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고백해서 혼내 줍시다-20화 (20/21)

20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믿겠는가?

습기가 젖어 축축하던 눈가에서 눈물이 넘쳐흘러 그녀의 뺨에 또르르 굴러떨어졌을 때에야 상우는 아민이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아니 정말 좋아해요, 좋아요, 좋아해요…….”

‘이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그리고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이 상황이 현실감 없구나, 하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들었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던졌던 신호가 계속해서 엇갈리기만 하다, 또 아주 멀어지려 했다, 결국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서로의 마음이 같은데도 아민이 상우의 고백을 술에 취해 잊어버리고 또 상우가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의 신호를 수없이 읽지 못해 다가가지 못할 확률은?

상우는 숫자와 확률을 따져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예측하지 못했다.

무에 가까운 확률이었다.

상우는 처음엔 꿈꾸는 것 같았고, 나중엔 정말 이게 꿈이 아닌가 싶었고, 나중엔 이런저런 의심이 들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물어야 하고 들어야 하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가장 궁금해서 묻고 싶은 건, 대체 아민은 왜 그토록 오래 혼자였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칠 년간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다는데 아민 씨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상우는 믿을 수 없었다.

아민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콩깍지가 씌여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좋아했을 것 같았고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동안은 왜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을까?

혹시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건 아닐까, 상우는 고민했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설마…….’

하지만 설마 아니겠지, 하고 넘겼던 것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아니겠지.’

기쁜데, 이보다는 더 기쁠 수 없을 것 같은데, 너무 기쁘다 보니 그 뒤에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오히려 상념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아민 씨 나이가 몇인데…… 하지만 이십 대 초중반의 연애가 마지막이었다고 하니…….’

아마 우리는 사귀게 될 것이다. 아민 씨도 그리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 현재만 생각하자 다짐하고 잠이 들려 해도 그다음을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이었다.

아민 씨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솔직히 이런 마음을 알게 되면 자신을 짐승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아까 아민 씨를 안고 싶었다.

입 맞추고 싶었다.

빠르다는 걸 아는데,

그다음도 생각하게 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우리 오래 만나지 않았나. 서로를 오래 눈여겨보고 또 설레지 않았나?’

알 것 다 아는 성인 남녀인데 설레고, 또 설레는 와중에도 알 것은 다 알아, 미래의 청사진도 그리게 되었다.

아민 씨는 지적이고 아름답다. 아민 씨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도, 풍성한 옷가지 속에 숨겨져 있는 몸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무척 부드러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주책인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오를 나무라 생각하고 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 잊었다고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자기 자신을 속인 듯했던 순간, 짠 하고 나타나 자신을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몰랐다.

크리스마스를 공휴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고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억도 없는데, 오히려 떠올려 보면 풍성했다기보단 쓸쓸한 기억뿐인데, 아민이 마치 미리 배달되어 온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생각되었다.

다음 날 만난 아민은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온 곳에 시선이 닿았다. 그를 빨아들일 듯이 바라보는 까뭇한 눈과 조잘조잘 말하는 붉은 입술부터 가느다란 목과 스커트, 스타킹으로 감싸인 다리까지, 롱부츠를 신은 아민의 다리는 길고 예뻤다.

이번 해 여름에 아민은 하늘색 청반바지를 자주 입고 다녔고 상우는 그녀의 쭉 뻗은 다리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주 보았다. 시선이 가게 만드는 다리였다.

‘이렇게 빨리 좋아지면 안 되는데.’

동시에 상우는 겁도 났다. 짓눌러 없애 버렸던 마음이 풀린 데 대한 반동으로 폭발하듯 움직였다. 아민 씨가 좋았다, 좋아하던 것보다 아주 빠르게 더 좋아지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만약 아민 씨한테 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면 어떡하나?

아민 씨와 할 수 있다면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지려는 것을 상우는 꼭 눌러 참았지만, 가볍게 가진 두 번째 술자리에서 흑심이 나왔다.

