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제인은 느슨해진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 어디에선가 겨울바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건국 일보 사회부 기자 손제인입니다.”
‘누나, 누나는 이름이 뭐야?’
‘안 알려 줄 거야.’
‘왜?’
부모가 없어 사계절이 하릴없이 추웠던 ‘꿈으로 보육원’의 겨울날. 7살의 제인에게는 한 살 어린 꼬맹이와 새끼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한 것이 있었다.
‘이름을 알려 주면 친구들은 항상 보육원을 떠났어. 네가 2주 동안 안 가면 나도 이름 알려 줄게.’
‘좋아! 난 누나 손 좋으니까! 누나도 좋아! 커서 나랑 살자.’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그 애는 저를 기억하고 있을는지. 추위에 발그레했던 볼을 떠올리던 그녀는 옆에서 들려온 동료의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깼다.
드디어 그 애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답지 않게 딴생각이었다.
“같은 소속 하태웅 기자입니다. 건국 일보 대표로 오늘 서도운 전무님의 취임식 보도 자료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제인의 옆에 선 태웅이 초대장을 건넸다. 경호원이 뜯어낸 빨간 실링 왁스 위 인장은 이곳의 장소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Hotel Eden’
신원이 확인되는 동안 제인은 에덴 호텔 연회장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 시각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연회장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인파가 모여 있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본 연예인들은 물론 정·재계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은 에덴 호텔의 시그니처 색상인 금빛에 걸맞은 화려함을 붙이고 있었다.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마침 감상은 들어가서 하라는 듯 경호원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제인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밟으며 비로소 오늘, 에덴 호텔 서도운 전무 취임식에 입성했다.
떨림을 다잡기 위한 의식처럼 제인은 허리를 숙여 벨크로 운동화를 치익, 떼었다 붙였다. 소위 찍찍이라고 칭하는 신발은 고귀한 존재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보풀이 일어난 벨크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궤적을 따라가면 170cm에 가까운 큰 키,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에 이어, 곱게 빚어낸 것 같은 달갈형 얼굴 위에 큰 눈과 오똑한 코, 자두처럼 붉은 입술이 오목조목 올라가 있는 것이 보인다.
제인은 대개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묘한 분위기로 인해 사람들은 힐끗거리며 숙덕였다.
“저 여자 건국 일보 손제인 기자 맞지?”
“예쁘긴 하네. 하는 짓이 안 예뻐서 그렇지.”
“야. 입조심해. 너 쟤가 어떤 기자인지 몰라?”
국민에게는 청렴 기자. 이 부류 인간들에겐 지옥의 손이라 불리는 손제인.
그녀는 매번 기업인들의 비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콩밥을 먹이곤 했다. 세상에 홀로 남았던 제인은 사회부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회 사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녀의 보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는 누군가처럼, 사람을 돈으로 회유하고 돈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큼 누군들 그녀의 표적이 될 수 있지만, 오늘 그녀가 카메라에 담을 사람은 딱 한 명이다.
마이크 소리가 연회장 안을 진공했다.
“아아, 귀빈 여러분. 사국현 회장님과 오늘의 주인공인 서도운 전무님이 등장하십니다. 힘찬 박수와 응원 보내주십시오.”
알리기가 무섭게 연회장 조명이 어두워졌다.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두 경호원이 힘있게 열어젖히는 문을 밝힌다.
“나왔다, 제인아.”
태웅의 신호에 제인은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셔터 세례에 합세했다. 제인의 목표물은 열화와 같은 박수와 함께 등장했다.
사국현 회장을 선두로 들어오는 서도운은 새까만 도베르만을 파트너 삼아 느릿하게 걸어왔다.
몸에 흡착된 정확한 핏을 자랑하는 잿빛 슈트는 체지방 하나 없는 근육의 결을 고스란히 자랑한다.
조명을 받아도 짙은 눈썹과 반듯한 이마. 그리고 188cm라는 신장만큼 우뚝 치솟은 콧대는 농익은 수컷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깜짝하지 않는 서늘한 눈매와 여유로운 입꼬리의 유연함은 묘한 색스러움으로 휘날린다.
“21년 만이네.”
조용한 감상은 셔터 소리에 묻히지 못했다. 태웅은 제인 옆에서 또 다른 각도의 서도운을 찍으며 공감했다.
“맞지. 편모 손에 버려져서 보육원 생활하다가 사국현 회장이 후견인이 되어 준 게 정확히 21년이니까.”
그래서인지 주변에선 웃는 낯으로 미천한 신분을 욕한다.
“이런 귀한 자리에 냄새나는 개는 뭐래요?”
“사국현이 개를 데리고 왔으니 개가 또 개를 데리고 온 거죠.”
정작 서도운이 목줄을 잡은 도베르만은 입마개도 하고 아주 얌전했다. 단언컨대 저 순종은 주인 한정일 것이다.
“지금부터 서도운 전무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지독히도 느린 손길로 도베르만의 머리를 쓰다듬은 도운은 단상 위로 성큼 올라섰다. 늠름한 화환을 배경으로 한 그가 마이크에 입술을 대자 제인과 태웅의 포지션이 바뀌었다.
