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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6화 (6/79)

06화

제인이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시선이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도운은 이 밤과 상반되는 하얗고 고운 손을 안달 난 눈빛으로 핥아 내렸다.

저 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손제인의 손이다. 어제 잠깐 만진 것만으로도 그 감촉은 도운의 피부 위로 문신처럼 새겨졌다.

아무리 취했다고 한들, 희고 말랑한 여체를 끊임없이 매만졌으니. 도운은 어젯밤 자신과 엉킨 게 제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순간에도 저 손만큼은 여전히 또렷했고, 자꾸만 묘한 흥분이 들어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물론 지금도 닿고 싶어 안달이 난다.

“……줘 봐.”

위험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침범한다. 긴장을 감추고 있던 제인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간드러진 움직임에 인내의 촛농이 툭, 흘러내렸다.

“손제인 기자. 손 좀 줘 봐.”

어차피 만지면 확인될 거.

도운은 탄탄한 허벅지를 수축시켜 보폭을 크게 넓혔다. 맹수가 먹잇감의 뒷덜미를 낚아채듯 팔을 무섭게 뻗었다.

저 손으로 날 만지고, 저 입으로 날 깨물었단 말이지.

상상만으로도 열기가 번진다. 모든 것이 흐린 가운데서도 유독 선명한 저 손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크게 부푼다.

“왜 술에 취하셔 놓고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제인이 뒤로 한 보 물러섰다. 허공에 팔을 멈춘 도운이 미간을 좁혔다.

제인의 말투에는 은근한 원망이 가미되었다. 본인이 가자고 손을 잡아끌고선 기억도 못 하다니.

“호텔 방에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전 특종을 잡으러 쫓아간 건데 하필 서도운 전무님이 절 붙잡고 놔주지 않으셨고요.”

“내가, 손제인 기자를 붙잡았다.”

“네. 누나를 찾으시더라고요.”

손제인에게 누나를 찾았다.

손제인, 누나.

“하도 강한 힘이어서 뿌리칠 수 없어 몇 시간 동안 잡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밖에서 심채연 씨를 만났고요.”

제인은 이로써 확실히 알았다.

서도운은 정말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제 손에 대한 집착만 여전할 뿐.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 괘씸해 제인은 고개를 숙여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목덜미를 드러냈다.

도운의 시야에 제인의 목덜미 위 붉은 자국이 꽉 내다 박혔다.

“손제인 기자님.”

“네.”

“남자 친구 있어?”

그게 이유 없이 도운의 심기를 조여 온다. 제인은 찍어 낸 대답으로 응수했다.

“네. 서도운 전무님과 심채연 씨처럼 오래전부터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습니다.”

“누구?”

“말해도 아실까요?”

넌 절대 모를 텐데.

“그리고 다음에 만나 뵙게 되면 누나라고 해 주세요.”

머뭇거리던 제인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해 보았다. 도운이 그녀를 기억 못 하는 건 정말 괘씸하지만, 그의 누나는 자신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싶어서.

조그마한 욕심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제인은 찬바람을 흩날리며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도운의 얼굴엔 불쾌함이 서렸다.

* * *

최근 부지 개발이 이어져 최고급 주택이 즐비한 한남동에 금도 그룹 심창진 가족이 들어왔다.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심창진은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인지 수억대의 투자를 했다. 그 후 용산 공원을 둘러싼 뉴타운 사업 진행과 함께 주택이 줄기차게 들어서서 돈에 돈을 불러들였다.

심창진이 귀신 같은 감으로 투자해 사들인 집만 족히 12채. 그는 유독 건설 쪽에 욕심이 많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해.

고용인들은 일체 대화도 없이 아침 식사를 하는 네 사람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놈의 집은 도대체가 돈 냄새, 음식 냄새는 나도 사람 냄새는 도무지 나지 않는다.

“서도운 취임식 땐 어디로 사라진 거지?”

더군다나 오랜만에 입을 여는 음성은 건조하기만 하다. 다 읽은 조간신문을 접어 던진 창진은 채연에게 시린 시선을 굴렸다.

채연은 까칠한 밥알을 치아로 꾹꾹 누르며 적절하게 둘러댔다.

“친구랑 에덴 호텔 바로 가서 한잔했어요.”

“그 친구가 서도운만 아니었으면 좋겠군. 원우야.”

“맞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저 말이 사실이냐는 부름에 원우는 식사를 끝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젯밤, 채연은 원우와 함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창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오늘 오후엔 트렌디 컨셉과 인수 합병이 있어. 혹시라도 지난 밤 서도운과 같이 있어 불미스러운 기사가 뜨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번에도 외출 금지인가요?”

“그래.”

