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도운은 성가신 듯 구겨진 눈썹을 문질렀다.
심채연 들어오면 초코한테 확 물어 버리라고 할까. 어찌해야 좋을지 생각하던 찰나였다.
생각보다 문은 빨리 열렸다. 기습적인 소음에 초코는 벌떡 일어났다.
“컹! 컹컹컹!”
주인에게만 온순한 초코는 채연의 등장만으로도 그녀를 물어뜯을 듯 짖었다. 도운의 명령 없이는 달려들지도 물어뜯지도 않을 초코지만, 그는 또 구태여 초코를 진정시키지는 않았다.
채연에게 해를 가할까 앞을 막는 원우는 또 다른 충직한 개였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멈춰 선 채연은 초코를 턱짓했다.
“개 좀 진정시키고 얘기 좀 해.”
“개가 아니라 초코. 나 바빠.”
“너 나 책임질 거지?”
문밖에서 몰래 엿듣던 교진은 기겁했다. 오 마이, 갓.
“그런 이야기는 들어가서 조용히 은밀하게 해 주십시오.”
지극히 막장 대화에 교진은 다급한 손짓으로 원우를 끌어냈다. 집무실엔 도운과 채연, 단둘만 남게 됐다.
“컹! 컹컹!”
도운은 여전히 짖는 초코를 안아 들어 집무실 왼편에 있는 제 방에 넣었다.
“초코 쉿.”
그치.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책임지라니. 나도 저게 개소리라는 거 알아.
주인의 명령에 초코는 금방 조용해졌다. 채연은 문이 열리자 보이는 도운의 방을 보며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제대로 된 집에서 좀 살아.”
“심 회장 이번엔 한남동에 뿌리내렸다고 기사 대차게 쏟아지던데. 왜, 이곳이 누추해 보이나 봐? 여기가 내 집이고 내 방인데 네가 뭔 상관이야.”
“네 누나니까 해 주는 말이야.”
당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 도운은 우스웠다.
“알지도 못하면서 뻗대긴.”
“너도 모르는 것 같아서 찾아온 거야. 그날 너랑 잔 거 나 맞아.”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채연은 또박또박 진실과 거짓을 주물렀다.
“어차피 너나 나나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도구잖아. 금도와 에덴만큼 잘 맞는 기업은 없어. 결국 우리는 결혼하게 될 거야. 너한테는 좋은 일이지. 서도운 네 평생의 첫사랑은 나잖아.”
“첫사랑…….”
아련하기 짝이 없는 단어에 도운은 흉곽을 크게 부풀렸다 꺼뜨렸다. 짜증을 억지로 삼켜 내니 과거가 떠오른다.
표면상으로 심채연은 서도운의 첫사랑이다.
보육원에 있었을 적, 도운은 채연을 무척 좋아했다. 자신이 고열에 시달렸을 때, 토닥토닥 달래 주고 안아 주던 손이 자신을 버린 편모의 보드라운 손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누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누나가 이루고자 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사국현은 아직까지도 도운과 채연이 한 보육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심채연이 어릴 적 보육원에서 자신을 봤다는 걸 비밀로 하라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운이 이 어쭙잖은 비밀을 지켜 주는 이유는 단순했다.
귀찮아서.
말해 봐야 사국현이 옛 여자를 뺏어 오기 위해 저지른 농탕질이라고 소문날 게 뻔하다.
이토록 깊이 새겨진 과거이니만큼 그 손의 감촉은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누나의 손과 흡사했던 손제인. 목에 키스 마크를 달고 있던 손제인. 심채연과 내 사이를 단단히 오해한 듯한 손제인.
머리는 온통 그 여자로 소용돌이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나?”
“당연하지. 사 회장님은 너를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거고, 아빠도 사 회장님 의식하면서 엄마를 보여 주곤 하니까.”
“더러우면 피하면 되지 꼭 그렇게들 못 붙어먹어서 안달이더라.”
“악연일수록 질긴 인연인 법이야. 그건 왜 물어?”
“어제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너랑 나랑 연인이라고.”
냉정을 유지하던 채연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웃기잖아. 내가 너한테 고백을 한 적이 있나? 스치듯이 손을 잡은 적이라도 있어?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나체로 뒹굴기라도 했냐고.”
“그럼 우리가 호텔 방에서 한 건 뭔데.”
“너 혼자 발발거리는 거지.”
올라간 한쪽 입꼬리엔 비아냥이 가득했다.
“심심하면 일을 하세요. 심창진 울타리가 그리 아늑해 보이진 않던데,”
고귀한 세계에선 여자도 예외 없이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걸 유일하게 하지 않는 모녀가 바로 최연정과 심채연이다.
심창진이 새장 안에 가둬 두고 있는데 뭘 할 수가 없겠지.
“나가. 많이 놀아 줬다.”
“그래. 즐거웠어.”
