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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고백해서 혼내 줍시다-19화 (19/21)

19

보지 않고도 믿는 자 행복하다 하였던가?

무신론자인 아민은 허겁지겁 휴대전화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월 마지막 주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통화는 약 육 분쯤이었다. 육 분의 통화에서 상우가 어떻게 고백을 했는지는 아민은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설령 문장이야 안다고 해도 그때 그가 목소리에 실었을 감정과 분위기를 어떻게 재현한단 말인가.

“…….”

아민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민은 한참 휴대전화의 통화목록만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검은 스웨터 차림의 상우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쓸쓸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것 같은.

“정말 기억 못 하는구나. 정말로.”

상우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마음 접으려고 했어요. 전화 오기 전까진 접었다고 믿었고요. 이번 달이 내겐 그냥 무던했어요.”

“…….”

“아민 씨 생각도 잘 안 났고요.”

아민의 손에서 철철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상우는 어쩌자는 걸까.

‘이제 자신의 마음은 다 사그라졌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마음이 쌍방향이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일 년여간의 짝사랑으로 배웠는데 타이밍이 신묘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는 걸 이유로 눈앞에서 놓친다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상우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민은 휴지를 새로 뽑으며 코를 먹었다.

“저 원래 잘 울어요, 감수성 풍부해요. 정말이에요.”

이상하게 계속 눈물이 났다. 그것만 난다면 모를까 콧물도 함께. 예쁜 모습을 보여 줘도 모자랄 판국에 계속 더러운 모습만 보여 주는데 상우는 뭐가 우스운지 또 미소 지었다.

“나 좋아해요?”

여기 나온 걸 보면 모르겠는가? 아민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우리 내일 한 번 더 볼래요? 보고 싶어요.”

그 말에도 끄덕끄덕.

‘기회, 기회를 주는 건가?’

아민이 눈치를 보며 상우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상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 하지 말고. 이제 알겠어요. 아민 씨에 대해 마음 정리 안 된 거. 우리 이제 똑같은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내일은 영화 보고 밥 먹어요.”

상우가 내일이라고 하는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그 전에 만나서 차라도 마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도 하고요, 알겠죠?”

주말, 데이트였다.

술자리를 마치고 나니 별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긴긴 시간이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민은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 아쉬웠지만 좀 더 있자고 떼를 쓸 수는 없어 밖으로 나왔다.

“안이 따뜻해서 그런지 시원하네요.”

아민의 집 근처라 차를 두고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있잖아요.”

“네?”

“오늘 이 일은 잊지 말아요.”

상우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잊겠어요?”

아민은 대답을 하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잊었다. 그것도 술에 취해.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지는 않아요. 저번이 처음이었고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적도 없었어요. 무릎은 다쳐 있는데 왜 그런 건지도 기억이 안 나서 놀랐어요. 기억이 난다고 한 건 그냥…….”

변명처럼 들렸고, 또 변명이 맞았다.

“알아요.”

뭘 아는지 상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헤어지기로 하는데 아민은 어찌나 헤어지기 싫은지 할 말도 남지 않았으면서 뭔가 말하려고 노력했다. 상우는 한참이나 서서 아민이 하는 두서없는 말을 들어 주었다.

“단둘이서 영화 보고 싶었다는 게 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믿겠어요?”

집으로 돌아와 현관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찍어 누르는데, 상우가 그녀를 배웅해 주며 한 말이 어찌나 귀에 왕왕 울리는지 몰랐다.

‘올해 내가 그 순간만을 상상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믿을 수 없지…….’

그건 아민에게도 소원이었다.

단둘이 밥 한번 먹고 차 한번 마시고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것만 해도 너무 허황된 꿈처럼 여겨져 그 이후의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다음도 생각을 해야 할 모양이다.

차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다음의 일도 할 수 있겠다. 다음 날에 뭔가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아마 높은 확률일 것이다.

‘내가 그다음에는 뭘 했더라?’