“당신. 이왕 하는 인수 합병인데 세 식구 웃으면서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조용히 식사하던 연정이 입을 열었다. 고아한 음성은 평온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했다.

“애 잡지 말라는 말을 둘러 하는 것 같은데, 채연이는 안 가. 우리 둘만 가지.”

“그래요, 그럼.”

채연은 강압과 순종이 오가는 식탁에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심창진과 최연정은 저를 낳아 준 부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에게 투자만 해 줄 뿐 사랑과 관심을 주진 않았다.

아빠는 저와 엄마를 통제하기 급급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는 이유는 사국현 때문이었다.

서도운 취임식 기사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구어진 오늘, 최연정과 사국현이 악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진에도 한때 연인이었던 그들의 접촉에 하이에나들은 두 사람이 아직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세 치 혀를 놀려 댔다.

갈수록 커지는 아빠의 집착은 엄마를 새장 안에 가두어 버렸다. 저에게 하는 행동도 딸을 아끼는 아빠의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증(憎).

집안의 반대가 거세 두 사람은 그녀를 낳고도 잠시 보육원에 맡겼다던데.

8살,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길어 마음을 줄 수 없는 걸까. 비틀린 마음은 같은 감정을 낳는다.

말없이 일어난 채연은 원우를 이끌고 갑갑한 집을 벗어났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연정은 창진에게 시선을 깊이 밀어 넣었다.

“이러니까 채연이가 당신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도는 거예요.”

“연정아.”

“네.”

“입조심해.”

다정한 이름을 담은 얼굴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과거를 논하는 음성에 창진의 입술엔 조소가 얹어졌다.

“나를 택하고 아이들을 버린 주제에.”

“…….”

“채연이는 내 것이야. 물론 최연정 너도.”

짙은 소유욕이 드리워지자 연정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알아요, 나도.”

“준비해. 시간 없으니까.”

창진은 곧 거친 걸음을 옮겼다. 연정은 그가 주는 만족감에 흠뻑 취해 있다가 인터넷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사국현과 자신의 모습을 보니 야살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아줌마. 체리 차 좀 타 줘요.”

“네.”

오늘 체리 차의 맛은 아주 끝내줄 것 같다.

* * *

에덴 호텔 전무 서도운.

도운이 앉은 집무실 데스크 위에는 투명색 크리스털 명패가 언론과 대중들의 눈처럼 번뜩이고 있다.

‘사’도운이 아닌 ‘서’도운.

6살 때부터 사국현에게 먹고, 입고, 자고, 배우는 모든 걸 후원받았지만 정작 호적에는 못 올라간 길거리 유기견 신세.

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남도 아닌 게 언제 버려지나 호시탐탐 씹을 기회만 엿보던 하이에나들에게 도운의 취임은 정말 파격적인 행보였다.

갖은 추측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53세란 나이에 결혼도, 아이도 없는 사국현이 실은 서도운을 무척 아끼고 있다고.

그러나 매출 2800억에 영업 이익 45억을 찍은 에덴 호텔의 어마어마한 몸집은 결국 머리 검은 짐승에게 집어삼켜질 거라고.

멋대로 떠들어 대는 세 치 혀들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천성이 유유자적할 뿐이지 누구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도운은 여기까지 올라왔다. 호적에 ‘못’ 올라간 건 사실은 도운이 ‘안’ 올라가길 자처해서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다고 마음으로 낳은 부모 자식의 사이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또 국현이 직접적으로 논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소문처럼 도운은 그가 왜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심채연과 적절한 사이로 지낸 건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이젠 심채연과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제인. 머릿속을 모기처럼 돌아다니는 이 여자를 어떻게 잡아 두어야 할까.

기자라고 했으니 사회면으로 한번 세게 엮여 봐? 그도 아니면 에덴 호텔 전담 기자 자리도 참 좋을 것 같은데. 에덴 호텔엔 전문적인 보도 자료를 내 줄 전담 기자도 없으니까.

피식 웃은 도운은 구두코 옆에 앉아 있는 초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가지런히 정돈되는 초코의 털처럼 손제인의 생각도 잠시 수그러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책상에 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에덴 호텔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관리 업무는 이제 전부 그의 몫이었다.

나른한 눈빛 속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예리함이 존재했다. 애써 제인을 밀어내려는 고도의 집중력을 찢은 건 호출기에서 들린 교진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지금 심채연 올라오는 중. 네 말대로 찾아오면 막으려고 했으나 막는 순간 큰 소란은 물론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가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통보는 다시 일방적으로 끊겼다.

“뭐 이런 책임감 없는 비서가 다 있어.”

만에 하나 심채연이 회사로 찾아오면 1층 로비에서부터 막으라고 지시해 놨다. 역시나 심채연은 제 예상대로 움직였고 교진은 의리가 부족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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