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 같은 사이-9화 (9/79)

09화

‘미안해, 국현 씨. 아이는 지웠어. 1년 동안 이 아이들을 나 혼자 키운다고 생각하니까 숨이 막혔어. 가난에 허덕이는 것도 힘들고, 못 버티겠어.’

제 아이를 지우고, 심창진의 아이만 챙긴 최연정의 배신. 그 아이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 고작 금도의 안주인 자리라니.

그의 분노는 갓난아이 시절 봤던 창진의 아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극에 달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감히, ‘채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금 고개를 세운 국현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도운의 어깨를 턱짓했다.

“피임은 잘했겠지?”

도운은 땀이 맺힌 자신의 구릿빛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럼요.”

“모전여전이야. 심채연도 언제 널 배신할지 모르니까 조심해.”

“그런 여자를 며느리로 들여도 괜찮은 겁니까?”

“복수를 위해서라면 뭐든. 실리를 위한 결혼은 우리 사이에선 흔한 일이지.”

평소 같았다면 대충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국현의 복수마저 도운이 갚을 은혜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하기는커녕 숨만 느리게 삼켜진다. 20년 넘게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국현이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모를 리 없다.

“뭐야, 그 반응은.”

“곤란해서요.”

국현은 도운을 가늠하듯 실눈을 떴다.

“내 계획이 틀어지게 하지 마. 심창진과 최연정에게는 기필코 복수해야 하니까.”

제 아이를 죽인 복수. 결혼을 통해 금도의 단물을 쪽쪽 빼먹어 주리라.

“여자가 있다면 정리해. 벌써 너하고 심채연 기사 떴던데.”

“무슨 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엔 도운의 눈살이 구겨졌다.

“심채연과 너의 결혼 기사. 취임식 날 심채연이랑 VIP층에 있었다며. 심창진 꽤 열 받겠어.”

비소를 띠는 국현과 달리 도운은 욕지거리를 삼켜 냈다.

어쩐지 배교진이 똥 마려운 개처럼 있더라니.

도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벼락처럼 빠른 속도로 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왔다. 기다렸다는 듯 교진이 기사가 뜬 태블릿을 건넸다.

“네가 내 비서지 회장님 비서야?”

“입단속 하라는데 어떡하냐. 아버지마저 지키고 서 있다가 갑자기 나가시고.”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몸은 서늘한 공기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눈가에도 열이 확 올랐다.

“건국 일보 연예부?”

“손제인 그 여자, 건국 일보 사회부라며. 그 여자가 폭로한 거 아니야?”

도운이 영 돌아올 낌새를 보이지 않자 따라 나온 국현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잘했다. 이제야 내 소원대로 됐어. 이대로 결혼만 밀어붙이면 돼.”

“아니요, 저 심채연이랑 안 잤습니다.”

“뭐?”

쾌락에 절었던 기억을 다시 한번 곱씹어 봐도 심채연은 절대 아니다. 손제인이 아직도 머릿속을 신기루처럼 돌아다니는데. 하필 손제인이 속한 건국 일보에서 기사가 난다? 이건 머리를 쓴 게 아니라 자폭을 한 것이다.

“그럼 너 그날 누구랑…….”

“회장님!”

되물으려던 국현을 막은 건 경식이었다. 그는 도운의 의문에 완벽한 퍼즐 한 조각을 끼워 맞춰 주는 소식을 들고 왔다.

“뭐지?”

“건국 일보 사회부 손제인 기자가 회장님의 비리 혐의를 터뜨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님을 생각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호텔 방에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전 특종을 잡으러 쫓아간 건데 하필 서도운 전무님이 절 붙잡고 놔주지 않으셨고요.’

진심으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가를 막았다.

아니라더니.

‘그리고 다음에 만나 뵙게 되면 누나라고 해 주세요.’

“알아서 누나를 찾게 하네.”

국현과 경식은 이미 사우나에서 나간 지 오래였다. 교진은 실성한 듯 웃어 대는 제 친구를 정말 미친놈처럼 바라보았다.

“교진아.”

“안 돼. 무조건 안 돼.”

“손제인 좀 더 알아보자. 가족 관계, 그동안 쓴 기사는 물론, 아.”

제일 중요한 부분.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싹 다.”

어디 한번 지독하게 얽혀 보자고.

* * *

로비를 걸을 때마다 웅성거리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제대로 사고 치고도 당당한 자태가 신기하겠지. 또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라 진짜 서도운과 결혼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었다.

채연은 창진의 집무실이 있는 20층 버튼을 눌렀다. 옆에 있던 원우가 넌지시 물었다.

“괜찮겠어?”

“각오한 일이야.”

“여차하면 내가 대신 맞아 줄게.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의 충직함에 채연은 미소로 보답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이 실장이 채연에게 알렸다.

“……얼른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아빠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다는 걸.

채연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마자 포악한 힘이 채연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윽!”

“회장님!”

쿵!

원우가 만류했지만, 창진은 가차 없이 집무실 문에 채연을 밀어붙였다.

“세 시간이야.”

창진은 제 딸의 멱살을 잔인하게 압박했다. 채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도 원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가 터진 지는 세 시간 48분이 지났고, 너를 호출한 지는 한 시간 20분이 넘었지. 내가 지금껏 어떤 전화를 받았는지 알아?”

잇새로 짓씹는 말이 분노로 떨렸다. 채연은 숨이 막힌 나머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혔다.

어쩌면 서러운 것 같기도 했다. 딸을 아끼는 아빠라면 그날 그녀가 왜 서도운과 호텔 방에 있었는지.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물어보고, 걱정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구멍 난 가슴에 들어찬다. 딸의 고통에도 창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혼설이 사실이냐는 기자들의 전화만 수십 통.”