까마득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민은 문을 열고 구두를 벗으며 생각했다.

‘마치 황태가 된 것 같아.’

얼려졌다가 녹았다가 또 얼려졌다가 녹았다가.

얼음장 같은 냉탕, 용암지옥 같은 온탕에 들락날락한 한 기분으로 돌아왔는데, 현관에서부터 김치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 그랬는데 어딜 나갔다 왔어? 같이 술 먹자며?”

부엌으로 들어가니 식탁 위 맥주 캔이 가득 든 편의점 봉투가 눈에 띄었고 그 옆에는 수북하게 김치전이 담긴 쟁반이 보였다.

아빈은 김치전 반죽이 남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주걱으로 닥닥 긁다 말고 아민을 바라보았다. 아민을 힐끗 바라본 아빈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럴 법도 했다.

“너 나 기다리다 산책 나간 줄 알았는데 뭘 그렇게 꾸미고 나갔는데? 어디 갔다 왔니?”

비행에서 돌아오면 술 먹자고 한 뒤 하루 뒤의 일이다. 그동안 동생의 실연을 걱정한 언니는 집으로 돌아오며 맥주 캔을 사 왔고 아민이 없자 먼저 동생이 좋아하는 김치전을 부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

아민은 대답하는 대신 식탁 앞에 앉았다. 모든 게 묘하게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말하면 바늘을 갖다 댄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진 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민은 가방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뒤 김치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 씻고 먹어라.”

살짝 눌어붙은 둘레를 떼어 먹자, 프릴처럼 바삭바삭했다.

“허으…….”

김치전의 맛과 냄새에 갑자기 아민은 무척 배고파졌다. 오늘 아침부터 사라진 것만 같던 식욕이 돌아온 것이다. 잠도 함께 몰려왔지만 아민을 가장 자극한 건 식욕이었다.

아민은 손을 씻고 돌아온 뒤 바로 젓가락을 꺼내 들어 김치전 한 장을 와구와구 입에 쑤셔 넣었다.

“야, 김치전 부친 언니 입은 입이 아니라 주둥이니?”

“언니, 나…… 나 어제 고백했거든.”

“어.”

아민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빈은 식용유를 두른 프라이팬에 반죽을 부으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상우 씨도 내가 좋대.”

아빈이 손을 멈춘 건 그때다.

“오늘 만났어, 방금까지 술 먹다 들어왔어.”

“뭐?”

아빈이 고개를 돌렸다. 김치전을 두 장째 야무지게 집어 먹으며 아민이 말했다.

“내일 영화 보재.”

이 와중에도 안전제일인 아빈은 식탁 옆으로 제 몸을 옮기기 전에 인덕션 전원부터 뽑았다.

“좀 자세히 말해 봐. 그게 무슨 소리니?”

그리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옆자리로 이동했다.

달칵.

이 흥미진진한 안줏거리에 술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편의점 맥주 캔을 딴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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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러브스토리를 다 들은 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치전을 집어 먹었다.

“난 너 그렇게 될 줄 알았잖아.”

“…….”

아민은 아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 찰떡처럼 믿는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는 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그걸 알았으면 김치전은 왜 부쳤겠는가 아민은 생각했다. 심지어 아빈은 잘 차이고 오라고 마음 정리되는 순간 소개팅 리스트를 뽑아 주겠다 약속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웃기다. 떠보려다가 덜컥 네가 그 사람 친구와 사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대?”

아빈의 말에 아민이 젓가락 끝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

“나도 아직 그게 의문이야…….”

자신이라면 장난으로라도 상우를 누군가에게 소개해 준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사람 마음 떠보는 걸 그렇게 스릴 넘치게 하는가? 중매쟁이의 신 월하노인의 현신인가? 전생에 오작교 까마귀였나? 아직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거절해서 다행이지…….’

만일 몇 번이라도 더 만나 볼까 했으면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일 뻔했다.