아민 씨가 혹시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만한 제 흠결과 함께였다.

그런데 아민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오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우는 그 부분도 좋았다. 서로를 보듬어 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명, 처럼 생각되었다.

“아민 씨, 혹시 혼후관계주의자인가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다. 보고 있으면 갖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의 당연한 이치다.

어젯밤 했던 고민이 목구멍 속 가시처럼 박혀 있다 툭 하고 튀어나왔다. 아민은 제가 한 말에 흠칫, 하더니 갑자기 두 눈이 흔들렸다. 연애 전에 하기엔 흔치 않은 질문이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당황하기에 상우도 놀랐는데…….

“……네? 혼후, 예?”

아민 씨는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은 듯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말을 더듬어 댔다.

“설마…….”

당장이라도 울 거 같은 눈망울은 덤이었다.

“으, 상우 씨는 혼후, 혼후관계주의자세요, 혹시?”

“아니에요.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반응은 예상과 달랐어도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기다려 달라면 기다려 줄 수 있었고, 만일 그런 신념을 갖고 있다 하면, 솔직한 심정으론 어르고 달래 결혼을 빨리 진행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백을 받은 건 그제지만 그만큼 애가 닳았다.

하지만 아니라지 않은가?

“아민 씨 정말 안고 싶은 사람이에요.”

상우는 말했다.

“정신만큼이나 나는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연애할 때 이런 부분이 맞았으면 싶어요.”

실은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민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 일렀을까, 그 말에 아민은 또 흠칫, 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저도…… 싫어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를 만큼 작고 가냘픈, 그리고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여서 상우는 걱정이 되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한텐, 내키지 않는 일이나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받아도 해 주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아민은 상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상우의 눈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지 않아요.”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단호함에 상우의 가슴이 뛰었다.

상우는 제 마음을 들키지 않게 주의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조금 빨라도 괜찮아요?”

“……좋아요.”

아민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마음 같아선 그날 당장이라도 아민을 집에 데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 이렇게 초조해하고 재촉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상우는 자신에게서 알지 못했던 면을 발견했다.

“그럼 언제? 정말로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아민 씨의 의견에 따를게요.”

“그럼…….”

그 말에 아민은 놀란 듯 머뭇, 하며 운을 떼었다.

“내일이라도 좋은데 적어도……”

하지만 수줍어하는 태도와 달리, 하는 말은 역시나 상우의 예상에서 빗나갔다.

“적어도……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상우는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자정이 가까운 마지막 해 13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겠나. 상우는 손을 아민의 얼굴로 뻗었다. 아민은 조금 움찔거리긴 했지만 가만히 상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럼 다음 주에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집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주말에, 주말이 아니라도 괜찮고…… 아민 씨 괜찮은 날에, 어때요?”

아민의 얼굴이 상우의 한 손에 담겼다. 뺨은 말캉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약간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끄덕했다.

“좋아요.”

그 비장미가, 귀여웠다. 상우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요리가 취미예요.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어요.”

그날 밤 상우는 아민과 입을 맞췄는데, 무척 달았다. 감싸 쥔 어깨와 혀는 긴장감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지만 무척 부드럽고 입안은 촉촉했다.

서툴지만 응해 오는 것이 상우를 점점 더 자극했다. 상우는 저도 모르게 아민의 그러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민의 입술은 상우가 지금까지 마신 무엇보다 맛있게 생각되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 아민 씨와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사귀고 싶어요. 깊이.”

“…….”

아민은 그 말에 푹 하고 상우에 가슴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전 이미 사귀는 거라고 생각했는걸요…….”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김칫국 마신 건 아닌가 봐요.”

***

아민은 그 주 토요일에 왔다.

“이건 선물이에요.”

상우한텐 아민이 이미 선물이었는데, 아민은 초대받은 데 대한 감사 인사라며 케이크를 사 왔다.

“이 케이크는 서울에서 단 세 곳에서밖에 안 만든대요.”

