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충분히 불량스러운 언사는 소란을 쓸고 가기 충분했다. 허공을 가르며 넘어온 시선에 제인의 몸이 굳어 버렸다. 누군가 믿기지 않는 듯 속삭였다.
“서도운……?”
“네, 제가 바로 서도운입니다.”
“여, 여긴 어떻게…….”
모두의 시선이 도운이 과녁처럼 겨냥한 제인에게 꽂혔다. 태웅은 본능적으로 제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운의 눈동자는 태웅에게 흘러 다시 제인에게 닿았다.
뛰어 봤자 벼룩이다. 그럴수록 더 감질나고.
“제인 누나.”
도운의 입꼬리엔 곡선이 그려졌다.
“나 왔어.”
“누, 누나?”
주변이 웅성거렸다.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 뵙게 되면 누나라고 해 주세요.’
딱딱하게 굳은 태웅의 시선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 * *
“계속 서 있을 건가?”
“…….”
“아,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지? 앉으시죠, 손제인 기자님.”
딱 손님이 왕인 짝이었다. 도운이 같이 들어와 엿들으려는 팀장을 내쫓고 멀찍이 서 있는 제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한다. 제인은 고고하게 꼰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찾아오신 용건이 사국현 회장님의 기사 때문이라면 제가 터뜨린 게 맞습니다.”
“하여튼 화끈하다니까.”
소파 헤드에 팔을 걸친 도운은 거친 가죽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그는 눈앞의 제인을 잠시 감상했다.
견고하게 만든 밀랍 인형처럼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굴. 희고 고운 손. 성격과 달리 허술한 벨크로 운동화까지. 저 부조화가 마음에 콕콕 박힌다.
“덕분에 내가 일주일 동안 머리가 터져 버리는 줄 알았어요.”
“탓하러 오신 건가요?”
“그럼. 내가 누나 때문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는데 누굴 탓해요.”
두 무릎을 손바닥으로 짚은 도운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낯익은 얼굴에서 위압감을 느낀 제인이 숨 가쁘게 말했다.
“그것 때문이라면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 기자의 역할을 했을 뿐이고, 진실은 사국현 회장님의 검찰 조사를 통해…….”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성큼 다가와 손을 옭아매는 힘에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한없이 직설적이다.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고.”
깍지를 낀 손이 부드럽게 내려와 제인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옥죄었다.
“손제인 네가 자꾸 떠올라서.”
지문을 두드리는 감각에 도운은 피식, 웃었다.
“맥박이 빠르네.”
“…….”
“솔직히 말해. 너 나 좋아하지.”
“헛소리하실 거면…….”
“헛소리?”
흥미로운 미소가 더 깊어졌다.
“건국 일보 입사 후 4년간 수많은 기업의 비리를 터뜨렸으면서 정작 에덴은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던 손제인 기자가 내 결혼설이 뜨자마자 우리 회장님 기사를 터뜨렸어. 난 심창진의 지시를 받았나 확인할 겸 온 건데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 마디가 자기가 터뜨린 게 맞다네? 이건 어떻게 대답할래요.”
“착각이십니다.”
“뭘 모르나 본데, 내가 손 감촉에 아주 예민해. 그날 호텔에 있던 거 너 맞아.”
“심채연 씨겠죠, 제가 아니라.”
“섹스한 게? 아니면 그냥 평화로이 잠만 잔 게.”
느슨히 기울인 고개만큼 시선이 깊숙이 들어찬다. 제인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짓씹으며 잡힌 팔을 빼냈다.
“저를 떠보러 오셨나 봐요.”
“기억이 안 나니까.”
이 당당함이 지난 시간의 틈새를 말해 주는 것 같아 심사가 꼬여 버린다.
“스스로 기억해 내세요.”
“그럼 나랑 하든지.”
그런데 또 말은 직설적이라 잔뜩 치켜세운 눈을 탁, 풀려 버리게 만든다.
“아. 이건 내 말버릇. 같이 일해 보자는 거니까 오해하진 말고.”
“…….”
“아까 들어오자마자 들은 소리가 오너 리스크 터지면 기자를 역 영입한다던데.”
속살거리는 언어엔 회유가 가득하다.
“여기서 받는 연봉의 배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내 전담 기자로 오는 거예요. 어때요? 조건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손 건네주기. 그럼 내 기억에 보탬이 되지 않겠어요?”
그토록 바라 왔던 전개가 펼쳐졌지만, 제인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나를 기억 못 하면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하룻밤의 쾌감? 딱 들어맞은 속궁합?
“결혼하실 분을 두고 이러는 거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책임지라고. 안 그래도 하기 싫은 결혼 진짜 하게 생겼으니까.”
묘한 말씨에 제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기 싫은 결혼. 그러나 하게 생긴 결혼.
맥락을 파악할 새도 없이 거리가 좁혀졌다. 도운은 뒷걸음치려던 그녀의 이마와 목덜미를 물결처럼 쓸어내렸다.
