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늘 저녁에 손님이 올 거니까 알아 둬.”
일방적인 통보에 넥타이를 정리해 주던 연정의 손이 멈추었다.
“당신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두루뭉술하게 속살거리는 창진은 연정의 갈색 눈동자를 교묘하게 살폈다. 창진은 이따금 이런 식으로 연정을 시험했다. 네 머릿속에, 네 마음속에 아직도 사국현이 있냐고 묻는 것처럼.
그럴 때면 연정은 자신의 무기인 태연함을 고수했다.
“알고 있을게요. 오늘 정장이 무척 잘 어울려요.”
“그런가? 당신은 오늘 뭘 할 거지?”
“언제나 그렇듯 집에서 얌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죠.”
그러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창진을 녹인다. 감정적인 사람일수록 단순하다. 연정은 그런 창진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럼 난 출근하지.”
“다녀와요.”
창진이 문을 열자 때마침 별채에 있던 원우가 본채로 들어왔다. 창진은 원우에게 명령만 내리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채연이 못 나가게 잘 지켜.”
이 호화로운 한남동 주택은 그저 감옥일 뿐이다. 원우는 서도운과 결혼 스캔들이 뜬 이후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채연을 떠올리며 연정에게 향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연정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 따뜻한 체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서도운 전무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출 금지 때문에 나가시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사모님께서 아가씨를 조금만 보듬어 주시면 어떨까요? 아가씨께서는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엄마라면 딸을 위한 최소한의 것을 해 달라는 간접적인 힐난이었다. 연정은 소서에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도대체 뭐가 답답하다는 거지?”
그녀는 드넓은 집을 둘러보았다.
“편히 쉴 수 있는 값비싼 가구에 눈이 심심하지 않을 그림도 걸려 있고, 정 몸이 쑤시면 부지에 딸린 골프장이나 수영장에 가서 레저를 즐기면 되잖아.”
연정은 답답하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정이 결여된 듯한 그 말에 원우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 두 다리 겨우 뻗어야 잘 수 있는 판자촌에서 비가 오면 물이 샐세라, 바람이 불면 문짝이 날아갈세라,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자랐다고. 그런데 채연이는 아니야. 모든 게 다 있는 집에서 모든 걸 다 누릴 수 있는데 왜 불편하다고 하는 거지?”
“채연이는 회장님과 사모님의 사랑과 자유를 원하니까요.”
원우의 반론에 연정은 비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한때 지독하게 갈망했던 거지.”
그래서 남편을 떠나 사국현을 사랑했지만, 결국 돈과 또 다른 사랑인 심창진에게 돌아갔다. 내 핏줄을 다 버리고. 하지만 죄책감은 없다.
그녀는 그녀만을 위한 사랑과 자유와 부. 기본적인 욕구를 원했을 뿐이니.
“하지만 네 말대로 채연이는 다를 수 있지.”
연정은 대화 중에 처음으로 원우를 돌아보았다. 그를 응시하는 시선이 고요했다.
“네 말처럼 사랑이, 사람을 움직였으니.”
“……서도운 전무에게 연락 취하겠습니다.”
뼈 있는 한마디에 찔린 원우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 * *
오전 외근 후 도운은 곧바로 오후 회의에 참석했다. 며칠간 자숙을 하겠다던 국현의 상석 자리는 곧 도운의 차지가 되었다.
도운은 비스듬히 튼 의자에 기대듯 앉아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받쳤다.
“사업 구조별 매출 비중 브리핑 좀 해 봐요. 면세업과 호텔 위주로.”
“TR 부문 즉 면세업과 판매는 전무님의 예상대로 88%를 차지하며 호텔, 레저는 34%를 차지합니다. 전무님이 크게 확장하시고, 문스톤을 에덴 면세점에 입점함으로써 호텔 주가 또한 전폭 상승하였고 소식을 들은 중국 따이궁(보따리상)들이 한국으로 와 대거 사들임으로써 상승 매출 효과를 보입니다.”
“난 중국 시장 진출이라는 비책을 통해 에덴 호텔의 해외 사업을 확장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 나갈 예정입니다. 중국 하이난성 면세점과의 협력 관계는?”
도운의 경영 방식과 회의 진행은 거침없었다. 자신의 계획을 명확하게 말하되 그에 뒷받침되는 근거와 자료를 내오라는 듯 허공에 손짓한다.
그러다 팔꿈치로 잔을 쳐 커피가 그의 바지로 쏟아지고 말았다. 도운은 미간을 매섭게 구겼다.
“괜찮으십니까, 전무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죠.”
“아, 예. 이어 쭉 말씀드리자면 중국 하이난성 면세점과 전략적 협약을 맺기로 하였고…….”
발표를 하던 임원은 힐끔힐끔 도운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회의실 분위기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오늘 도운의 기분이 무척이나 저조하다는 걸 말이다.
기다리는 손제인한테 연락은 안 오지, 기분만 더럽게 옷은 젖었지. 분명 키스 마크도 옅어졌을 텐데. 도운은 입으로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손제인으로 가득 차 있다.
“제가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은 전부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군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매출 구조는 일주일 단위로 올리세요.”
“예.”
도운은 축축하게 젖은 정장을 느끼며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뭐야. 너 옷이 왜 그래?”