그리고 흥분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멀리서 사 온 거예요?”

“아니요, 다행히 집 근처에 있었어요, 그런데 예약은 했어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그래요? 고마워요, 덕분에 맛있는 거 먹겠네요. 식사하고 디저트로 먹어요.”

상우는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어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아민은 현관 앞에 준비해 둔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지나더니 마치 낯선 곳을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활짝 넓어지는 거실 쪽으로 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깔끔하게 해 놓고 사시네요. 예뻐요, 잡지에 나올 것 같아요.”

상우는 아민이 생각하는 잡지가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 미소 지었다. 그의 집은 벽이며 천장이 하얗고 층고가 높다.

천장이 높은 것이 좋아서 일부러 선택한 집이었다. 거실은 크림색 사인용 소파와 같은 색의 러그, 벽걸이 TV와 라탄 조명 외엔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

살풍경하지 않도록 조명만 넉넉히 둔 집이다.

가구를 최대한 두지 않는 편이고 청소야 로봇청소기가 해 준다. 정기적으로 클리닝 서비스도 받고 있어 누군가를 초대할 때 특별히 신경 쓰인 적이 없었는데 상대가 아민 씨라 그런지 상우는 전날 밤새 침구도 깔고, 이리저리 가구 배치를 바꾸었다.

바꾸면서 내가 어지간히 아민 씨를 좋아하네, 싶었다.

“침실과 서재, 드레스룸이 있는데 하나씩 보여 주고 싶어요, 어때요?”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잘 보이고 싶나 보다, 생각했다.

저 사는 곳을 보여 줄 때 상우는 꽤 긴장했다. 아민의 눈이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랬다.

사람들을 초대할 때 자주 하는 메뉴인 함박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대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에 넣은 치즈 맛있죠?”

“아…… 네, 예……. 진짜 맛있어요.”

‘긴장했네.’

아민도 삐걱거리는 게 긴장한 듯 보였다. 아민은 음식을 한입 먹고 주변을 둘러보고 또 음식을 한입 집어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상우의 말에 대답하고 또 주변을 살피느라 식사 시간이 한참은 더 길어졌다.

“집이 그렇게 신기해요?”

자신의 눈엔 몰개성한 것 같은데 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동호회 사람들을 초대하겠다고 하신 적이 있었잖아요?”

“제가요?”

“네, 맛있는 것도 해 주시겠다고.”

글쎄,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은데, 했어도 아마 아민을 의식해서 건넨 말일 터였다. 아민은 상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약 제가 여기 온다면 아마 사람들이랑 같이 방향제를 들고 방문하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작해야,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맞장구 정도나 치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돌아갈 줄, 그러니까 이렇게 와서 정말 좋아……”

촉촉한 눈동자였다.

가까이 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우는 아민의 등에 손을 얹고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길어졌다. 상우는 몇 번이고 아민의 혀를 얽었다. 떨리는 아민의 손이 그의 어깨에 얹어졌다 이윽고 힘을 잃고 미끄러질 때까지.

“……요.”

쭉 이러고 싶었지. 아민 씨의 입술을 처음 느끼기 훨씬 전부터.

“신기하고…… 이 상황이…….”

아주 뒤늦게야 아민이 하지 못한 말을 웅얼거렸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좋고, 신기해요.”

아민의 눈은 초점이 약간 풀려 있었다. 상우는 아민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그것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동시에 아주 섹시하다고, 그리고 더는 못 참겠다고도. 아주 오래 기다렸단 느낌이 든다.

“원래는 이렇게 빠르진 않아요.”

자신을 오해할까 봐 상우가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서로 많이 참아 왔으니까, 이해하죠?”

그리고 눈가에 한 번 더 입 맞추며 말했다.

“지금에 와서 말하는 건데 아민 씨를 볼 때마다 안고 싶었어요.”

같은 마음이었으면 싶었다.

