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민한텐 주사랄까 버릇이랄까 술에 아주 많이 취하면 취하는 자세가 있었다. 취한 걸 숨기는 일, 아무리 취해도 취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적장이 쏜 화살에 맞아 읊조렸던 유언처럼 집에 들어갈 때까진 최대한 말짱하게 굴었다.
털썩.
그리고 현관 바닥에 신발을 갖다 대자마자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쓰러졌다. 이렇게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멀쩡하게 집에 돌아왔으니 산란기 연어에 버금가는 귀소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따뜻한 이불과 포근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는 방까지는 결국 당도할 수 없었다.
현관 바닥에서 스멀스멀 냉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환하게 거실과 현관을 채우고 나서야 아민은 현관 타일에 붙였던 뺨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엣취……!”
감기 기운과 함께 머리를 깨부술 것 같은 숙취가 올라왔다.
“우욱……!”
아민은 정신이 들자마자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비행 스케줄 때문에 언니가 집에 없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아민은 변기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고해성사하듯 배 속의 모든 것을 변기에 토해 내기 시작했다.
“우웨엑……!”
아민은 무신론자였지만 머리가 어질거리고 딱 죽겠다 싶은 것이 지금 여기가 지옥인가 싶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테니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제발 절 구해 달라는 기도를 그 누구에게든 동서남북에 대고 절하며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빈이 미국 비행 스케줄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며 집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의 난장판이 아니라 화장실 밖에 삐져나와 있는 동생의 두 다리였다. 그것도 찢어진 스타킹에 감싸인 두 다리 말이다.
“아민아?”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녀는 강도라도 들어 동생이 죽었는지 알았다. 아빈은 얼른 하이힐을 벗고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살려 줘……. 언니.”
변기 속에 뱃가죽이 뒤집힐 지경으로 아래위로 토해 낸 아민은 구세주의 등장에 아빈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 병원에 좀 데려가 줘, 응? 제발, 죽을 것 같아…….”
“이게 무슨 일이야?”
아빈은 코를 감싸 쥐었다. 화장실 안은 깨끗했지만 아민이 봉두난발로 바닥에 누워 있었고 이 술꾼한테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지금 너 수발할 군번이니?”
아민은 소파에 누워 이온 음료를 마시며 웅얼거렸다.
“미안.”
“아니, 술도 안 좋아하는 애가 왜 이렇게 마셨어?”
그런 날이 있다, 술이 잘 받는 날 말이다.
“다리는 왜 깨져 있고?”
화장실에 널브려져 있는 동생을 겨우겨우 부축해 씻게 할 때 알았는데 한쪽 다리로 무슨 짓을 했는지 피투성이였다.
“굴렀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기억 안 나는 애가 꼴에 음료수는 왜 잔뜩 사 들고 들어왔어?”
“이거 언니가 사 온 거 아냐?”
아빈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민은 이온 음료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기야 겨우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언니가 속이라도 풀라며 줬을 때부터 반은 비워져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먼저 먹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
노려본다고 해서 이온 음료가 입을 열 리 없다. 대체 언제 어디서 넘어졌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민은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굴리려 노력하며 눈을 가늘게 떠 보았다. 그동안 술을 마시며 필름이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르겠다. 나 누가 밀었나?”
그러니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민의 기억은 뒤로 갈수록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는데, 주된 기억은 주로 바 안이었다. 그날 아민은 처음부터 많이 마셨다.
예쁜 의상도 준비했는데 상우 씨가 참석하지 않은 모임이었다.
왜 여지도 주지 않았는데 기대했을까? 아민은 그즈음 답보상태인 이 상황이 무척 답답했다.
받지도 않겠다는데 준 마음을 회수하지 못하여 쩔쩔매는 가을이었다. 모임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상우 씨는 없었다.
