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11화 (11/79)

11화

-9시 뉴스입니다. 해외 불법 비자금 조성과 횡령 혐의에 휩싸였던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이 오늘 오전 무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쥐새끼 같은 놈.”

악다문 잇새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에서 분노의 향이 났다. 창진은 집무실 뉴스에 뜬 국현을 시선으로 짓이겼다.

-우선 에덴을 믿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올리겠습니다. 갖은 억측으로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였지만,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기업인으로서의 올곧은 모습만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에덴의 명예를 실추시킨 기자에 관한 처분은 따로 이어질 예정입니까?

-아니요, 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저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니 저는 이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갈 예정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언사. 창진은 소파 헤드에 대충 걸쳐 놓은 손에 힘을 주었다. 창진의 옆에서 축배나 들까 했던 서울 병원 이사장 김정배는 웃음을 실실 흘렸다.

“사국현, 정계 관리 잘해 놨다더니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네. 듣자 하니 사국현이 조사받는 동안 서도운이 뒤에서 조사 관련 임원들 만나고, 회사 일 다 처리했다던데.”

“피가 안 섞였는데도 닮을 수 있나?”

“사국현이랑 서도운?”

“그래, 뒤에서 난잡하게 움직이는 꼴이 사국현이랑 아주 흡사해.”

휘유, 서슬 퍼런 창진의 기세에 정배는 흥미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안 그래도 감정적인 심창진이지만 유난히 격정적인 이유를 단숨에 눈치챈 것이다.

“제수씨랑 사국현 염문설 말하는 거지?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이 실장이 발 빠르게 처리 중이던데.”

“그런데 왜.”

쾅!

창진은 손에 쥔 글라스를 접대용 원목 테이블로 내리꽂았다.

“왜 자꾸만 사국현이랑 최연정의 염문설이 뜨는 건데, 왜!”

정배는 친구의 동요에도 비실비실 웃었다.

“그냥 기사 퍼뜨리는 애들을 조지라니까?”

“아니, 내가 움직이면 정말 둘 사이에 뭐가 있다는 소문만 더 돌겠지.”

“그러다 네가 돌 것 같네.”

스산하게 움직인 창진의 눈동자가 정배에게 와 닿는다.

“창진아, 네 실수는 제수씨가 떠났을 때 찾지 않은 거야. 그냥 사국현한테 제수씨를 넘겨준 거라고.”

정배는 적절하게 창진의 약점을 긁어내렸다. 심창진에게 최연정과 사국현은 역린 같은 것이다.

20년 전, 최연정과의 연애를 탐탁지 않아 했던 금도 집안은 그녀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다.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최연정은 신분 차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심창진은 그런 최연정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버렸답시고 상해 버린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사이 사국현이 최연정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심창진의 열등감은 거기서부터 발현되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단번에 가져 버린 사국현. 결국, 심창진은 사국현이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나 있는 동안 최연정을 가로채 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된 둘의 염문설에 심창진의 집착은 더욱더 심해졌다. 최연정을 새처럼 가둬 두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원정 출산이라며 여덟 살 된 심채연을 해외에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사국현을 질투하면서도 또 누구보다 의식해 지금 금도에는 없는 건설 쪽을 어떻게든 늘려 가려고 하지만, 그조차도 이상하게 어려웠다. 그러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수십 채의 집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배조차 모르는 깊은 속사정이 있다.

“그래, 내가 그때 연정이를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럼 사국현 같은 놈과 눈이 맞는 일은 없었을 텐데. 채연이가, 정말 내 아이였을 수도 있는데.

“서도운이 건국 일보를 찾아갔다던데.”

“손제인 기자랑 만났다는 말이 돌고는 있지.”

“그럼 나도 만나야겠군. 손제인 기자.”

적의 적은 내 아군이니까.

“이번에야말로 씹어 먹어 주겠어, 사국현.”

* * *

고요한 집무실에 국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당분간 자숙할 거다. 그때까지 교진이 너한테 도운이를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이미 건국 일보를 찾아갔다지?

두 손으로 전화를 받든 교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면목이 없습니다.”

-도운이가 손제인 기자에게 무슨 말을 했지?

유연하게 빠져나가려고 해도 틈을 주지 않는 질문에 교진은 눈을 치켜떴다. 정작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듣는 당사자는 성의 없이 허공에 손을 내젓는다.

대충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망할 놈.’

욕을 삼킨 교진은 칼칼한 목구멍을 억지로 열었다.

“저도 들어가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면담을 한 것 같습니다. 손제인 기자, 워낙 기업의 블랙리스트로 유명하니까요.”