“내일 몇 시에 만나? 뭐 보는데?”

“요 근처 영화관에서. 열두 시에 식사하자고, 괜찮은 데는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또 영화는…….”

아민으로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추리 영화였다. 괜찮을까요, 하고 상우가 물었을 때 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봐도 상우 씨와 함께 보는데 재미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사귀기로 한 거야?”

아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은 밥 먹재, 영화 보고.”

마음을 제대로 확인한 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는데 아빈은 답답해했다.

“아니, 너도 그 사람 좋아했는데 그 사람도 너 좋아했다며. 그런데 왜 밥 먹는 거부터 시작인데, 그건 일 년 동안 많이 하지 않았어?”

“…….”

“네 나이도 있고 그 사람 나이도 있는 이 마당에, 그 남자 한 삼 개월 뒤에 사귀자 그러는 거 아니니?”

이제 막 배가 부르기 시작한 아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릎에 손을 올려놓은 뒤 말없이 꼼지락거렸다.

“뭐…… 난 기다릴 수 있어.”

상우에게 책상물림 서생 같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성적으로 매력적인 것과 별개로,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어쩐지 모든 게 돌다리를 두드리듯 천천히 진행될 것 같았다.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나도 오랜만에 연애하는 거니까…… 천천히 시작해도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아민은 키스도 어떻게 하는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연애를 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성은 이해했다.

‘그래도 있잖아…….’

하지만 욕망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날 밤 아민은 잘 자야 했지만 또 수면욕을 밀어내 버린 것이 있었다. 들썩들썩 몸을 움직이며 아민은 검은 천장을 배경으로 뜬눈을 지새우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가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만약 사귀게 되면 세 달 안에는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질…… 아니, 관계가 되겠지?’

김칫국 공장이 다시 가동된 모양이었다.

허아민, 독수공방한 세월이 약 7년, 참아도 너무 많이 참았다. 캄캄한 방 안에서 아민의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적어도 석 달 정도만 있으면…….’

아민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물론 상우의 생각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예상이었다.

***

“예쁘게 입고 나왔네요.”

상우 씨는 차 앞에 서 있다가 아민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상우 씨, 최고예요…… 장난 아니에요…….’

누가 할 말인가 아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자신의 남자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아민의 마음엔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식사 먼저 할까요?”

그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제 가지 못했던 레스토랑의 음식이나 카페에서 있었던 매끄러운 대화, 심지어 영화까지도.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았던 영화는 생각보다 출연진이 화려했고 군더더기 없이 일련의 사건들이 아귀가 딱 맞물려 진행되었다.

“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좋은 영화나 드라마, 책을 만나면 아민은 흥분했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

상우는 말없이 흐뭇하게 웃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술자리에서였다.

“우리도 이제 성인이잖아요. 연애만 생각할 때도 아니고, 그래서 말인데 좀 더 관계가 깊어지기 전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면 오늘 말했으면 좋겠어요.”

상우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그 말을 필두로 진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살아온 삶의 궤적부터 남들에겐 여간해서 드러내지 않던 약점들까지 술술 흘러나왔다.

“실은 제 부모님은 아버지 한 분이세요, 아, 말하자면 긴데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니고 제가 초등학생 때 이혼하셨어요. 그래서 저희를 길러 주신 건 할머니셨어요. 어딘가 살아 계실 거예요, 몇 년 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어디쯤이라고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앞으로 만날 생각은 없어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민은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이런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게 이상한 걸까, 마치 운명 같았다.

“저도예요, 저는 언니와 함께 살아요. 위탁가정에서 길러지다 언니가 다시 절 데리러 왔어요. 제겐 언니가 엄마 같아요.”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고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막힘없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술자리는 진지해졌다.

“재미없는 대신에 안정적인 직업이에요.”

통장까지 공개했던 것 같다. 아민은 예상은 했으나 상우의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 그보다도 아민 씨가 이렇게 인기 작가인 줄 몰랐는데요.”