“사 회장의, 전화도 받았, 겠죠.”

“그래. 그걸 알면서!”

쿵!

“감히 몸을 가볍게 놀려?”

채연의 등이 문에 거세게 부딪혔다. 원우만 몸을 움찔했다. 창진의 어깨 너머에 있는 소파에 앉은 연정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그녀는 따뜻한 체리 차만 부드럽게 음미했다. 남편이 이를 갈면서까지 분노한 이유는 채연의 말처럼 사국현의 전화 때문이었다.

-어이, 심창진이. 장난이 심했어. 같은 언론사 기자를 시켜서 감히 내 횡령 혐의를 퍼뜨려?

결혼설에 온 신경이 곤두서 이런 금싸라기 같은 기사가 뜬지도 몰랐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숨을 씨근덕거리는 창진에게 이 실장이 태블릿을 건넸다.

건국 일보 사회부 기자 손제인. 그 익숙한 이름에 연정은 심장이 철렁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사람 시켜서 내 딸과 네 그 피도 안 섞인 아들 결혼설을 터뜨린 건 너 아닌가? 감히 내 딸과 하룻밤이라니.’

창진은 신랄하게 비아냥거렸다.

‘유기견 키울 때 성교육은 안 시키나? 아랫도리 간수 잘하라고.’

최연정도 모자라 자꾸 제 딸에게 접촉하려고 드는 사국현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다. 그 어떤 진실도 알지 못하게. 아내와 딸에 대한 집착은 곧 사국현에 대한 열등감으로 응축된다.

-간수라…… 넌 네 모녀 간수나 철저히 해야겠군.

‘뭐야?’

-덕분에 검찰에 출석하게 됐어.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이를테면 이렇게. 심창진이 폭발하는 화산이라면 사국현은 심해의 차가움이었다. 결이 다른 칼과 칼의 싸움에서 창진은 늘 지는 기분이었다.

“너는 손제인이 터뜨린 기사만 아니었으면 오늘로 죽는 날이었어.”

“기…….”

기사? 무슨 기사?

창진이 거칠게 멀어졌다. 오래도록 조인 목이 홧홧해 채연은 곧바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연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손제인 기자가 사국현의 횡령 혐의를 터뜨렸더구나. 덕분에 결혼설도 묻히게 됐지.”

전혀 몰랐던 소식에 채연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우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사국현 이름 입에 담지도 마. 그리고 심채연, 넌 당분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서슬 퍼런 협박을 끝으로 창진은 집무실을 나갔다.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채연에게 연정이 다가와 무릎을 숙였다.

“그러니 장난은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채연아.”

새빨간 입술 새로 향긋한 체리 향이 번져 왔다. 유독 힘주어 말한 그 이름에 채연은 심장이 뜨끔해졌다.

* * *

<단독>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 “해외 비자금 조성 사실무근, 조사 성실히 임할 것”

일주일이 흘렀다. 그 낮과 밤 동안 서도운과 심채연의 결혼설은 완벽하게 묻혔다. 오히려 제인이 심창진의 지시로 사국현의 비자금 조성과 횡령 기사를 터트렸다는 루머에 힘입어 최연정이 엮인 그들의 치정 관계에 더욱 이목이 쏠렸다.

그게 못내 분한 연예부 팀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회부로 출석했다.

“우리 기사 밀어내고 화력 세지니까 좋으시겠어?”

사회부 팀장은 또 경기를 일으키며 맞받아쳤다.

“밀어내? 이 팀장. 단어 선택 잘해. 애초에 우리 밀어내고 한 마디 상의 없이 기사 터뜨린 게 누군데! 기업인이 연예인이야? 누가 봐도 우리 소관인 기사를 왜 연예부에서 터뜨리냐고!”

“이름 팔렸겠다, 얼굴 알려지면 다 같은 공인 아니야? 정재계 연놈들 다 텔레비전에 나오는데 그게 딴따라가 아니고 뭐야! 그리고 상의는 무슨 상의! 우리 쪽 기자한테 제보 들어왔으니까 우리가 터뜨리지!”

가시 돋친 말이 다음 표적을 맹렬히 공격해 온다.

“우리 손 기자는 아주 역할 톡톡히 하셨어. 우리 연예부 뒤통수나 치시고.”

제인은 무의미한 말꼬리에 잡혀 주지 않았다.

“사회부랑 연예부가 언제 협업이었던 적이 있나요? 아마추어같이 이러지 마시죠.”

“뭐야! 아마추어?! 이거 이젠 팀장한테 기어오르네. 야, 김 팀장. 너 팀원 관리 제대로 안 해?”

“가만히 있던 우리 애 트집 잡은 게 누군데!”

“우리 애란다, 또. 정신 차려, 김 팀장. 저런 애들이 뒤에서는 구린 짓 한다? 너 기업 오너 리스크 터지면 스카우트 제의 들어오는 거 알지? 적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울컥한 태웅이 일어나 반문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이 팀장님!”

“사회부는 위아래가 없네. 하태웅 넌 뭔데!”

얽히고설키는 싸움에 얹는 말 한마디는 더 큰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법. 제인은 안 그래도 이는 두통이 심해져 관자놀이를 눌렀다. 일주일 동안 편히 자지 못했다.

사국현의 기사를 터뜨린 후, 증거를 공유하자는 타 언론사 기자들의 전화가 쏟아진 데다가 과연 결혼설이 묻힐지 안 묻힐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탓이다.

이 유치한 싸움을 들어 줄 몸 상태가 아니었다. 무시하자.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순간, 그보다 더 압도적인 음성이 사회부 안을 휘감았다.

“지금 내 머리통만큼 난리 나는 게 없는데 여긴 더 난리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