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술집은 상우가 골랐다. 이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다고 했는데 집 근처에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는 아민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앉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밖에 없었다.
“인기 많은 술집인데 시간이 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네요.”
아민은 상우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수저를 세팅하는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바라보며 상우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 봐요.”
아민은 눈이 침침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시력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글자들이 자꾸만 흩어졌다.
‘하으…….’
수전증도 없는데 손은 왜 이렇게 떨리는지 입술은 또 왜 이렇게 바짝바짝 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민이 메뉴판을 진동시키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상우가 배를 채울 만한 안주를 제안했고 아민은 수락했다.
“음식이 괜찮은 곳이거든요.”
나온 음식은 보기에는 참 먹음직스러웠는데 아민에겐 역시 음식점 앞에 진열된 플라스틱 모형 음식처럼 느껴졌다.
“…….”
식욕이 없다. 아민은 아무리 멈추려 해 봐도 떨리는 손을 결국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었다.
술집 안은 훈훈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땀이 날 일인가 싶었다. 이 상황을 장르로 표현한다면 분명 로맨스일 것이건만 공포영화 클라이맥스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옷 안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앞접시 주면 좀 덜어 줄게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겠는데, 긴장을 풀어 주려는 건지 상우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는 건지.’
속된 말로 ‘못 먹을 감이다’ 생각했을 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해도 자꾸만 시선이 갔는데 손을 뻗으면 어쩌면 닿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어지자마자 꼼짝도 하지 못하겠다. 더더군다나 그 감은 더더욱 윤기나 보였다.
“한 잔 마실까요?”
술잔이 부딪쳤다. 목이 타서 그런지 맥주가 얼마나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지 몰랐다.
상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한동안 만나지 않은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잡담이 오고 갔다. 상우도 아민도 오늘 만난 이유에 대한 말을 빙 둘러 가며 아끼고 있었다.
“조금 더 시킬까요?”
“한 잔만……”
아민의 빈속에 술이 술술 들어갔다.
“아민 씨.”
시작은 상우가 했다.
“그냥 말할게요. 아민 씨도 아마 같았을 테지만 어제 전화 주신 덕분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맥주잔의 맥주를 절반 넘게 비운 뒤 테이블에 내려놓은 상우가 아민에게 말했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일을 해도 꿈속에 들어와 있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어제 궁금한 게 있다고 했죠. 얼굴 보고 묻고 싶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아민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젯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아민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정말 나 좋아해요?”
……음?
“그것도 예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분이 믿기지 않아요.”
고백을 받았으면 거절하거나 받아 주거나 그도 아니면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유보하거나 하는 게 예측 가능한 반응이 아닐까?
아니, 고백을 했는데 안 믿어 준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
“……아니…… 좋아해요. 정말로.”
아민이 제 마음을 쥐어 짜내어 고백했다. 오랜 짝사랑으로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믿기지 않는다니 오히려 그녀가 할 말이었다.
“음…….”
‘음?’
그런데 이제 상우는 팔짱을 끼었다.
‘왜 의심하는데? 내가 좋다는데? 내 마음을 왜 의심하는데?’
아민은 의아함을 넘어 두통까지 왔으나 상우는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그가 물었다.
“정확히는 언제부터요?”
아민은 생각에 잠겼다.
“…….”
시나브로 언제 스며들었는진 알 수 없으나 경종을 울렸던 순간은 있다. 아, 더 이상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척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겠다 깨달았던 순간,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냐면…… 아민은 기억 속에서 쓸쓸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오던 날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사월경……”
“아니에요.”
상우가 단호하게 아민의 말을 잘랐다.
“그때부터 나 좋아한 거 아닐 거예요.”
“…….”
상우의 말에 아민은 말을 더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아니, 내가 널 좋아한다는데요.’
그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인데 이 단호함이라니.
“왜냐하면 그 시기에 난 이미 좋아하고 있었으니까요.”
상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가 나를 좋아했단다. 심지에 불이 붙어 바짝바짝 타서 재가 되기 시작했던 그 시기부터. 상우가 계속해서 말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민 씨는 올해 내내 그런 내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기만 했고요. 어젯밤 통화는 정말 기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가 받은 신호는 그렇지 않았어요. 날 밀어냈잖아요.”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아민은 미궁에 빠졌다.
올해 사월,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상우가 소개팅을 해 주기 몇 달 전이었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쉬는 듯했다.
“마음을 정리하던 중이었어요.”
아민은 기억을 더듬었고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이거…… 안 맞는데?’
자신을 좋아했다니 고마운 말이긴 하나 타임라인이 맞지 않는다.
“절 좋아하셨다고요?”
아무리 조합해도 시기가 맞지 않는단 말이다. 이 상황이 소설이라면 독자들의 항의가 쏟아질 시점이었다. 게다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럼 소개팅은 왜 해 주셨어요?”
그 질문의 뜻은 이러했다.
‘이번 달까지 마음고생 했다면서요? 대체 어느 머저리가 좋아하는 사람 소개팅을 시켜 줘요? 전생에 오작교 까마귀였나요? 좋아하는 상대방한테 이러기 있나요? 날 밟고 가라 이런 거예요?’
자잘자잘한 실망이 일 년 사이에 가득 쌓였지만, 마음을 접게 된 결정타는 소개팅이었다. 아민의 말에 상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아민을 자극했다.
왜?
“왜요?”
쾅!
아민은 맥주잔의 맥주를 남김없이 비운 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부서질 듯 내리쳐진 맥주잔은 상우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힘 조절 미스였다.
“그럼 왜요?”
그러나 묻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믿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니, 아귀가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지 않는가 말이다.