“저 발끝도 못 따라가요.”

“그래도요, 이렇게 어린데……”

상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제보다 술잔이 더 많이 오고 가진 않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어서, 취하지 말자, 제정신 차리자 생각하면서도 아민의 뺨이 붉어졌을 때였다. 상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어요.”

그 말에 아민은 그게 무엇일까 바짝 긴장했는데, 상우의 말은 또 아민의 예상에서 아주 많이 빗나갔다.

“아민 씨, 혹시 혼후관계주의자인가요?”

그 순간이었다.

뎅.

아민은 뎅 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종망치가 종 대신 아민의 머리를 쳤나 보다. 머리가 울렸다.

“……네? 혼후, 예?”

결혼 전까지는 서로의 순결을 지켜 주는 주의라는 걸 아민도 알았다.

‘뭔데……?’

그게 뭔지는 대략 알지만 왜 이 주제가 나왔는지는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아민, 올해 서른셋…… 혼후관계가 대체 무엇인가? 십 년 전에도 그런 신념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일단 지금 자신한텐 뭐 지킬 게 없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런 걸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상력 좋은 머리가 금방 최악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이 사람 설마…….’

못 먹는 감, 못 먹는 감 했던 게…… 말이 씨가 되어 열매로 돌아온 것일까?

‘혼후관계주의자인가?’

다시 한번 경종이 울렸다. 뎅, 뎅, 뎅, 뎅, 뎅…….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는지 상우는 모를 것이다.

그런데 순결이란 개념이 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 순결인가?

손잡는 건 되는가? 키스는? 만지는 건…… 더 나아가 XX와 XXX와 XXXX는?

‘신념을 존중하지만, 이 나이에요, 이 나이까지 신념을 지켰다고요?’

분명히 작년에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들었는데 그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둘째치고, 상우와 자신이 아무 관계가 없었다면 나올 감탄까지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대체 어떻게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었나요? 서른일곱까지…….’

아민은 다른 이들의 신념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래, 앞으로 자신과 관계가 있을 거 같으니까 문제지.

‘미친 거 아닌가…….’

아민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머릿속에 벽을 치며 울부짖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젠 상대가 있는데 결혼 후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으, 상우 씨는 혼후, 혼후관계주의자세요, 혹시?”

그런데 언제 결혼하는데? 언제?

아민은 질문을 하다 말고 말을 더듬었다. 눈물이 글썽글썽하자 상우가 흠칫했다.

“아니에요.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민의 생각과는 반대라고 했다.

“오랫동안 혼자라고 하셨잖아요. 분명 유혹이 없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연애를 하지 않겠다 다짐한 분도 아닌 걸 아는데 어째서 그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봤어요. 혼자서…… 짐작이 도저히 되지 않아 혹시 종교적인 이유라도 있나 해서…….”

“저 무신론자예요.”

“알아요.”

상우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백할게요. 이런 말 하는 거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저 좋아해요.”

‘뭘?’ 아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육체적인 관계 말이에요.”

“…….”

“아민 씨 정말 안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만큼이나 나는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연애할 때 이런 부분이 맞았으면 싶어요.”

뎅.

종소리가 또 울렸다.

“…….”

아민은 상우의 말을 이해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간신히 표정관리를 하곤 있지만, 그녀의 손은 정직하여 치맛단을 구깃거리고 있었다. 아민은 속으로 뇌까렸다.

‘예-!’

머릿속에 종소리에 이어 팡파르가 울리는 순간이었다.

‘예! 짱이야! 정말 최고! 지금까지 살아 있길 잘했어! 예이―! 예예예―!’

펑! 퍼펑! 퍼버퍼버퍼버벙!

여의도 불꽃축제에나 쓰일 양에 버금가는 폭죽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터졌다.

“저도…… 싫어하지 않아요.”

아민은 뺨을 붉힌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이며 속으로 마구마구 축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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