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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사이-2화 (2/79)

02화

도운은 저도 모르게 제인의 손을 날렵하게 낚아챘다.

“쳤죠?”

“아니요. 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닦아 드리려고,”

“아까 나랑 눈 마주쳤잖아. 카메라 앵글 안으로.”

미세하게 커진 눈을 갈무리한 제인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게 보이시나 봐요.”

“성함이?”

“……건국 일보 손제인 기자입니다.”

“아아, 어쩐지.”

이름조차 마음에 든다.

취임사를 읊을 때 순간 모든 배경이 사라지고, 이 여자만 보였다. 특히 이 도자기 같은 손이 돋보였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럴 수가 없는데.

도운은 검지로 제인의 손등을 톡톡 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글쎄요.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을까요.”

모호한 답변 사이로 짙은 고요가 끼쳐 온다. 묘한 기류 속 짙은 시선이 깊숙이 감겨든다.

“야, 서도운!”

알맞게 숨 막히는 긴장감이 조각났다. 철렁이는 공기에 고개를 돌린 제인은 잘게 떨리던 손을 빼냈다.

도운은 가볍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럼 손이 예쁜 손제인 기자님. 우리 또 봐요.”

아쉬움을 달랜 도운은 손짓하는 이들에게 향했다. 아직 지척에 손제인이 보였다.

“야, 서도운 축하한다. 그런데 채연이는?”

“그러게. 둘이 결혼하네, 마네, 하더니. 어떻게 된 거냐?”

의도가 분명한 말과 이름.

도운은 제인이 잠시 멈칫하면서도, 이내 본분을 다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샅샅이 핥아 내렸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갈증이 들어 술을 들이켜야만 했다.

* * *

그렇게 한 잔, 두 잔. 손제인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더니 취해 버렸다.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손제인도 이젠 안 보인다. 멀쩡한 척을 하고 있다지만, 취한 모습을 보이면 또 어떤 말이 오갈지 모른다.

도운은 초코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초코, 아까는 잘 짖었어.”

도운에게는 미약한 안면 인식 장애가 있었다. 선천적인 것은 아니고, 흙바닥 출신이 사 회장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하다 머리를 다쳐 얻게 된 후천적인 병이다.

그 때문인지 편모 손에 버려져 원래도 손에 집착하던 도운은 사람이 주는 감촉에 민감해졌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더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있었다.

21년 전, 그를 달래 주고, 그가 좋아했던 누나의 손 감촉을 잊지 않기 위해. 그런데 참 이상하지. 오늘은 누나의 손 감촉과 매우 흡사한 여자를 만났다.

손제인이라던가. 조용히 그 이름을 굴려 본 도운은 초코에게 말했다.

“교진이 찾아서 내 방으로 가 있어. 취했다는 건 비밀이다.”

총명한 초코는 이내 바닥에 코를 대고 고고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식이 안전하게 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빠는 몸을 일으켰다.

그 아슬한 모습을 제인은 인파 틈에 숨어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사국현을 따라갈 때도 지금처럼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을까.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오랜만의 만남은 어릴 때 느꼈던 감정을 부채질했다. 서도운과 언니가 홀연히 사라졌을 때, 제인은 혹독한 겨울 감기를 앓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지도 모른 채 눈을 뜨고 암담한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는 서도운을 보고도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따라가자.

고민은 짧았다. 제인은 어깨에 멘 카메라 끈을 고쳐 잡고 도운의 뒤를 따랐다.

따라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대화가 하고 싶었다. 그녀는 정신 차리라는 이성의 외침을 꾹 눌렀다.

입장이 끝난 연회장 밖은 한산했다. 덕분에 그를 뒤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도운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딱 봐도 인사불성이라 제인은 인기척 없이 도운의 뒤에 자리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맨 꼭대기 VIP층이었다. 도운이 취했기에 망정이지 일반인이자 기자인 제인은 더더욱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빠르게 치솟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때였다.

“어떤 쥐새끼인가 했는데.”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간 도운이 갑자기 뒤를 돌아 제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몸이 그대로 끌려간 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들킨 건가. 심장이 쿵쿵 뛸 무렵 나른하게 풀린 도운의 눈매가 예쁘게 휘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손이네.”

누나 손 감촉이랑 똑 닮은 손. 우리 누나인가 보다.

씩 웃은 도운은 제인의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이리 와. 나랑 가자.”

도운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졸지에 제인은 도운이 이끄는 대로 침실로 오게 됐다. 머리로는 당장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온 건 잊었는지 재킷을 집어 던진 도운은 그대로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그가 잠들기를 기다린 제인은 한참 뒤에야 움직였다.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도운의 근처에 앉았다. 폭신한 침구가 엉덩이를 감싸 왔다.

제인은 머뭇거리다 살짝 벌어진 관능적인 입술을 엄지로 꾹 눌러 보았다. 일종의 심술 같은 행위였다.

“누나라고 했으면서.”

‘좋아! 난 누나 손 좋으니까! 누나도 좋아! 커서 나랑 살자. 내가 집 줄게.’

