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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고백해서 혼내 줍시다-16화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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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의 마음이 짐작되는 지금 아민이 원하는 건 별게 아니다. 일주일 한 번 만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수다를 떨고 가끔 식사를 하고 또 아주 드물게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상우 씨한테 좋은 사람이 나타나겠지.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를 위해 주말을 쓰게 될 테고 아주 자연히 자신의 짝사랑도 끝날 터였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시한부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도 잃는 것이 두렵다니 이상한 일이다.

아민은 상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핸들을 쥐고 있는 단정한 손가락에 시선이 끌렸다. 저 손가락에 반했었나 고민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가 저 손가락을 잃는데도 그를 사랑할 것 같았다.

“…….”

대체 이 사람이 뭐라고 그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민은 결국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아민은 맥주 네 캔을 샀다. 집에 도착해선 씻을 생각도 않고 식탁에 앉아 불 꺼진 부엌에서 한 캔씩 천천히 차례대로 비웠다.

“…….”

솔직해야 할 순간에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한테 실망했다. 무척.

남들이 연애하고 있으니 연애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연애하려고 적당한 상대를 선택한 게 아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면 말이다.

아민은 오래도록 외로워하며 생각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그 사람을 놓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아민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우의 말대로 그는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모임에 나오지 않는 날이 길어졌다. 십일월은 얼굴도 보지 못했고 십이월이 되었다. 모두가 바빠 모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어느 날 글을 읽고 발표하는데 어떤 사람의 글이 아민의 마음을 쿡 하고 건드렸다. 그 사람은 수필에 가까운 단편 소설의 도입부를 발표했다.

함께 일을 하던 거래처 직원을 짝사랑하던 여자가 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직원에게 고백하는 글이었다.

「내가 시작한 마음이지만 상대방이 끝내 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이라는 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상대방에게 주어 버린 마음은 더 그렇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 내 손을 떠난 뒤부터 그 물건은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마음 또한 누군가에게 주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그의 것이다.

되돌려 받으려면 상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쿡 하고 건드리다 뿐인가,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글을 쓴 모임원은 얼마 전에 회사에서 퇴직했다. 글을 쓰고 싶어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요즘엔 글만 쓴다고 했다. 글을 쓰는 기분이 너무 좋다고,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모임 후 식사 자리에서 그녀가 말했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뭐 하세요? 괜찮으시면 점심부터 저녁까지 그냥 글만 쓰는 모임이라도 열어 주세요. 저 정말 한가해요.”

아민은 그러겠다 답하고 모임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실제로 있던 얘기세요?”

모임원은 아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민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짝사랑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저 안 좋아해요. 벗어나고 싶어요.”

모임원들이 모두 아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전 고백은 엄두도 못 내겠어요. 사실은 이미 그분이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건 아민 씨가 덜 사랑해서 그래요.”

그녀가 단언했다.

“진짜 힘들고 죽을 것 같으면 하게 되어 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끌고 들어가듯이요.”

“…….”

“거절당해 본 거나 마찬가지라는 건 거절당해 보진 않았단 거죠?”

그 말에 아민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맞다.

실제로 거절당한 건 아니다. 그냥 다가갈 때마다 자연스레 상우 씨 쪽에서 밀어냈다.

‘나는 내 마음을 선물로 준 걸까?’

그래서 혼자 정리하려 해 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이기적이더라도 할 수 없어요. 상대의 손을 빌려야 해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고백하는 일이 이기적이라는 걸 아는데, 모임원이 식사 자리에서 한 말이 아민을 사로잡았다.

‘내가 두 손이 불구인데 코가 질질 나오면 뭐 어떻게 해요.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코를 풀어야지요.’

상우의 손을 빌려서라도 이 답보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열흘쯤 전이었다. 카페에 앉아 일을 하는데 ‘오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더더군다나 크리스마스를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아민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남의 손으로 코를 풀자. 그게 설령 상우 씨 손이 되더라도.’

아민은 오늘 실연당하고 마음 정리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부터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아민은 카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그녀가 본 바로는 상우는 고백을 받더라도 고백을 한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훈장이라도 되듯 남한테 자랑할 사람 같진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긴장감이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민은 우선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언니는 받았다.

[나 이제 곧 스케줄 들어가는데 왜?]

“언니, 내일 오지?”

[어.]

“그럼 나랑 술 먹자.”

[왜?]

아민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빈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앓았다.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아무튼, 어? 언니는 안 마셔도 되니까.”

[알았어. 우선 조금 있다가 통화하자.]

언니가 전화를 끊었다.

미루고 미뤘는데 이제 할 일이 없었다. 그한테 전화를 거는 것밖에는.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9시 반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잘지도 모르고, 밤이 너무 늦었고…….’

자기합리화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정말 고백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당연했다. 누가 대체 차일 줄 아는 고백을 하고 싶겠는가? 모든 게 잃는 게 당연한 도박이었다.

“아흐…….”

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지지부진한 짝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민은 휴대전화를 쥐고 갈등했다.

“해 보자.”

전화를 건 시간은 열 시 무렵이었다. 아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화음이 세 번 울리고 나면 끊자. 끊고 나중에라도 왜 전화했는지 연락이 오면 잘못 걸었다고 말하자.’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전화를 걸 용기가 날 것만 같았다.

아민은 속으로 그가 전화를 받으면 할 말을 외워 보았다. 고백할 말을 생각하는 건 로맨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대사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완벽할 때까지 머릿속에서 수정하고 수정했다.

상우의 대답도 예상했다. 어느 영화에 나오는,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마법사처럼 약 14,000만 개 정도 경우의 수를 예상했던 것 같다.