“아까 침실 보여 줬잖아요, 거기로 갈래요? 아민 씨가 거기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일이 이리되려고 그렇게 애가 닳고 오래 기다렸나 보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상우는 제가 생각해도 흥분으로 긁혀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안이 궁금했어요.”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다. 아까 아민이 했던 말처럼, 제게 허락되지 않을 영역이라 생각하고, 궁금함과 욕망을 꾹 내리눌렀었다.

“돌아가지 말고.”

그런데 제게 영영 문을 열어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모든 게 허락되다니, 어떻게 좋지 않고 신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 상우는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며 속삭였다.

아민은 움찔 몸을 떨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려 들었다.

“그냥 오늘 자고 가요.”

상우는 그녀의 두 손을 쥐고 천천히 가슴 위에서 떼어 시트 위로 놓았다.

머릿속으로 조명을 넉넉하게 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은한 울금색 빛을 뿌리는 조명빛 속에서 그녀의 가슴이 환하게 빛나는 듯했다. 상우는 황금이라도 본 것처럼 시선을 떼질 못했다.

“그만 봐요.”

아민은 부끄러워했다. 붉어진 아민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가슴이 푸딩처럼 흔들렸다.

상우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천천히 빨아들이며 언저리부터 물어 들어갔다. 사과를 탐하는 뱀처럼 집어삼키고, 깨물었다.

입안에서 아민의 살이 녹아 들어가는 듯 느껴졌다. 달아서 정말 통째로 집어삼키고만 싶었다.

뼈조차 없이 제 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허리 아래 아랫배의 심이 뻐근해지며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흐…… 흐앙…….”

혀가 아민의 단단해진 젖꼭지를 핥아 올렸을 때.

아민이 아랫입술을 깨물다 결국 참지 못하고 삼킨 신음을 흘렸다.

상우는 제 욕망을 억누르며 꼿꼿하게 선 아민의 젖꼭지 둘레를 핥아 나가다 꾹 누르고 끝을 깨물었다. 흔들자, 아민이 허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신음 소리가 오싹할 정도로 야했다, 더 듣고 싶었다.

상우의 무릎이 아민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정말 아주 민감한 가슴이었다. 상우는 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스커트를 벗기는 대신 둥그렇게 말아 올렸다.

“빨아도 돼요?”

스타킹 위 속옷 안쪽을 엄지로 문지르며 그가 물었다. 엄지로 문지르는 부분이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있다. 나머지 손으론 젖어서 반들반들하게 되어 꼿꼿이 선 유두를 꼬집었다.

“아, 네……? 아, 아니…….”

잔뜩 핥아져 민감하게 된 부분과, 동시에 괴롭혀지자 아민이 반쯤 정신을 놓고 헐떡이며 신음하다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어딜요? 더러워요.”

“그래요?”

상우는 손을 떼고 아랫배에 피부처럼 달라붙은 스타킹을 발끝까지 내렸다. 그리고 아민의 오므린 두 다리를 벌렸다.

“잘됐네, 그럼 내가 깨끗하게 해 줄게요.”

희고 가느다란 허벅지를 쥔 상우의 입술이 옮겨 갔다. 그의 입이 아민의 허벅지를 덥석, 탐욕스레 베어 물었다.

“아민 씨, 너무 달아요…….”

그의 말에 실린 뜨거운 숨결로 속옷 안 여린 피부가 옴찔옴찔하더니 동그란 자국을 내며 더더욱 젖어 들었다. 상우는 허벅지를 한참 맛보다 입술을 점점 더 젖어 들어가는 속옷 위로 옮겼다.

“예뻐요.”

무엇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단 건지. 아민의 다리가 오므려지면 오므려지려 할수록 상우는 더더욱 활짝 벌렸다.

“아, 아, 잠깐만요, 아……”

아민이 상반신을 일으키려 하다, 자극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떼어 내 보려 했던지 그의 머리칼에 두 손을 얹었지만,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던 손이 이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흐아…….”

상우는 아민의 속옷을 이로 물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대로 해 주었다.

