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웅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소리를 듣고 깨어난 도운은 엎드려 있던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는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어.”
-어어? 어? 너 어라는 소리가 나와? 너 어디야!
교진의 역성을 들으며 도운은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호텔 방, 어쩐지 개운한 몸,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아, 낮게 탄식한 도운은 피식 웃었다.
“나 VIP층.”
-뭐? 거긴 왜……! 야, 너 설마?
짧은 사이에 뭔가를 눈치챘는지 교진의 음성엔 경악이 들어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성의하게 전화를 끊은 도운은 술과 순백의 몸 위에서 진창 구른 지난밤을 떠올렸다.
치사량을 넘긴 알코올은 목구멍을 범람해 시야에도 차올랐는지 자신이 발정 난 것처럼 달려들었던 상대를 장난치듯 흐려 놓았다.
몸을 빠듯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딱 한 번만 밑에 깔린 상대를 확인하고 싶어 몇 번이고 미간을 좁혔지만, 얼굴을 인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선명한 것은 분명 존재했다.
근육 여기저기를 쓸어내리고 피부를 매만지던 아찔한 손의 감촉.
도운이 이렇게 손에 집착하게 만든 계기인 편모는 도운을 6살까지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먹으면 도운을 때리기도 했지만, 가끔은 당근을 주듯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토닥여 주며 재워 주기도 했다.
어린 사내아이는 그것이 당연한 애정의 이치라고 생각하며 그런 엄마의 손길을 좋아했지만,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편모는 어느 날 어린 아들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도운은 그때 처음 눈치란 게 생겼다.
‘어, 엄마! 안돼! 나 두고 가지 마! 엄마!’
무서워 울고 목이 쉬도록 애원했다. 그게 자신을 낳아 준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비어 버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도운은 황량한 그 감촉을 너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손의 감촉이 예민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스쳐 간 부모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버려진 충격이 심했던 어린 사내아이의 눈물과 패악을 참을 수 없었던 또 다른 부모들은 도운의 손을 다정히 잡고 들어갔던 집 안에서 다시 그 손을 거세게 이끌고 나와 소리쳤다.
‘애가 못된 짓만 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냥 버릴 순 없으니 적절한 거짓말을 둘러대는 건 필수였다. 도운이 6살에 한 나쁜 짓이라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엄마한테 가고 싶다고 바닥에 뒹굴었던 것뿐이다.
전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던 가혹한 절차는 도운을 운명처럼 ‘꿈으로 보육원’에 입소하게 한다.
그런데 뭐?
[내일 일어나면 연락해.]
채연의 문자를 본 도운은 가느다란 웃음을 내뱉다 어이가 없어 전화를 걸었다.
-일어났어?
심채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도운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말했다.
“문자 뭔데?”
-알면서 뭘 물어. 너 나 책임져야 해.
“지금 나랑 너랑 잤다는 거야?”
-그러게,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먹어서 기억이 끊겨. 너 술 취해서 누나, 누나, 부르면서 나 안 놔줬어.
그리고 심채연의 말처럼 보육원에서 그의 누나인 그녀를 만났다.
어른들이 안겨 준 손은 아주 이기적이었는데, 아팠던 자신을 달래 주고 다독여 주던 손은 무척 따뜻했다.
“내가 너를 안 놔줬다고.”
-그래. 너한테 나 말고 누나가 또 누가 있어.
그 보육원에서 심채연을 만난 건 사실이다. 그녀는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신비로운 누나였고 그는 그런 누나를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아팠다. 사국현이 기적처럼 도운 앞에 나타난 운명의 시작이기도 했다.
“네 이름이 서도운이라고?”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사국현이라고 한다. 내가 널 데리고 가고 싶은데 도운이 생각은 어떠니?”
“제가 가면 아저씨는 저한테 뭘 해 줄 거예요? 집 주실 수 있어요?”
“뭐? 하하! 그럼. 아저씨는 집도 아주 많고, 돈도 아주 많아. 네가 그걸 갖는 대신, 넌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 주면 된단다.”
“그럼 저 갈래요! 우리 누나 집 주기로 했어요! 누나도 치료할 수 있겠다!”
어린 도운의 머릿속엔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누나가 아픈 건 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나는 누나에게 집을 준다고 약속했었다.
‘누나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뭐 받고 싶어?’
‘나는 집.’
‘집? 왜?’
‘우린 집이 없잖아.’
그럼 누나의 감기도 낫게 할 수 있고 우리는 평생 같이 살 수 있다.
그게 어린 도운이 생각한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집이 생겨도,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누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운이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게 됐을 때.