“나 마음에 들었다면서 왜 소개팅 시켜 줬는데?”
질문을 하는데 아민은 목 뒤가 뜨끈해졌다. 잊었던 감정이 스멀스멀 흉추와 경추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실연의 고통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날 좋아했다고?
‘이게 말이야 돼지야!’
순간 아민은 절규했다.
“왜요― 왜요옥!”
상우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민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마음에 있는 여자 소개팅을 시켜 주느냔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
“말이 되지 않잖아! 난 그때 이 사람은 나한테 정말 관심 없구나 생각했다고요!”
믿을 순 없지만 만일 그때 상우가 그녀를 좋아했다면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는가?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차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나, 상우가 제 얼굴을 마치 거울처럼 들여다보더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사과했다.
“반은 떠보려고 그런 거였어요. 나머지 반은 체념이었고. 그런데 너무 쉽게 받아 줬잖아요. 나 좋아한다면서.”
“……제가요?”
아민은 절규를 멈췄다.
“제가 언제 쉽게 받아 줬는데요? 그리고 저 눈 높니 낮니 말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거절을 해요?”
글썽글썽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에 빗금을 그었다.
“그때 이상형도, 이상형으로도 어필했는데, 상우 씨 좋아한다고…….”
상우가 놀란 얼굴로 테이블 위 갑 티슈의 휴지를 뽑아 들었다. 아민은 그걸 받아 눈가의 눈물을 꾹꾹 짜내며 쿨쩍 코를 먹었다.
“저 원래 잘 울어요…….”
곱게 한 화장이 지워져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예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화장이 지워지다니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모르겠단 생각에 어떻게든 눈물을 삼켜 보려 했지만 자율신경의 영역이다 보니 통제가 되지 않았다. 동시에 콧물도 나왔다.
‘흐으윽…….’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닦은 휴지로 콧구멍을 틀어막고 있는데 아민의 맞은편에서 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구나. 그런데 아민 씨.”
놀라움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나 정말 좋아하네요.”
“아니…….”
그 말에 아민은 다시 통곡했다.
“좋아해요. 진짜 정말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믿어 주세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손님들이 한 명 두 명 들어와 테이블이 꽉 찼기 때문에 큰 소리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 말만 했잖아. 했잖아요!’
아무리 말해도 왜 안 믿어 주는 건데? 신뢰도 무슨 일인데? 아민은 할 수만 있다면 테이블에 엎드려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어제 희망을 얻었건만 막상 만나 보니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벽이었다.
“아민 씨, 나 봐요. 왜 울어요, 울 일이 아닌데?”
아민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심각한 상황에 상우는 웃고 있어서, 아민은 울컥했다. 그 울컥함이 상우에게도 전해졌던지 그가 미안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왜 티를 안 냈어요?”
하는 말이 첩첩산중이었다.
“번호도 제가 땄잖아요.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으라고도 했고.”
“언제요, 기억 안 나요. 그리고 아민 씨 번호 웬만한 모임원은 다 알고 있잖아요. 아민 씨가 모두한테 그러는 줄 알았죠.”
“나…… 나 번호 딴 거 상우 씨가 처음이었어요.”
아민이 억울함에 잠긴 목을 겨우 쥐어 짜냈다.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나요.”
아민은 무척 억울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걸 상우가 어찌 알겠는가?
“영화관 자리도 그저 친분으로 권유하는 정도인 줄 알았고요, 연락처 받았을 때도 제가 무척 길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뭐지 기억도 잘 안 나네. 주무세요, 한마디만 했잖아요.”
“아니, 저는…….”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아 아민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었다. 상우는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바짝 앉았다.
“그런데 왜 내 고백을 거절한 거예요?”
그리고 물었다.
“…….”
상우가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백요?”
아민은 혼돈에 휩싸였다. 실로 거대한 혼돈이었다.
“……언제요?”
“언제냐니…….”
한참 둘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민은 상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한참을 굳어 있었다. 상우의 표정이 점차 찌푸려졌다. 상우가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아요? 파티 끝나고 아민 씨 데려다주었던 밤에 말이에요. 내가 전화했었잖아요.”
“절…… 데려다주셨다고요? 저를요?”
기억이고 자시고 도입부부터 금시초문이었다.
“네, 아민 씨 무릎 깨졌던 날 밤에.”
“…….”
“너무 또렷이 기억나서 일기장에 적고 싶었다고 한 날 밤에.”
이젠 아민 측에서 침묵밖에 할 말이 없었다.
“고백…….”
“…….”
“저한테 고백하셨다고요?”
한참 뒤 간신히 입을 연 아민이 한 첫 물음에 상우는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아마 상우가 제 마음을 믿어 주지 않겠다고 했을 때 아민이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데 짝사랑 상대가 이미 자신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말을 들은 아민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그날? 고백을 받았다고?’
수없이 많은 물음표뿐이었다.
‘그리고 거절했다고?’
아민으로선 상우 씨가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더라도 그에게 고백을 들었는데 거절했을 리가 없었다. 이중인격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었다.
“…….”
아민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는 일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것일까?
“기억…….”
아민의 반응을 말없이 바라보던 상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못 하는구나.”
그는 마른세수하다 제 얼굴을 와락 감싸 쥐었다.
“정말 기억 못 하는구나.”
아민으로선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그 말에 아주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
그리고 상우는 자신이 핼러윈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려 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자신이 어떤 감정을 겪었고 또 어떤 결심을 했는지를.
긴긴 이야기였다.
“그래서 실은 동호회를 나오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아민 씨를 보면 가슴이 아파질 테니까.”
상우의 말에 아민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