혀로 아주아주 깨끗하게, 아민의 붉고 여린 살갗을 닦아 주었다.

“흐윽…… 읏……!”

그의 혀가 주름진 균열 위쪽, 자극과 흥분으로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였다.

아민은 손을 버둥거리다 베개를 집어 제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어쩔 수 없이, 마치 비명처럼 흘러나오는 신음을 어떻게든 줄여 보고 싶었는데, 큰 소용은 없었다.

“아, 어떡해, 아, 흐악, 앗, 읏…….”

아민의 두 다리가 쾌감으로 힘을 잃고 벌려지자 상우의 머리는 더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아민의 두 다리 사이를 적시며 허벅지를 쥐었던 손을 뻗어 아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흑……!”

유두가 꺾여 비틀리는 감각에 아민의 눈이 위로 뒤집히고 허리가 한계까지 휘었다.

상우는 자신의 말대로 젖어 있는 아민의 은밀한 곳을 샅샅이 핥아 제 타액으로 적셔 놓았다.

균열 안쪽까지 들어오는 혀에 아민은 파득파득 몸부림쳤다. 한참 동안 옴찔옴찔대는 아민의 입구를 핥았던 그의 혀는 천천히 그녀의 배를 지나 또 한껏 예민해진 가슴을 희롱하다 이번엔 그녀의 귓바퀴에 닿았다. 질척질척한 물소리가 나도록 귀를 핥고 깨물며 상우가 물었다.

“기분 나쁘거나 아프진 않아요?”

상우의 손끝이 충혈된 클리토리스를 더듬고 부드럽고 뭉근하게 문질렀다.

“아, 아흑, 자, 잠깐만요, 흑, 아아아……!”

아민은 정말로 울기라도 하려는 듯 흐느끼다, 이젠 몸을 굴려 제게서 떨어지려 들었다.

아민은 무의식중에 쾌감이 도를 넘는다 생각하면 숨기고 피하고 도망치는 타입인 듯했다. 그것도 귀엽다. 상우는 반대로 침대 위에서 누군가 도망치면 끝까지 추격하는 타입이었다. 마치 사냥개처럼.

한 손으론 아민을 묶듯이 꽉 끌어안은 상우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싫진 않죠?”

물으면서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민의 아래는 닦아 준 보람도 없이 상우의 손까지 축축하게 만들 정도로 다시 젖어 들었다.

상우는 한참 동안 아민이 괴로워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뒤로 젖힐 정도로 클리토리스를 만져 주다 그 아래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하나, 둘, 적셔 놓은 그녀의 입구를 더듬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아민의 근육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빨아들인 뒤 꽉 죄여, 놓아주지 않으려 들었다.

‘귀여워.’

어쩌면 이렇게 야한지, 상우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할딱대는 아민의 입에 입 맞춰, 위도 아래도 꽉꽉 채웠다.

“흣! 흐으, 후으으……! 응, 흐, 으으으응…….”

아민은 몇 번이고 떨다가 결국은 신음을 흘리며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상우의 머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래는 아민과 입을 맞출 때부터 뻐근해져 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가위질하듯 손가락으로 공들여 여러 번 벌리며 풀어 주었는데도 아민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힘겨웠다.

동시에 너무 좋아서, 그녀의 다리를 제 체중으로 벌리며 그녀의 뜨거운 안으로 저를 가라앉히는데 상우는 이성의 끈이 끊길 것 같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민은 따뜻하고 뜨겁고 손으로 꽉 쥐듯이 상우를 죄어들었다.

“앗, 흑, 아, 잠깐…….”

천천히 밀어 넣는데 아민이 그의 단단한 배를 긁으며 밀어내려 하기에, 그는 아민의 두 팔뚝을 쥐어 고정시킨 채로 제 뿌리 끝까지 밀어 올렸다. 고개를 꺾으며 아민이 힉, 하고 신음했다. 동공이 풀린 눈이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기에 상우가 물었다.

“아파요?”

“허윽…….”