‘안녕, 도운아. 나 네 누나야.’
‘……누나?’
‘응. 네가 내 이름 알려 달라고 했잖아.’
누나가 기적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금도 그룹의 딸이 되어.
‘내 이름은 심채연이야. 그리고 너랑 나랑 보육원에서 만난 건 비밀로 해야 해.’
‘왜?’
‘안 그러면 우리는 또 헤어지게 될 거야.’
어딘가 비슷한데 다른 얼굴로. 전혀 다른 손의 감촉으로.
지금처럼 새까만 거짓말로 속살거린다.
한마디로 어젯밤 그 손의 감촉은 심채연이 아니다.
그 손의 감촉은 틀림없이.
“……손제인.”
손이 예뻤던, 손이 닿자 아찔한 감각이 흘렀던 그 기자가 분명하다.
* * *
채연의 허무맹랑한 통화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핸드폰을 침대 위로 대충 던진 도운은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또 재미있는 걸 보게 됐다. 어깨 위에 앙증맞게 자리 잡은 키스 마크.
잊을 수 없는 손의 감촉으로 제인을 떠올린 도운은 단전이 뻐근해져 하마터면 출근을 못 할뻔했다.
뜨거워진 몸을 겨우 진정시키고서야 호텔 방을 나섰다.
“야! 서 전무!”
복도 끝에서 경악에 찬 교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교진은 뛰다시피 걸어오며 도운의 팔목을 잡아챘다.
“야. 너 바른대로 말해. 어제 무슨 짓 했어.”
“알면 다쳐.”
“닥쳐! 내가 모르면 네가 다쳐! 아니다. 핸드폰 이리 내.”
끝내주는 라임을 자랑한 교진은 도운의 몸을 더듬어 핸드폰을 사수했다. 이내 통화 목록, 문자 메시지를 살펴보다 입을 하마처럼 벌렸다.
“너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설마 심채연이랑…….”
하, 하룻밤?
그렇게 묻듯, 벙끗거리는 입술이 사정없이 떨린다. 도운은 어처구니가 없어 미간을 긁었다.
“내가 의외로 낭만적인 사람이야. 마음에도 없는 여자랑은 안 자.”
“그렇지? 맞지?”
“어.”
“그럼 이건 뭐지?”
믿는데, 믿지 못하겠다. 교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도운을 따르며 그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도운은 채연의 문자를 힐끔 내려다보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을 눌렀다.
“그러게.”
나와 자지도 않은 심채연은 왜 나와 잤다고 바득바득 우길까. 의문이지만, 그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여자가 있다.
25층, 집무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도운은 손을 저으며 일축했다.
“걱정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아니지.”
“그렇지? 심채연이랑 잔 거 아니지?”
“심채연이 아닌 거지.”
이런 미친.
“넌 이 상황에서도 그따위 말버릇을 입에 담고 싶냐! 심채연이 아니면 누군데! 누구랑 잔 건데! 그런데 왜 심채연이랑 있던 건데!”
교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이나 다름없는 집무실로 돌아온 도운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대형 사고를 치고도 유유자적 초코를 쓰다듬어 주는 모습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도운은 집무실 안, 책상 왼쪽에 자리 잡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무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모던하고 심플한 방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옷장을 열어 셔츠를 꺼낸 도운에게 위기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여자야.”
“그러니까 누구!”
“예상 가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야, 너 그거 진짜…….”
단추를 푼 셔츠가 떨어지자 도운의 어깨 위 키스 마크가 두 남자에게 인사한다.
내가 누구게. 나를 찾아봐.
마치 은근한 장난처럼.
그렇다면 확인하는 수밖에.
호텔에서의 도운이 그 은근한 도발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가 교진에게 말했다.
“너 당장 보안실 가서 어제 VIP층 CCTV 영상 가져와.”
* * *
건국 일보 사회부. 일렬 행대로 붙은 데스크에 앉아 있는 제인은 키보드를 무자비하게 눌렀다.
검색 키워드는 두 가지. 서도운과 심채연.
다행히 그들의 소식은 서도운의 취임식과 그곳에 참석한 심채연의 기사뿐이었다.
어젯밤 채연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제인은 오늘 아침 내내 초조해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돌아선 후에도 심채연은 서도운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 방 앞에 서 있었다.
그게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어떤 기사가 날지 분명했고, 또 결혼설이 돌고 있는 두 사람인지라 제인은 불길처럼 치솟는 감정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생 눌러 왔던 욕심의 결과물은 추잡한 질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