-도운이 걔가 워낙 목줄 풀어놓은 강아지 같을 때가 있어. 아랫도리 간수 잘하라고 해.

우선 넘어가 준다는 갈무리에 교진은 참았던 숨을 쉬었다. 거센 악다구니를 위한 준비 자세였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교진은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이 새끼야! 이거 어떡할 거야!”

“오늘 욕 많이 먹네. 초코 잘했어. 전화하는 동안 조용히 하고.”

“컹!”

고고하게 다리를 꼰 도운은 혀를 축 내민 초코에게 간식 하나를 건넸다. 신나서 우적우적 먹는 초코의 쩝쩝 소리나 자신의 말이나 도운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교진은 더욱 열이 뻗쳤다.

“이 미친 새끼야! 너 진짜 손제인 기자랑 잔 거냐고.”

“잤어.”

“단단히 미친 새끼!”

폭포처럼 쏟아지는 욕에도 도운의 시선은 교진의 손에 들린 조사서에만 꽂혀 있었다. 도운은 매끈한 검지로 유독 걸리는 부분을 짚었다.

“그런데 손제인 뒷조사는 이것뿐이야?”

“이 맥락도 없는 새끼!”

“그래. 어떻게 맥락도 없이 부모도 없고, 그동안 살아온 거주지도 없을 수 있지?”

마치 외딴 별에서 똑 떨어진 것처럼.

“흥미롭네…….”

“허억.”

길게 늘이는 말꼬리는 시럽처럼 끈끈하다. 교진이 경악하며 숨을 삼켰다. 친구가 이상했다.

“더 알고 싶게.”

벌어진 교진의 턱을 친히 닫아 준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이제 퇴근해.”

“퇴근은 무슨. 야, 잠깐만.”

뒤따라오는 교진의 인기척이 들리자 도운은 날렵하게 집무실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어 들어갔다.

“따라오지 마. 나 지금 퇴근한 거 안 보여?”

도운은 교진이 서 있는 집무실과 자신이 서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긴 회사. 여긴 내 방.”

뻔뻔한 작태에 교진은 속이 뒤집혔다.

“야, 집 좀 구해서 제발 사람답게 살라니까 왜 갑자기 망나니가 되는 건데. 너 손제인 기자랑 뭐 있지. 또 무슨 일 있지.”

“솔직히 말해 줘?”

“어!”

“내가 빠졌어. 손제인한테.”

그것도 아주 흠뻑. 씩 웃은 도운은 검지로 교진의 이마를 툭 밀었다.

* * *

퇴근한 제인은 오랜만에 ‘꿈으로 보육원’에 방문했다. 제인이 터뜨린 국현의 기사를 보고 은선이 그녀를 부른 탓이었다.

제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아는 은선으로서는 제인을 탓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제인아.”

그저 안타까움과 죄책감뿐. 제인은 은선을 원망하지 않는다. 은선이 제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제인은 그녀의 마음을 안다.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원장님이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내 잘못은 아니더라도 우리 엄마 잘못이야. 이 보육원을 물려받은 이상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과오이기도 하고.”

“큰 원장님도 이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시다가 돌아가셨잖아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은선은 이 보육원의 원장이었던 정옥의 딸이었다. 은선은 그녀의 밑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고, 버려진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꼭 정옥과 같은 보육원 원장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육원에 심창진과 최연정이 찾아왔다. 그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란 걸 알아차린 은선은 그들과 정옥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그곳에서 은선은 심창진과 최연정이 몇 년 전 이 보육원에 방문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들이 버려둔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협박에 못 이겨 그들의 만행을 함구한 정옥의 과거도.

은선은 그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엄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인아…….”

은선은 신음처럼 제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목덜미에 난 서도운의 흔적은 정말 옅지도 강하지도 않아 여태껏 버텼지만,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서도운의 철저한 계획이었다. 그만큼 오래 못 기다린다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고. 재촉은 없지만 폭풍 전야의 느낌이다. 속도 딱 그만큼 시끄러웠다.

서도운은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정말 심채연과 결혼을 하는 걸까?

혼란의 틈을 비집고 진동이 울렸다. 얼른 받아 보라는 은선의 눈짓에 제인은 핸드폰을 들었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에 긴장이 되었다.

“여보세요?”

-손제인 기자, 나 금도 그룹 심창진이오.

묵직한 음성에 공기가 일순 멈춘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내일 시간 좀 내어 주지.

이어지는 다음 제안에 핸드폰을 쥔 제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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