“그런데 손제인 기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평생 함께하기로 한 남자 있다며.”
톡톡, 짧고 굵게 목덜미를 찔러 오자 제인의 피부엔 소름이 돋았다.
“여기에 버젓이 낙인 찍어 놓고.”
뭐가 됐든 도운은 알았다. 교진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해 온 조사를 통해, 손제인에게 남자가 없다는 사실까지도. 조금 거슬리는 놈이 저 밖에 있는 것 같긴 한데.
도운은 제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짙은 눈빛이 길게 이어지자 색도, 무게도 없는 공기가 무거운 밀도로 제인을 조여 왔다. 찰나의 순간, 제인은 저도 모르게 도운의 얼굴을 홀린 듯 응시하게 되었다.
먼저 낮은 목소리를 낸 건 도운이었다.
“이번엔 잘 기억해.”
“뭐 하는, 읏…….”
끝까지 모른 척한다면 실토할 때까지 아로새기는 수밖에. 도운은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옅어진 붉은 자국에 다시금 잇자국을 새겨 넣었다. 파르르 떨리는 목과 맥박에 맹목적인 열망이 눈을 뜬다.
그러니까, 살면서 이런 감각을 준 건 21년 전 누나와 손제인뿐이라는 것이다.
손제인, 누나.
츠읏…….
일부러 색정적인 소리를 내고 입술을 뗀 도운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봉긋한 가슴을 헐떡이며 빨갛게 익은 얼굴도 콱 깨물어 보고 싶다.
곁에 두고 싶다는 소유욕이 차오른다.
“이거 지워지기 전에, 좋은 답변 들고 나 찾아와요.”
“지금 무슨 짓을…….”
“그때까지 주인 기다리는 개 노릇 얌전히 하고 있을 테니까.”
검지로 톡, 제인의 뺨을 스친 도운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웬 무뢰배가 침범한다.
“제인이 너, 따라 나와.”
거세게 도운의 어깨를 치고 가는 태웅의 의미는 명백했다.
경계, 질투, 소유.
남자의 향기를 맡은 도운의 입꼬리가 짜증스럽게 비틀렸다.
태웅은 도운의 시선을 의식하며 제인을 비상구로 끌고 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제인이 너.”
도대체 서도운과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서도운이 왜 너를 찾아왔냐고.
도저히 걸러지지 않는 질투를 거리낌 없이 쏟아 내려고 했다. 그보다 더 선명한 욕망의 자국이 태웅의 시야를 휘감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선배, 나 서도운하고 잔 거 눈치챘지.”
겨우 억센 힘을 뿌리친 제인은 자신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자 태웅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 도대체 서도운하고 무슨 관계야.”
처음 저 자국을 봤을 때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억지로 합리화하려고 했다.
아닐 거야. 서도운과 그런 게 아닐 거야. 제인이는 그런 데 관심 갖는 애가 아니니까.
하지만 취임식 후 요 몇 주 사이 제인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서도운과 심채연의 기사를 들락날락하며 연예부에 신경이 쏠려 있었던 데다가, 오늘 서도운이 방문한 것도 둘의 의미심장한 사이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제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허물어져 있었다.
“기억하지? 예전에 나한테 왜 기자가 됐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한 말.”
‘제가 빼앗긴 것들을 다 찾아오려고요. 사람, 사랑, 인생 전부 다.’
상황을 예리하게 파악한 태웅이 말을 이었다.
“너 도대체 금도랑 에덴이랑 무슨 관계야.”
서도운과 심채연. 그리고 제인을 알아보는 것 같던 심창진과 최연정. 이들은 먹이 사슬처럼 얽혀 있다.
“서도운이 나보고 같이 일하자고 했어.”
“제인아, 제발.”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일그러진 태웅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그런 제안은 단칼에 거절했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굳이 자신에게 꺼낸 건 마음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태웅은 제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기자가 야망을 품으면 끝장이야. 너도 알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서도운이 널 찾아왔다고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오가고 있어.”
오너 리스크를 터트려 놓고 영입 제안에 넘어간 기자는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다. 돈에 눈이 먼 기자, 출세가 우선인 기자라고.
정신 차리라는 태웅의 외침이 그림자처럼 쫓아왔지만, 제인은 걸음을 옮겼다.
서도운이 떠난 사회부엔 한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야, 손제인. 너 서 전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정말 오너 리스크 뜨니까 너 데리러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제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그 짧은 사이 손에 밴 서도운의 향기가 코끝을 감돈다.
‘여기서 받는 연봉의 배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내 전담 기자로 오는 거예요. 어때요? 조건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손 건네주기. 그럼 내 기억에 보탬이 되지 않겠어요?’
‘이거 지워지기 전에, 좋은 답변 들고 나 찾아와요.’
서도운의 말이 자꾸 아른거린다. 서도운이 흔적을 남긴 목덜미가 욱신거린다.
네 본능은 아직 날 잊은 게 아닌데, 왜 날 못 알아보는 걸까. 왜.
가슴이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