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인수 합병 자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고개를 박고 기사를 확인할 때 제인은 심창진과 최연정의 반응을 살폈다.
“서도운과 우리 채연이가 결혼을 한다니, 어디서 흘러나온 개소리야?”
기업인의 인자한 미소를 짓던 창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세간에 결혼설이 돌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창진은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국현과 엮인다는 생각만 해도 역겨워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이 실장은 당장 심채연 호출해.”
연정이 차분히 입조심을 시켰지만 창진은 이를 악다물고 지시했다. 음성이 무척 작아서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둘 다 황급하게 자리를 뜨는 것으로 보아 그들 또한 이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확실해 보였다.
“에덴 호텔 전무 서도운과 금도 그룹 외동딸 심채연의 결혼 임박이 코앞이다. 두 사람은 서도운 전무의 취임식 당일, 에덴 호텔 VIP층에 올라가 하룻밤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며…….”
사태 파악을 위해 기사를 읽던 태웅은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그날, 서도운을 따라간 건 제인인데……?
“제인이 너…….”
그날 무슨 짓을 한 거야.
고개를 돌린 태웅은 이번에도 제인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제인의 얼굴 위로 태웅이 불과 몇 분 전에 가졌던 초조함과 질투가 떠올라 있었다.
제인은 이로 입술을 아프게 긁어내리며 말했다.
“우선 복귀하자.”
* * *
제인은 가장 먼저 연예부를 찾았다. 그녀가 등장하자 연예부 팀장은 화들짝 놀라 설명했다.
“야야, 손 기자. 팀장한테 깨졌다고 그렇게 무섭게 달려오면 안 되지. 우리도 익명의 제보 받은 거야.”
“성별은요?”
“남자. 사진 하나 없는데 말은 또 구체적이길래 의심했더니 거짓말이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잖아. 이름이…….”
“혹시, 지원우인가요?”
“어어, 맞아!”
심채연의 소행이 분명하지만, 금도 그룹의 후계인 그녀가 직접 나섰을 리는 없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 남자밖에 없겠지. 제인의 귀에 또 한 번의 작살이 꽂혔다.
“이 남자가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대기업 딸내미 사생활을 왜 뿌리느냐고 했더니, 더는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누가 누구를. 저에게서 서도운을?
단단히 비틀린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심채연은 지금 그녀에게 협박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제게서 전부 다 가져가 놓고, 서도운 하나 빼앗길까 봐 발악하는 것이다. 우스웠다. 아니, 그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인은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사회부로 돌아갔다. 얼굴이 새빨개져 소리치는 팀장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건 우리 사회부 건 아니냐고! 야, 손제인 너!”
제인은 팀장의 책상 앞에 섰다. 이미 팀장의 폭언을 듣고 있던 태웅은 제인의 등장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날 이거 하나 안 잡고 뭐 했어. 하태웅 넌 옆에서 뭐 했고!”
“죄송합니다.”
“너 그래서 내가 왼손잡이 고치랬지! 오른손보다 굼떠서 찍을 수 있는 것도 못 찍는다고!”
심사가 뒤틀린 팀장이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제인을 힐난하자 태웅이 나섰다.
“팀장님,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제인이한테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날 서도운 취임식 누가 간다고 했어. 손제인 네가 간다고 했어!”
“알고 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뉴스라는 것을 봤다. 그때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여섯 살 꼬맹이가 중학생이 되어 유학길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단한 집의 후원을 받는 게 뿌듯하면서도 못내 아쉬웠다.
가장 가까이에서 널 볼 수 있었는데. 넌 이제 아주 멀리 가는구나.
그래서 그나마 그 애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이 직업을 택했다.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취임식 소식을 들었을 땐 이유 없이 욕심이 생겼다.
서도운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제가 저번에 터뜨릴 기사 하나 있다고 했죠. 그거 지금 터뜨려요.”
그러니까, 이왕 그날 밤 사고 친 거 제대로 쳐 보려고 한다. 손등에 선 뼈마디처럼 욕심은 계속해서 치솟는다.
“뭐? 무슨 기사인데.”
“에덴 건설 사국현 회장의 해외 비자금 조성과 횡령 혐의요.”