약속도 안 지키고. 날 기억도 못 하는 못된 입술.

“너무 옛날 일이라 다 잊은 거야?”

7살의 그녀는 항상 불안정했다. 부모가 없어 외로웠고, 하나뿐인 언니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런 격동의 감정을 잠시나마 없애 준 것이 바로 서도운이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보육원 아이들을 흠씬 패 주기도 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를 부르며 삶의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녀의 손이 좋다며 덥석 잡아 온 서도운은, 사실 위태로웠던 제인을 지탱해 준 셈이었다. 이토록 온전하게 의지할 만큼의 단단함이 6살, 그 어린 서도운에게도 있었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남자가 되어 버린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제인은 침대 위 잠든 성체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마음속 철썩이는 욕망의 파도가 그에게도 닿았던 걸까.

미동 없던 입술이 일순 제인의 엄지에 입을 맞추듯 움직였다.

“누나…….”

“!”

추억에 너무 심취했던 모양이다. 남자치고 긴 속눈썹은 어느 틈엔가 혼몽하게 열려 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심장은 발광했고 몸은 얼어붙어 버렸다.

“더 만져 줘…….”

“너…….”

“나 누나 손 좋아하잖아…….”

불분명한 발음으로 속삭인 도운은 제인의 손을 매만졌다. 살살 쓰다듬고, 긁고, 반듯한 손톱을 문지르니 문득 이 손을 시작으로 이어진 모든 부분을 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게 그가 누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가만히 있어 봐.”

제인은 뒤이은 도운의 돌발 행동에 더욱 꼼짝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어미의 젖을 빠는 것처럼 도운은 제 입 속으로 제인의 엄지를 부드럽게 빨아 넣었다. 열감을 품은 혀가 지문을 뭉갠다.

쪽쪽 흡입하는 외설의 소리가 호텔 방의 공기를 뒤흔든다. 지극히 성적인 감각에 제인의 손끝은 절로 굽어 들어 도운의 고른 치아와 혀를 자극했다.

꿈을 헤매는 눈동자에 불이 튄 건 그 때문이다.

쪼옥, 다소 사납게 제인의 엄지를 휘감아 뱉어 낸 도운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아랫입술이 잘근잘근 깨물리고 젖은 혀가 엉키며 두 입술이 아득하게 삼켜졌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눈도장만 찍고 싶었는데.

21년간 눌러 삼킨 욕심은 오늘을 위한 신호탄이었을지도 모른다. 얽힌 숨결에 흥분이 타오른 제인은 남자로 다가온 도운을 거부하지 않고 셔츠를 뜯어냈다.

질펀한 재회였다.

* * *

취임식 시작 3시간 후. 에덴 호텔 앞에 날렵한 리무진이 섰다.

호텔 정문 CCTV 관리자를 통해 금도 그룹의 행차 소식을 전해 들은 국현은 그들을 마중 나오며 실소를 터뜨렸다.

“아주 본인들이 주인공이시군, 그래.”

도착해서도 나오지 않는 저 꼴 좀 보라지.

“자꾸 날 자극해. 심창진.”

국현이 이를 아득 갈자 비서인 경식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회장님.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아. 그래서 웃고 있잖나.”

국현은 선팅된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빳빳한 입꼬리를 당긴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교진에게 고개를 틀었다.

“도운이는 어디 간 거야?”

“죄송합니다. 취임식 준비로 그만……. 당장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둬. 안 그래도 이 말 저 말 나도는데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군.”

상사 하나 제대로 보필 못 하냐는 아버지 경식의 눈초리에 교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초코의 비상함은 익히 알았어도 제 발로 저를 찾아와 목줄을 들이밀 땐 그야말로 소름이었다. 다른 의미로 척추가 오싹하기도 했다.

‘서도운 이거, 초코까지 맡긴 거 보면 어디서 사고 치고 있는 거 아니야?’

불길한 예감과 동시에 금도 가족이 다가왔다.

국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창진과 연정을 쏙 빼닮은 얼굴에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와 줬구나, 채연아.”

“도운이 취임식인데 와야죠. 일이 늦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잘 훈련된 변명이군.

국현은 채연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창진은 보란 듯이 연정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딸에게 너무 살갑게 굴진 말아 줘. 안 그래도 소문만 무성한 아이들, 정말 결혼설이라도 날 수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오늘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는 도운이 취임식인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장난이 심해, 심창진.”

“내 진심이 장난으로 보였다면 유감이야.”

두 남자의 악수엔 강한 힘이 실려 있다. 누구 손 하나 부러져야 떨어질 것 같은 악력은 이번에도 연정이 갈무리했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남녀의 시선은 짧지만, 진득했다.

“최연정이랑 사국현 아직 연인 사이인 건 맞대요?”

“몰라요. 확실한 건 최연정이 두 남자를 제대로 휘둘렀다는 거지.”

사람들의 숙덕거림을 그림자 삼은 채연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사람은 건국 일보 하태웅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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