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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고백해서 혼내 줍시다-17화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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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지옥이었다. 고백이 개미지옥에 가까운 스무고개 놀이로 이어지리란 미래를 예상했다면 아민은 전화를 걸지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그보다 좀 더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이제 정리하겠다’, ‘불편하게 해 드리지 않겠다’, ‘원하신다면 제가 이 동호회를 나가 드릴 수도 있다’라는 말은 더더욱 말이다.

대신에 이런 말을 했을 거다.

저 예전부터 상우 씨가 눈에 들어왔어요, 마음에 들었어요,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찾지 않으시겠다 한 건 알지만 그래도 차 한잔 마시지 않을래요? 저 괜찮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아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깨달아 보면 아민은 계속해서 사과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상우 씨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정리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네, 맞아요. 그게 이제 곧 새해고……”

[그럼 저는요?]

상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네?’

아민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제 생각은 하시고 고백하시는 건가요?]

이기적이라는 걸 이미 알고 하는 고백이었다. 배수진조차 아니다. 상대방에서 뿌리쳐 주면,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주었던 마음을 회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고백이었으니 그 말이 아민의 심장에 박힌 것은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 아민은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죄송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지자면 아민은 상우를 좋아한 것밖에 없는데 지금 그녀는 죄인이었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민은 전화를 끊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눈물은 이미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민 씨.]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건 참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민 씨, 좋아해요.]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민의 사고회로는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현재진행형이에요. 그런데 아민 씨는 지금 끝내려고 전화한 거예요?]

상우의 말을 이해하려 하는 일은 마치 난독증인 사람이 글을 읽으려 노력하는 것만 같았다. 아는 단어고 아는 문장이고 그런데 다 이어 보면 도저히 해석을 할 수 없었다.

[그러려고 고백한 건가요? 차 한잔 마시자, 영화 한번 보자 하는 노력도 없이. 곧 새해이니까 지난 마음은 어디다 처박으려고?]

왜냐하면, 고요히 분노마저 억누르는 듯한 저 목소리가 또박또박 묻는 내용이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말이었으니까.

아민은 생각해 왔다. 이런 상황은 로맨스 소설에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마음과 마음이 엇갈리는 일 같은 건 현실에서 있을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좋아했어요, 예요? 좋아해요, 예요?]

이 상황을 다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민은 상우의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해요.”

자신이 아는 사실밖에 말할 수 없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저 혼자예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일 년 내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이따금 새어 나오기만 하던 눈물이 왈칵 넘쳐흘렀다.

“어떡해, 너무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제가 상우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상우 씨는 모를 거예요.”

하고 나자 이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 보호를 위해 이 마음을 곧 정리할 것이라느니 하는 군더더기 말을 제외한 아민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아민은 두서없이 말했다. ‘되게 좋아해요. 좋아하는데요. 웃을 때 소년 같으신 거 아세요? 진짜 정말 매력적이세요, 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실제로 하려고 준비했던 말은 다 잊었다. 방금 한 말을 다시 해 보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이다.

[…….]

술에 취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횡설수설했는데 휴대전화 너머에선 아무 말이 없다.

하고픈 말을 다 마치고 나자 아민은 저질렀단 생각이 들었다. 행주로 훔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을 엎지른 것 같았다. 마치 강물이나 다름없는 양의 감정을.

[아민 씨.]

그러자 상우가 아민의 이름을 불렀다.

“네.”

[우리 내일 밥 먹을래요?]

아민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내일 저녁에 아민 씨 시간 되면. 나도 아민 씨 좋아했어요.]

“…….”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들을 이야기는 더 많고. 전화로는 안 되겠고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직나직 밥 먹자고 말했다. 그것도 단둘이서. 앞서 한 이야기는 너무 거대해서 소화되지도 않고 그저 밥 먹자는 얘기만 귀에 박혔다.

[내일…….]

거기서 뭐라 하겠는가?

“시간 돼요! 시간 돼요! 밥 먹어요!”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아민은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아주 짧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민이 마치 소년 같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사랑에 빠졌던 그런 웃음소리였다.

[그럼 내일 봐요.]

아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뭐라 대답했다. 아마 내일 꼭 보자, 밥 먹자,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상우가 한 차례 더 웃고는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나도 아민 씨 좋아해요. 그러니까 내일 다른 소리 말고 방금 했던 이 얘기만 해요.]

그리 웃을 얘기도 아니었는데. 전화를 끊은 뒤 아민은 멍, 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통화기록을 보면 그와 삼십여 분 통화를 했다는 건 확실했다.

‘나 리플리 증후군은 아니겠지?’