“제인아. 네가 사진 찍어. 내가 취임사 적을게.”
“응.”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카메라 줌을 당기자 수려한 외모와 함께 중저음의 목소리가 선명히 와닿았다.
“안녕하십니까. 에덴 호텔 신임 전무 서도운입니다.”
왕위를 차지한 서도운은 거만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끝냈다. 제인은 도운의 움직임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노 단위로 셔터를 눌렀다.
“여러분의 숙덕거림처럼 혈혈단신의 몸으로 이 자리를 꿰차지 않았으니 감언이설은 하지 않겠습니다.”
서도운은 숨을 들이켜는 이들에게 시선을 골고루 던졌다.
“하지만 전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고, 이제 저를 알아볼 사람은,”
그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닿던 직설적인 시선이 프레임 안으로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줌을 한껏 당긴 상태라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친 듯한 착각도 든다.
“…….”
아닌가. 넌 정말 나를 본 건가.
제인은 카메라를 서서히 내렸다. 어느새 불특정 다수를 향한 도운의 경고에도 침묵이 일었다.
카메라에서 보는 것보다 두 사람의 거리는 훨씬 멀었다. 그래서인지 도운은 실눈을 뜬 채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도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화려한 언변을 국수처럼 뽑아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인은 문득 21년 전을 떠올랐다.
매번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누나 소리밖에 못 하던 게.
높은 단상에 선 서도운은 빼빼 마른 몸을 탈피한 채 늠름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게 참, 서럽고도 씁쓸하달까.
궁금했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너는, 왜 나를 버렸을까.
유일한 피붙이였던 언니도.
시선을 멀리 던진 제인은 연회장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금도 그룹의 딸이 되어 버린 심채연이 보이지 않았다.
* * *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그의 두툼한 턱살이 도운의 시야에 어룽거렸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은 기본인데 딱 서 전무 짝이야. 취임 축하하네.”
“덕담도 그런 덕담이 또 없네요. 그런데 누구시죠?”
“뭐, 뭐?”
“피곤해서 그런지 눈에 뵈는 게 없네요. 그럼.”
저, 저! 숨이 넘어갈 듯 삿대질하는 중년 남성에게 샴페인 잔을 찡긋 들어 올린 도운은 걸음을 옮겼다.
축하 인사라고 하지만, 기실 출신에 대한 모욕으로 자신을 은근하게 깎아내리는 그들을 조소하느라 벌써 이 시간이 됐다.
“어디 있지…….”
뻐근한 뒷덜미를 주무르자 그에게 다가온 국현이 안면 근육을 차갑게 굳혔다.
“이럴 줄 알았어, 심창진. 우리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이 많은 인파 가운데 금도 그룹만 오지 않았다. 도운은 손에 든 잔을 부드럽게 굴리며 연회장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심 회장은 그럴수록 최연정과 회장님의 염문이 더 뜬다는 걸 모르는 것 같네요.”
“집요한 놈이야. 집착도 심하고. 심채연이라고 제시간에 도착했을 리 없으니까 찾지 마.”
“심채연은 관심 없습니다.”
찾는 여자는 따로 있는데.
검은색 가죽 목줄을 쥐고 도베르만과 어슬렁거리는 도운은 나태한 사냥꾼의 작태였다.
“숨바꼭질은 취미 없는데.”
이럴 땐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게 큰 흠이다. 초코는 고민하는 주인을 바라보다 문득 솟아오른 귀를 쫑긋거렸다.
“컹!”
“응?”
여기!
그렇게 말해 주듯 초코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 도운의 어깨에 작은 타격이 일었다. 꼼짝 않는 다부진 몸 대신 크게 휘청인 샴페인이 도운의 재킷으로 쏟아졌다.
“컹컹!”
맞지? 내가 찾았지!
도운은 입술로 튄 샴페인을 엄지로 쓸어 냈다.
“초코, 쉿. 앉아.”
초코는 냉큼 앉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잘했어.”
초코의 턱 끝을 문질러 준 도운은 시선을 정면으로 틀었다. 제 발로 자신에게 온 여자를 보자 동공이 반짝인다.
“주시죠.”
“네?”
“젖었는데 닦아 주시죠.”
도운의 이상한 말버릇은 제인의 긴장감을 팽팽히 조였다가 풀어 버렸다. 태웅과 찢어져 호텔 연회장 구석구석을 찍는다는 것이 그만 서도운과 부딪혀 버렸다.
“네. 금방 닦아 드리겠습니다.”
숨을 일시적으로 멈춘 제인은 의도적으로 손을 뻗었다. 도운은 희고 고운 손의 궤적을 따르며 입맛을 다셨다.
반듯하고 빨간 손톱은 깨물면 달큼한 과즙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석류를 연상케 했다. 그 손끝이 탄탄한 어깨에 닿는 순간, 애무라도 당하는 듯한 아찔한 전류가 발끝부터 빠르게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