아민은 쾌감과 흥분으로 녹여져 상우의 말에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민의 팔뚝에서 손을 뗀 채 딱딱해진 유두를 비틀며 다시 물었다.

“응?”

“앗, 아앙…….”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상우는 웃으며 허리를 물렸다 쳐올렸다.

“아파서, 기분 좋아?”

아민이 도망가지 못하게 두 팔로는 그녀의 팔뚝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 아민의 좁디좁은 안으로 자신을 박아 넣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정도로 황홀했다.

정말로 이러고 싶었다.

“이렇게 해 주고 싶었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 틈을 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던 음담패설을 흘려 넣었다. 저항도 할 수 없고 틀어막을 수도 없는 아민의 귓가에다. 아민의 안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온몸이 비틀리며 경련할 정도로 박아 주면서.

“얼마나 이렇게 해 주고 싶었는지 몰라, 단단히 단추 채운 옷을 벗기고 벌리고, 핥고…….”

이전엔 이렇지 않았다. 훨씬 더 담백했다. 대체 이런 독점욕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알 수 없었지만, 제 욕망이 맞긴 했다.

“매일매일 여기를 채우고 박아 주고 싶었어.”

그 이후에 아민의 귀를 핥고 깨물며 흘려 넣은 제 욕망은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실로 저열한 고백이었다.

“……내가 말한 건 다 할 거예요, 기억해요, 알겠죠?”

정말 많이도 참았나 보다. 상우는 흐물흐물해져 신음밖에 내지 못하게 된 아민을 장난감처럼 몇 번이고 끌어안아 제 단단한 성기 위에 올리고 고정시켜, 결국 아민이 견딜 수 없어 엉엉 울며 제 등을 손톱으로 긁으며 빌게 될 때까지 갖고 놀았다.

사춘기 소년 시절에도 이토록 흥분하고 기분이 좋아 날뛴 적이 없었다.

엎드린 아민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조붓한 아민의 안에 파정했을 때, 아민은 이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민은 추욱, 늘어졌다.

“자요……?”

아민의 젖은 곳을 물티슈로 닦아 주고 입 맞추고, 피임 도구를 정리한 뒤 씻고 돌아오니, 아민은 이미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침대가에 앉은 상우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를 떼어 내고 쓸어 넘겨 준 뒤,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곤히 자는지 아민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상우는 아민의 볼도 좀 만지작거렸다. 등빛이 어룽거리는 아민의 얼굴이 아이처럼 맑았다.

“…….”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상우는 일어나 아민의 몸 위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준 뒤 방 안을 은은히 밝히던 조명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땀이 촉촉하게 난 아민의 맨 살갗이 상우의 살갗에 착 달라붙었다. 상우는 아민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게 밀착시킨 뒤, 그녀의 머리칼에 제 코를 묻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자고 가라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었겠지만, 자고 가라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이나 속이나 말랑말랑하네…….’

상우는 자신이 신기했다. 그 누구를 만나도 자신에겐 침범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허락하고, 젖어 들게 되다니. 그는 새삼 생각했다. 아마 오래 참고 기다려서일 테지만, 이렇게 빠르게 마음을 준 일이 없었다.

상우는 아민을 끌어안고 살냄새에 취해 깊이 잠들었다.

“……?”

무언가 꾸물꾸물하는 감촉이 느껴져 깨어 보니 커튼 빛 사이로 햇살이 새어드는 아침이었다. 해가 늦게 오는 겨울이니 한낮에 가까운 듯하다. 상우의 두 팔뚝에 묶이듯 안긴 아민이 아래로 벗어나려고 꾸물대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상우는 아민의 어깨에 입술을 부비며 물었다.

“……네.”

아민의 목소리가 염소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상우는 눈을 반짝 떴다. 목덜미는 물론 귀까지 빨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끄럼을 타는 것이다.

“왜 내외해요?”

발그레한 귀가 잘 익은 듯 보여 상우는 아민의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

“기억 못 해요?”