“그걸 지금 터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연예부랑 싸움 날 일 있어?”
“먼저 싸움을 건 건 연예부입니다. 그리고 이게 온전히 연예부의 일일까요? 에덴이든 금도든 결혼 기사를 낸 것이 우리 사회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보복성 행동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 둘 중 하나를 터뜨려 버리자고요.”
팀장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태웅은 또 한 번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들었다.
“제인이 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맞아. 만약 둘이 진짜 결혼 준비를 하는 거면 우리가 대단한 집안 혼삿길에 훼방 놓는 거야. 결혼이 터지기 전에 우리가 터질 수 있다고.”
그러나 제인이 뒤이어 지은 희미한 조소가 태웅의 심장을 선뜩하게 한다.
“결혼은 준비된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사국현과 심창진은 최연정을 사이에 두고 사이가 좋지 못할뿐더러 서도운과 심채연은 연인 사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이 결혼을 막으려는 모습. 적어도 태웅에게는 제인의 행동이 그렇게 느껴졌다.
태웅의 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이 결혼이 진짜이든 가짜든 당분간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사국현에게 모종의 계획이 있었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결심을 내린 제인의 눈빛에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쓰고 바로 줘. 승인받고 올리게.”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간 제인은 얼른 창을 띄워 사국현의 비리 혐의를 적어 내려갔다. 논란은 확실히 있되 딱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 * *
에덴 호텔 지하에 고객들을 위한 사우나가 있다면 지상 100층엔 오직 국현만 이용할 수 있는 스파가 있다. 국현의 부름에 함께 사우나를 즐기고 있던 도운은 뿌연 수증기가 서린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더운 거냐.”
“아니요, 교진이가 자꾸 뭐 마려운 애처럼 안절부절못하길래.”
“그래?”
심상하게 대꾸한 국현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일은 좀 어때. 경영 수업이랑 실무는 또 다를 텐데.”
“호텔 면세점을 더 크게 확장해 보려고 합니다. 문스톤 최초 입점이라는 영광을 놓칠 수야 없죠. 제가 투입된 시점부터 2분기 주가가 찍힐 텐데 그걸 고려하여 숙박업체와도 제휴를 맺을까 합니다.”
“이유는?”
“요즘같이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시대에 에덴이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접근성이 쉬운 숙박업체를 이용해 투숙객의 이용을 더 높일 생각입니다. 회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버지라 부르래도.”
타박하는 국현의 말투엔 은근한 애정이 가미되어 있다. 여섯 살의 후줄근하던 아이는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는 조각상같이 견고한 자태를 뽐냈고 근육의 선마저 굵고 짙었다.
제가 낳진 않았지만, 국현은 도운의 성장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호칭이 중요한가요. 회장님과 저의 유대 관계만 무너지지 않으면 됐지.”
국현은 편백 나무 건식 스파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목덜미에서 그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도운이 네 덕분에 에덴을 더 키워 나가고 이런 여유도 즐기고. 시간 나면 보육원 봉사도 더 꾸준히 나갈 생각이야.”
“‘꿈으로 보육원’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너를 데리고 온 보육원.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더군.”
국현은 80도나 되는 뜨거운 열기를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곧 다시 눈을 뜬 뒤 보이는 국현의 눈빛에는 이채가 돌았다. 심창진과 최연정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 하나. 국현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무려 최연정과 맺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심창진과 연애를 했던 최연정은 금도 가문의 극심한 반대로 어느 날 문득 종적을 감췄다. 배신감에 분노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심창진과는 달리, 국현은 그녀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을 때, 그녀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 최연정은 심창진의 아이를 홀로 낳아 키우고 있었다.
국현은 그 아이마저 책임지려고 했다. 당시 그 아이는 생후 2개월밖에 안 된 갓난아이였고, 심창진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연정을 챙겨 주던 그는 결국 그녀와 몸을 맞붙이고 말았다.
국현은 자신의 아이를 밴 연정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은 심창진처럼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집안의 허락도 받았다. 단, 오랜 경영 수업이 끝나야만 연정과 결합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든든한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는 연정과 먼 해외로 갈 수 없었다. 끝내 1년 뒤 다시 돌아왔을 땐 아이와 연정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전부 주리라 다짐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과는 참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