단호한 축객령에 채연은 별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서도운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란 건 진즉에 예상했다. 고작 한 번의 만남으로 제인이한테 저렇게 감겨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손제인, 너를 버리고 얻은 게 나에게는 너무도 많았다. 무정한 부모님이지만 하나뿐인 핏줄과 보육원이 아닌 커다란 집, 재산, 그리고 그녀의 충직한 원우.
빼앗길 수 없으니 빼앗아야 했다. 또 나를 버리고 서도운을 택한 너에게 벌을 주고 싶다.
채연은 이럴 것을 대비하여 은밀한 작업을 해 놓았다. 그녀의 수족인 원우는 채연의 명령을 착실히 이행하여 건국 일보 연예부에 특종 연락을 취했다.
서도운이 고분고분했더라면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끝까지 믿지 않는다면 믿을 수밖에 없게끔 만들면 된다. 그 밤, 호텔 방엔 자신과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바로 터뜨리라고 해.”
채연은 뒤따라온 원우에게 고개를 틀었다. 고개를 끄덕인 원우는 핸드폰을 들어 건국 일보 연예부에 전화를 걸었다.
* * *
금도 그룹 로비에서 카메라를 세팅하던 태웅은 제인을 살폈다. 서도운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제인을 좋아하니까. 남자라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목 뒤쪽 붉은 자국은 알 수 없는 위기감을 안겨 준다.
제인이는 정말 서도운을 허락한 걸까? 차오르는 조악한 질투를 제인의 목소리가 밀어낸다.
“할 말 있으면 해.”
“어?”
“자꾸 나 힐끔힐끔 보잖아. 내가 팀장님 때문에 기라도 죽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렇지. 팀장님이 워낙 너한테만 뭐라고 하시잖아.”
서도운 특종을 받았다던 연예부는 계속 잠잠했다. 그게 제인은 물론 팀장의 신경까지 건드려 팀장은 지금 무척이나 예민한 상태였다.
특종을 잡지 못했으니 밖에서 고생 좀 하고 야근하라는 심보로 제인과 태웅을 금도 그룹 인수 합병 현장에 보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차피 제인이 알게 모르게 금도 그룹에 모습을 드러낸 전적은 많다.
과연 당사자들이 알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카메라 들어. 나왔다.”
오후 6시부터 약 10분가량 짤막한 포토 타임과 인터뷰 시간이 있다. 심창진은 오늘도 최연정의 손을 잡은 채 트렌디 컨셉 대표와 등장했다.
원활한 조율이 된 모양인지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특히 심창진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최연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연정도 살갑게 붙으며 카메라를 향해 고즈넉한 미소를 그려 넣는다. 그녀의 시선이 카메라 하나하나를 눈에 담는다.
제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연정의 움직임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처럼 무감각한 연정의 눈빛이 제인에게 조용히 와 닿았다. 현실로의 발돋움은 빨랐다.
제인은 자신이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볼 뿐, 사진을 찍지 않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이번 인수 합병 건에 관하여 기자님들의 짧은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기자님들은 조용히 손을 들어 주십시오.”
현장 진행은 계속됐지만, 마주친 시선은 짙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연정이었다. 그녀는 제인을 보며 입꼬리를 사륵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제인의 눈 밑이 잘게 경련했다. 분명…… 누가 봐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다.
연정의 은밀한 반응을 눈치챈 건 제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손제인 기자님?”
창진은 연정이 바라보고 있는 제인에게 손짓했다. 질문할 기회를 준다는 제스처였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제인은 굳어진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제 이름을, 아시네요.”
창진에게 하되, 실상은 최연정에게 하는 말이었다. 창진은 맥락 없는 질문에 하하, 웃었다.
“기업인이라면 온당 기자의 얼굴은 익히고 지내야죠.”
그러다가 그는 가늠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상당히 낯이 익는데.”
이번엔 최연정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건 제인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변화이기도 했다.
이 상황에선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그녀를 가장 기억해야 할 서도운은 손제인을 잊었는데. 아이를 낳고 버린 친모는 그녀를 알아보는 눈치다.
“제인아. 왜…… 뭐야?”
지금 이 소란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원들이 금도 그룹 안에서 뛰어나오더니 창진의 귀에 무어라 속삭인다.
동시에 기자들의 핸드폰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기자가 그 영광의 축배를 들었다.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와 금도 그룹 심채연의 결혼? 이것이 사실입니까!”
“뭐……?”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제인은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기사를 확인했다.
기사를 쓴 언론사는 건국 일보 연예부.
“이게 연예부에서 잡은 특종이라고?”
황당하다는 태웅의 말투처럼 연예부는 참 대단한 능력자였다. 사진 한 장 없이 서도운과 심채연의 하룻밤을 줄줄이 쓰고, 결혼이란 종지부를 찍었으니까.
문득 특종이 들어왔다던 연예부 팀장의 기고만장함이 떠올랐다. 동시에 아무도 없던 VIP층. 제인이 떠난 후, 호텔 방 앞에 홀로 남아 있던 심채연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