사실 그 미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란 점에서 모두가 비슷비슷했다. 가장 좋게는 고맙지만 미안하다고 하거나, 가장 나쁘게는 화를 내거나 했다.

물론 그 완벽한 대사와 예상은 상우가 수화음이 채 한 번을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순간 저장하지 않고 X 커서를 눌러 버린 원고처럼 아민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예, 이 밤에 무슨 일이세요, 아민 씨?]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으…… 어흐…… 그게…… 아…… 아, 이렇게 빨리 받으실 줄 모르고……”

그 순간 아민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예?]

“하…… 허…… 그게…… 허으…….”

어흐, 어흐, 하는 신음일지 절규일지 모르는 소리만 한참 나왔다. 차가운 폭포수 밑에서 득도를 위해 소리를 내는 소리꾼이 이런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망했다!’

고백도 하기 전에 망조의 기운이 들었다.

아민은 차라리 상우가 끊어 주기를 바랐지만 상우는 끈질길 만큼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자 상황을 모르는 상우가 아민을 위로했다.

[저 지금 편한 상태예요. 아민 씨, 괜찮아요. 무슨 말이든 해도 돼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으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든 들을게요.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까, 이리도 편안한 것일까 하고 아민은 생각했다.

하기야 상우로서는 그녀가 고백도 하지 않고 곁에서 맴돌며 집적거렸으니 얼마나 귀찮았을까, 오히려 고백을 거절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제가요.”

그리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가 상우 씨 많이 좋아해요.”

[…….]

“올해가 가기 전에 고백하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지켜봐 왔는데 정말 매력적이신 분이세요. 모임에서 사람 안 만난다고 하셨고 그걸 아는데도 정말 좋아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알아요, 탈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만약 저 보기 불편하시면 제가 나갈게요. 지금 전화한 것도 그냥 마음 정리하려고 그런 거예요.”

이쯤 되면 고맙다고도, 그러나 미안하다고도 대답이 들려올 법한데 말이 없다.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아 아민은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가 끊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

아민은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예.”

[저를요……?]

한참 뒤 상우가 말했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난 목소리 같은데?’

[지금 제게 전화하신 게 맞으신가요?]

“네……?”

그다음부터 벌어지는 상황은 아민이 예상한 14,000만 개의 미래에 그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았다.

[아니면 전화를 잘못 걸었나요?]

상우의 목소리는 당황스러움도 당황스러움이었으나 묘한 분노가 섞여 있어 아민은 당황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어땠던가. 대체 내 무엇을 알고 좋아하는 건가 싶은 사람이 그녀에게 고백했을 때 아민도 실은 비슷한 감정을 겪었다. 당황스럽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역시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

“예, 맞는데요. 상우 씨 맞으시잖아요…….”

휴대전화 너머에선 또 한참 아무 말이 들려 오지 않았다.

아민은 완전히 쭈글쭈글해졌다. 상우가 갑작스러운 고백에 화가 났나 해서. 이성적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호감은 품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상우에게 자신은 그조차도 아닌 듯했다.

[혹시 지금 옆에 누가 있나요? 모임 술자리예요? 술 마셨어요?]

그런데 또 들려오는 질문이 기상천외했다.

“예?”

[아민 씨, 지금 절 놀리는 거예요?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요? 그래요?]

아니……. 아민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은…….’

원치 않은 고백을 받았다고 하지만 자신을 얼마나 인성 파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아민은 눈이 뜨거워져 소매로 쓱쓱 비볐다.

“아닌데요, 진짜 좋아해요……. 그게, 좋아해 달라는 게 아니라, 뭘 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매력적인 분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요.”

[…….]

“내가 좋아하니까 사귀자, 차 마시자, 영화 보자 그런 게 아니라, 말이라도요……. 말은 할 수 있잖아요…….”

또 한참 말이 없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

[…….]

“……이제 정리할 거예요. 불편하게 안 해 드릴게요.”

아민도 할 말이 더 이상 없었다. 생각나지 않았다…….

항간에는 이런 소리가 있다.

고백해서 혼내주자, 하는.

‘이제 마무리하자.’

하지만 혼난 건 자신이었다.

‘빨리 전화 끊고 울자.’

너덜너덜해진 정신으로 ‘그동안 정말 좋았고 감사했습니다’라고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쥐어 짜냈는데 상우는 아민이 그걸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럼 고백을 왜 하나요?]

따지듯 묻는 어투는 아니었으나 아민은 이제 그로기 상태였다.

[차도 마실 게 아니고 사귈 것도 아니라면? 내가 매력적이라는 거 과거예요? 고백만 하고 끝인 거예요?]

“아니요, 이제 정말 정리하려고요…….”

아민은 울고 싶은 걸 넘어, 이제 정말 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너무 무례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요.”

아민은 너덜너덜해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데 왜 이러는 것인가? 문답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

상우는 지금 화를 내거나 다그치거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아민이 답답할 뿐이지.

“…….”

상우는 마음을 다스려 보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을 빙빙 돌기를 반복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묻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술을 마셔 취하거나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니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제게 원하는 게 뭐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현실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상우는 갑갑해 제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완전히 끌러 내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차인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보다 더 무례하고도 명확한 거절이 있을까. 아민 씨는 제 고백을 아예 듣지 않은 셈 쳤다. 대답을 주지 않는 게 바로 대답이었다.

간신히 마음 정리 중이었다.

사교 모임 같은 것, 더 이상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고.

“저더러 지금 아민 씨를 차 달라는 건가요?”

누굴 만날 생각조차 들지 않고, 그저 일에 파묻혀 있었다.

“그래요?”

묻는데, 아민 씨는 여전히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고, 상우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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