확실했지만 상상력이 풍부했으므로 아민은 불안했다.

‘내가 이런 미래를 상상한 적이 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아민도 자신이 상상한 바를 완전히 진실로 믿어 버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상우 씨도 나를 좋아한다고 마음 한구석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

불안감이 들 때마다 아민은 자신이 한 말, 그리고 상우가 한 말을 되새기며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녹음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면 피부가 푸석푸석해질 것이고 그 피부는 아무리 공을 들여도 화장을 퉤 하고 뱉어 낼 터였다.

하지만 정말로 한 시간 전 한 통화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일까?

두 시간 전…… 세 시간 전…… 했던 통화가?

“…….”

아민은 꼴딱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있잖아.’

아침이 되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침대 위에 맞으며 아민은 퀭한 눈으로 생각했다.

‘밥을 먹으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지?’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날 아침도 점심도 먹지 못했다. 물 한 모금이 제대로 안 넘어갔다. 분명히 통화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약속 장소도 시간도 정해진 게 없다.

역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로맨스 소설 독자들이 가장 싫어할 ‘앗 XX 꿈’ 스토리가 아닐까? 점심쯤 아민은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것을 각오하고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약속 장소로 혹시 여기 어떠세요?]

연달아 여섯 개의 식사 장소 링크를 보낸 것은 좀 질척거리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걱정이 될 무렵 읽었다는 표시와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찾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려야 할까 생각하던 차였어요. 오늘 저녁 7시 괜찮으세요? 그즈음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장소는 보내 주신 곳 모두 맛있어 보이네요, 혹시 가장 먹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

일단 어제 밥 먹자고 약속한 것은 머릿속 망상이 아니라 사실인가 보았다.

그런데 장소라고?

‘아니, 식욕이 없어요…… 식욕이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 아민은 괜찮은 저녁 식사 자리를 고르면서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떠오르는 소개팅 명소였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같이 이동할까요? 사시는 역에서 뵐게요.]

아민은 눈을 깜박깜박 떴다.

‘이걸 어떡하나.’

고백을 한 것은 자신인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던 이 관계에 라이터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건 자신인데, 불구덩이 한가운데서 지금 정신이 없다.

‘죽겠다…….’

아민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자지 않았는데 졸리지 않고, 먹지 않았는데 배고프지도 않고, 그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살 수가 없었다.

***

그리고 대망(待望)의 7시…….

‘살려 줘.’

아민은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숨은 쉬는데 사는 것도 아닌, 뭐 도무지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옷은 어떻게 입고, 또 화장은 어찌했는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한 한껏 꾸미는 데 두 시간이 걸린 이 마당에 휴대전화만 쥐고 있는데 상우 씨가 역시 이 약속을 취소할 것 같고 그랬다.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건 차라리 취소하면 ‘아, 역시 그럼 그렇지.’ 하고 이보다는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저 지금 역이에요 나오실래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흐아악……!”

메시지를 확인한 아민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으로 삐걱대며 걸어가니 상우 씨가 코트를 입은 채 차 옆에 서 있었다. 아민을 보더니 웃었다.

“안녕하세요.”

예의 그 미소였다. 아민은 뭐라고 말했더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 잡아 보니 이미 차 안이었다. 차 시트는 따뜻하고 안은 훈기가 가득했다. 달콤한 체리 향기.

“배고프세요?”

아민의 눈에 상우는 그리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긴장한 건 자신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배가 안 고파요.”

아민은 이실직고했다. 진실을 얘기하자면 지금 크림파스타를 먹었다간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 상우가 조수석에 앉은 아민을 살짝 곁눈질하더니 미소 지었다.

“잘됐다.”

‘뭐가 잘됐지?’

뭐가 잘됐는지 모르겠다.

“사실 저도 지금 배가 안 고프거든요, 어제부터 그랬어요.”

상우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 근처에서 술 한잔할래요?”

“네!”

아민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술이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술이라도 마시면 이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긴장감에서 벗어나려던 게 문제였을까?

“왜요?”

약 한 시간 후 아민이 테이블에 맥주잔을 쾅 하고 내려놓으며 상우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왜요?”

상우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해도 모자라건만 긴장감이 풀려도 너무 풀린 모양이었다.

“나 마음에 들었다면서 왜 소개팅 시켜 줬는데?”

아민은 절규했다.

“왜요― 왜요옥!”

상우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아민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마음에 있는 여자 소개팅을 시켜 주느냔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그 말이 맞지만 이런 반응까지 보일 일이 아니다.

“…….”

그러니까 아민은 상우가 배고프냐 물었던 순간 그냥 배가 고프다고, 레스토랑에 가자고 말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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