속삭이자, 아민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검은 머리칼이 상우의 얼굴을 간질였다. 상우는 웃었다. 그리고 아민을 돌려 눕혀, 제 아래 두었다.

“기억하면서, 왜 부끄러워해요?”

햇빛 아래 아민의 몸은 희고 눈부셨다. 아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흰 피부와 대비되어 발갛게 달아오른 아민의 예민한 속살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헤집던 상우는, 그녀를 다시 돌려 눕혔다.

혹시나 하여 콘돔을 넉넉하게 사 놓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아민 씨.”

그가 허리를 꾹 누르며 아민의 허리와 둔부 사이 옴폭 들어간 부분을 입술로 애무했다.

“일어났으면 어제 말한 대로 한 번 더 해요.”

그리고 제 배와 아민의 등허리를 겹쳤다.

“허윽…….”

손가락이 벌려 놓은 아민의 속살을 단단히 발기한 그의 것이 비집고 들어갔다.

“아으으응……!”

상우는 아민을 비틀어 열었다.

“어제 다 못 했으니까 이어서…… 괜찮죠?”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며 힘겨워하는 아민의 신음과는 반대로, 어젯밤부터 쾌감으로 푹 적셔져 있던 안은 별다른 전희 없이도 상우의 것을, 오물오물 받아들였다.

“아응, 아, 아……!”

아민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전율했다.

“잠깐, 잠깐만요……. 어으응…….”

바르르 몸을 떤다고 해서 뭐 상우가 봐주는 일은 없었지만. 상우는 시트와 아민의 가슴 사이로 손을 넣어, 한껏 예민해진 아민의 가슴을 움켜쥐며, 제 것을 머리까지 뽑았다 다시 뿌리 끝까지 쑤욱 밀어 넣었다.

“흐아앙……!”

“민감하네요…….”

아민의 여린 살 안쪽이 상우의 것을 꽉 물고 딸려 나오는 것이 입맛을 다실 정도로 야했다.

***

“왜 이렇게 잘 자요?”

상우가 상큼하게 물었다.

잔 게 아니라 반 기절했단 말이 적절하겠다. 침까지 흘리며 베갯잇을 적시다 일어나 보니 오후 두 시였고, 상우가 차려 놓은 아침상은 점심상으로 변해 있었다. 아침, 아니 점심은 한식이었다.

“어제와는 달리 반찬과 국은 다 다녀가시는 아주머니가 해 주신 거지만요.”

서너 가지 반찬과 국은 정갈하고 무척 맛있었다. 맛있었는데 문제는 수저가 잘 가지 않는다.

음식의 맛은 둘째치고, 아민은 수저를 들 힘도 없어 파르르 손을 떨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어디서 배운 건지, 또 왜 이렇게 집요한지…….

의식이 없는 시간을 제외하면 밤부터 해가 중천에 뜨기까지 하기만 한 것 같다. 아민은 정신이 없었다. 결국 돌리고 돌려 한 말이 이것이었다.

“제 생각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 말에 상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달라서, 싫어요?”

아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았어요.”

싫을 리가 있겠는가? 좋았다. 너무 좋았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집에 돌아가서 어제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일기부터 작성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상우 씨를 오해했던 것은 아닌지, 그저 생글생글 잘 웃고 상냥한 백면서생이라고.

‘그런데 침대에서 실은 조금은 짓궂고 집요하고, 강압적이기까지…….’

어젯밤을 상기시키는 아민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서서히 달아올랐다.

‘어쩜 정말…… 이래.’

제 취향이었다. 어쩜 이런 부분까지도…….

“너무 좋아요…….”

그제야 상우의 얼굴이 풀렸다.

“나도 아민 씨가 좋아요.”

“…….”

“원래도 좋았는데, 더 좋아졌어요…….”

말에 실린 진지함이 전해져 와 아민은 긴장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다음 크리스마스에도, 그다음 새해에도 우리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민도 그러고 싶었다. 지금도 같이 있고 싶었고, 이다음도 함께였으면 했다. 아민의 생각도 그에게 전해졌던지 상우가 웃었다.