“커피 쏟았어.”
“잘한다. 나보고 연락 오는 거 지키고 있으라더니.”
“그래서, 연락은 왔어?”
“어, 왔다. 네 소원대로.”
그 말에 초코를 매만지던 손짓이 멈칫했다.
“누구. 손제인?”
“심채연, 이 미친놈아!”
원하는 이름이 나오지 않자 도운은 교진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예민함이 도사린 눈빛에 교진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야. 너 진짜 왜 그래. 보육원에서 처음 왔을 때도 누나 찾으면서 울고불고하더니 좀 지나서 심채연 미국에서 왔을 땐 걔 덕분인가 괜찮았잖아!”
도운과 교진은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국현의 비서 경식이 교진의 아버지여서 둘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구여도 교진이 모르는 것은 있었다.
“됐어. 너 나한테 친한 척하지 마.”
“이게 여자에 눈이 멀어서!”
“명분만 친구고 비서지, 넌 나에 대해 너무 몰라.”
“뭘 몰라. 너 처음 봤을 때 입은 옷도 내가 다 기억한다! 애들한테 맞아서 뼈 어디 어디 다친 지도 내가 다 알아!”
핑퐁처럼 이어지던 대화에 도운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머리도 다쳤지.”
“그래!”
“그래서 그래. 내가 그때는 머리가 홱 했어.”
여섯 살은 충분히 어리고 인지 능력도 부족한 상태다. 그야말로 어리숙한 미성숙체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후 생긴 안면 인식 장애는 이에 크게 일조했다. 그래서 너무 커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심채연이 누나가 아니라는 걸.
“네가 그렇게 삐딱선 타니까 심채연이 그런 기사를 터뜨린 거 아니냐.”
“말 한번 잘했다. 삐딱선은 내가 아니라 심채연이 타는 거야.”
집무실 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도운은 젖은 옷가지를 바닥에 던졌다.
“내가 심채연이랑 연애를 했어, 뭘 했어?”
답답한 듯 풀어 헤친 넥타이는 셔츠 깃을 타고 내려왔다. 교진도 안다. 도운은 그저 회장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적당한 관계로만 지내고 있는 것뿐인데 심채연이 돌발 행동을 한 것이다.
이미, 다른 남자가 있으면서.
교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난 진짜 모르겠어. 이 세계 결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나만 따라와. 핸드폰.”
“여기.”
교진은 도운이 회의하는 동안 가지고 있던 그의 핸드폰을 전달했다. 액정을 보는 도운의 눈빛엔 다정함이라곤 없었다.
[시간 나면 잠깐 우리 집으로 와.]
도운은 단 한 번도 채연의 문자에 답장한 적이 없다. 애초에 이렇게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아니다.
“다음 일정은 뭐 있어.”
“없어. 불행하게도.”
“그럼 매를 먼저 맞아야겠네.”
도운은 다시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심채연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바로 가자고.”
* * *
-손제인 기자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내일 시간 좀 내어 주지.
귓가에 여전히 심창진의 목소리가 맴도는 듯하다. 심창진은 정중한 음성으로 제안했지만, 힘 있는 기업인이 기자에게 그런 전화를 한다는 건 강요나 다름없었다.
서도운은 서도운대로 껄끄럽고, 예상치 못한 심창진이라는 복병까지 등장하자 제인은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서도운이랑 심채연 정말 결혼하는 거래요?”
여전히 떠들썩한 도운과 채연의 이야기 또한 여러모로 제인을 압박한다.
“결혼보다 연애하느냐가 더 먼저 아니에요? 걔네 결혼한다는 거 믿는 사람 이 바닥엔 없을 텐데.”
“두 집안이 워낙 원수 같으니까요. 근데 또 둘이 좋아하는데 에덴이랑 금도 두 집안 추문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소리도 있어요.”
“제인 씨는 뭐 아는 거 없어? 저번에 서도운이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맞아요. 정말 검은 손의 제안이라도 받았나, 유독 손을 뜯으시네.”
무의식적으로 뜯던 왼손이 그들 눈에 띈 모양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인은 대충 대꾸하며 얼음이 다 녹은 체리 에이드를 마셨다. 초조함이 커지니 입에 뭐라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짧아질 대로 짧아진 엄지를 다시 입 안에 넣으려고 하자 부드러운 힘이 제인을 제지한다.
“손 뜯지 말고, 우린 다른 기삿거리 물어뜯어야지. 원래 손제인처럼.”
보는 눈이 있어 태웅은 암호처럼 이야기했다. 서도운 생각은 그만하고 원래의 손제인으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그게 제인은 조금 불쾌했다.
“남아서 일할 생각이야? 미안한데 어쩌지? 이제 퇴근이네.”
곧 심창진을 만나야 한다. 선을 넘으려는 태웅은 적절하게 미뤄 두고 제인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태웅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그걸 내가 일일이 보고해야 해?”
냉담한 목소리가 태웅의 귓가를 울렸다. 무감하고 시린 시선에 그는 자꾸만 작아진다.
“미안해. 얼른 가 봐.”
그래서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혹시 이대로 서도운에게 가는 건 아닐지 무척이나 초조했다. 그러나 제인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갔다. 태웅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