거겠지.

“오셨습니까.”

그 욕심은 유전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심채연은 지원우와 저를 두고 무슨 속셈인 걸까.

도운은 팬츠 주머니에 한 손을 끼워 넣고 고개를 기울였다. 채연의 방 앞을 지키는 충직한 개의 습성을 확인하자 이런 생각도 든다.

“힘들겠어요.”

나도 손제인의 개가 되어 볼까?

“그런데 오가는 내가 더 힘드니까 앞으로 번거로운 일은 지원우 씨가 도맡아 해요. 직접 달래 줄 수 있잖아.”

주인만 핥고, 주인만 따르면서 보상으로는 주인의 손길을 받는 충실한 개.

생각만 해도 감각이 이글거리는 게 꼭 해 보고 싶은 충성이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도운은 원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에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채연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왔어?”

채연은 도운이 닫지 않은 문을 눈짓했다.

“문 닫아. 할 이야기 있으니까.”

“싫어. 무슨 일 나면 어떡해.”

“밖에 원우도 있는데 일은 무슨 일.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당연하지. 너한텐 안 꼴려.”

저급한 발언에 채연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도운은 빳빳하게 굳은 뺨이 우스웠다. 그는 문가에 어깨를 기대고 말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외출 금지를 당한 몇 주 동안 채연은 오만 가지 상상을 펼쳐 냈다. 제인이 터뜨린 사국현의 기사로 결혼설은 완벽하게 묻혔다.

그건 결국 제인이 이 결혼을 막았다는 뜻이고, 서도운의 흥미는 더욱 제인에게로 향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나태해 보여도 사냥감을 향한 집념 하나는 대단한 서도운은 제인을 놓아주지 않을 테고, 그것을 고대했을 제인이는 결국 서도운에게로 가겠지. 그것만큼은 안 된다.

“호텔에서는 나 맞아. 그리고 지금 결혼설 때문에 나 외출 금지당한 거니까 네가 책임져.”

채연은 부러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거짓말에 넘어오게끔.

“환장하겠네.”

순간 웃음을 터뜨린 도운이 미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야.”

일순 가라앉은 눈이 채연에게 매섭게 꽂혔다.

“너 심창진 딸 맞나 보다.”

“뭐?”

“거짓말을 너무 못해. 수가 훤히 보여.”

저 핏속엔 최연정의 영악한 술수와 심창진의 성격만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 상체를 바로 세운 도운은 팔짱을 꼈다.

“그래. 하도 박박 우기니까 호텔에서는 너 맞다고 쳐줄게.”

“아니라고 우기는 건 너,”

“그런데 너.”

칼날처럼 예리한 말이 끼어들었다.

“결혼 기사는 왜 터뜨린 거냐?”

낮다 못해 스산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음성이었다. 채연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내내 초승달을 그렸던 입꼬리는 어느새 차갑게 내려앉았다.

영혼까지 꿰뚫을 것 같은 섬광 같은 시선에 채연은 주먹을 쥐었다.

“너 좋아하니까.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참…….”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오늘 여러 번 웃는다. 풀린 잇새 사이로 바람을 내뱉은 도운은 다시 입매를 무섭도록 다잡았다.

“야. 내가 만만해?”

모두가 서도운 하면 착각하는 게 있다. 태생이 진흙이라서 이 바닥 섭리를 모를 거라는 생각. 하지만 無에서 시작한 인생에겐 있는 자들의 有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결혼설이 터지자마자 심채연의 소행이라는 걸 알았지만, 당장 찾아와 물어뜯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다.

회장님을 대신해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우리 손제인 기자가 적절하게 기사를 막아 주기도 하셨고. 오늘 종일 기분이 저조하더라니 지금은 완벽하게 땅으로 처박힌 상태다.

“느긋하게 놀아 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어. 매스컴에선 우리가 연애하는 줄 아니까.”

“그럼 내가 기사 뿌릴게.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상대가 따로 있다고. 어차피 우린 뭣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겠지.”

나가려던 도운의 발을 멈춰 세운 건 채연의 마지막 발악이 아닌 핸드폰 진동이었다. 이 와중에도 손제인일까 기대를 하는 거 보면 정말 제대로 코가 꿰인 모양이었다.

[야! 지금 심창진이랑 손제인 같이 올라가!]

하지만 문자는 손제인을 담고 있을 뿐, 손제인에게서 온 것은 아니었다. 한쪽 눈썹을 곤두세운 도운은 채연을 돌아보았다.

“너 손제인도 불렀냐?”

저 입에서 가장 듣기 싫은 이름이 나오자 채연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무슨 소리야.”

“그런데 심창진이 왜 손제인을 데리고 와.”

“……뭐?”

아빠가?

채연의 반응을 꿰뚫은 도운은 바닥을 박차며 밖으로 나갔다. 채연도 쏜살같이 1층으로 내려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놀란 건지, 혼란스러운 건지 굳은 얼굴로 현관을 응시하고 있는 최연정이었다. 도운과 채연도 쏜살같이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야. 서 전무.”

창진은 뒤에 서 있는 제인의 등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알고 있지? 손제인 기자.”

쏟아지는 6개의 눈동자는 전부 제각각이었다. 혼란, 두려움, 거북함, 불길함. 그중에서도 서도운만 딱 제인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알다마다요. 탐나는 인재죠.”

네가 왜 여기 있냐는 짜증.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인과 잠깐 눈을 마주하더니 짤막한 인사를 마친 도운은 창진의 집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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