“그럼 이렇게 있기도 심심할 테니 잠깐 산책할까요?”

“네!”

아민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 근처 산책로를 걸으며 상우가 말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새해에도 함께 있어 줄 수 있죠?”

아민의 손은 상우의 손에 쥐어져 그의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따뜻했다.

“그럼요, 그럼요.”

아민은 추위를 많이 타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싫어했다.

“아민 씨와 언제까지나 쭉 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상우 씨와 손을 잡고 함께 걸으니 그리 싫은지도 몰랐다.

그가 집에 바래다주긴 했는데, 어찌나 돌아가기 싫은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

“내가 연애하라고 했지만 외박은 너무 이르지 않니?”

다음 날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비번이라 집에 있었던 아빈이 핀잔을 주었다.

“…….”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럴 힘이 없다. 아민은 그저 온몸이 흐물흐물하여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스륵 주저앉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녹았다. 언니가 면박을 줬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빈이 다가왔다.

“괜찮아?”

“언니, 나 결혼할까 봐.”

아민이 웅얼거렸다.

***

상우의 사정도 이와 비슷했다. 아민을 보내고 나서 상우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했다.

방금 전까지 아민이 있었다. 향수에 섞인 살내음을 풍기고 웃기도 하면서,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어제 이 시각과 그리 달라진 것도 없는데, 딱 맞은 퍼즐 조각 하나를 잃어버린, 아니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부분이 덩그러니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연인들이 처음 만날 때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헤어지면 몹시 아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 좀 더 특별했다. 아민 씨는.

모든 연인이 사랑을 시작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자신들이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믿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걸 운명이 아니면 뭐라 할까.

‘내 집이 이렇게 삭막했던가.’

상우는 저녁이 될 때까지 거실에 앉아 회사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시간을 가졌지만, 마음은 결국 딴 데 가 있었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오니 연락이 와 있었다.

[이제 집에 왔어요, 언니가 오랜만에 비번이라 집에 있어요. 어제 있었던 일을 무척 궁금해해요. 다 말해 주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요.

이건 뜬금없는데 정말 좋아해요, 상우 씨.

자기 전에 전화할게요, 그래도 괜찮죠?]

나이 차가 그리 있는 것은 아닌데 사정이 있어 그녀는 언니를 엄마처럼 느낀다고 했었다.

‘은근히 긴장되네.’

그러고 아민은 연락이 없다.

빈집을 홀로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아민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해가 다 진 이후 그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에게서였다.

“아버지, 무슨 일은 없으시고요.”

대한민국 평범한 부자 관계가 다 그러하듯 상우는 아버지와 통화해 안부를 주고받는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하면서도 표현이 서툴다. 게다가 지난 명절쯤엔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느냐, 이제 나이도 찰 만큼 찬 놈이 정착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이유이냐, 라는 질문에 그도 날이 서 대화가 그리 좋게 끝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실은 상우도 그러했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안부에서부터 시작해 둘레를 뱅뱅 돌다 그럼 건강 조심, 몸조심하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을 조짐을 보였다.

“아버지, 저 요즘 연애해요. 좋은 사람과요.”

전에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도 이런 말을 전한 적이 없었다. 그의 말에 아버지는 질문을 쏟아 내진 않았으나 못내 궁금한 듯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담백하게 답했다.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에요. 결혼을 전제로.”

충동적인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께 이 상황을 고하며, 제 말이 예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리란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민 씨의 전화는 저녁 늦게 걸려 왔다. 그가 목말라 이제 거의 지칠 때쯤.

“아민 씨, 좋아해요.”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애절하게, 끊어질 듯이. 결과적으로 고백을 한 것은 아민이고 그걸 받아 준 것은 상우인데 왜 그의 온 마음이 기울어지는 건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정말 좋아해요. 헤어지고 내내 아민 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나 이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지만 아민 씨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