‘그래, 상우 씨도 오지 않는 마당에 나도 요즘 답답해서 술도 먹고 싶었고, 오늘 머리 풀고 달리자!’ 하는 마당에 난데없이 상우 씨가 나타났던 장면이 가장 선명했다.
그때 아민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
아주아주 많이 취해 있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아민은 창백해졌다.
“왜? 토할 것 같아? 죽은 나중에 먹어?”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짓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았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할리갈리 보드게임을 하다가 상우 씨의 손등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사이코패스처럼 웃던 기억이었다.
‘허…….’
그 밖에도 많다. 넝쿨을 잡으면 호박이 주르르 딸려 올라오는 것처럼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의 무의식에서 의식 속으로 딸려 올라왔다.
마피아 게임의 변형 형식인 보드게임을 하다 상우 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부르며 ‘오빠, 저 아시잖아요, 저 아니라고요, 맹세하는 데 아니에요, 저 지금까지 오래 봐 오셨잖아요? 절 못 믿으시겠어요?’라고 했던 일들, 하지만 그때 아민은 범인이 맞았다.
일 년간 쌓아 왔던 신뢰가 무너지기는 그렇게 쉬웠다.
대체 왜 그렇게 게임에서 이기고 싶었던가?
‘상금이 있던 것도 아니고 왜?’
범인이 밝혀질 때 흠칫하던 상우 씨의 표정이 왜 이렇게 가슴에 박히는지 몰랐다. 아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었으면.’
그렇게 이기고 싶었던가? 이긴 상이라고 해 봤자 진 사람에게 술 한 잔 마시게 하는 것이 다였는데? 게다가 이긴 보람도 없이 스스로 많이 마셨다.
아민은 이제껏 자신이 그리도 호승심이 심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 술기운이 그녀가 모르는 그녀를 이 세상에 풀어놓았던 모양이었다.
상우 씨도 있던 그때 말이다.
“아민아, 죽 끓여 말아? 왜? 또 토할 것 같아?”
아마 상우에게 알게 모르게 분노가 있었나 보다. 굉장히 비합리적인 분노였지만 어쨌든 쌓인 것이 있었고 그게 게임을 통해 표출된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면 했다. 필름이 끊기기 전 마지막 장면은 누군가와 걷다 넘어지다 걷다 넘어지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옆에 있는 게 누구였는진 확실하지 않았다.
상우 씨는 잘 들어갔을까, 회사에서 바로 왔다고 했으니 대리기사를 불렀겠지.
아민은 혹시 어제 제가 실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오히려 잊었던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었다.
아민은 그날 오후 동호회 전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어제 다들 잘 들어가셨나요? 전 잘 들어갔어요. 그런데 제가 어제 너무 취해서 도로에서 앞구르기 같은 것을 했나 봐요. 무릎이 좀 까져 있네요. 제가 어제 혹시 무슨 실례를 저지르진 않았을까요?]
무릎이 좀 까진 정도가 아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앞구르기를 했는지 뒤구르기를 했는지, 아니면 공중제비라도 시도한 것인지 발목과 무릎에선 아직도 피가 철철 흐르는 데다 움직이며 굽혀졌다 펴지는 부분이라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퍼지는 통증이 장난이 아니었다. 혹시 다리를 잘라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다.
[어제 아민 님 계속 넘어지셨어요!]
[두 번 쿵]
다행히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주로 집 가는 방향이 같아 함께 걸어가는 멤버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걸었나 보다 안심하는 동시에 아민은 제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었고 그 일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많이 다치셨나요?]
[아니에요! 일어나 보니 그래서요. 이제 다 생각나네요! 제가 원래 길 걷다가 잘 넘어져요.]
실제로는 생각나지 않았다. 모임 후에 가끔 술을 먹는 걸 제외하곤 좋아하지 않아 입도 대지 않던 술이었지만 아민은 경각심이 들었다.
[생각나시는 것 맞죠?]
[안 나시는 것 같은데~]
그날 함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녀를 놀렸다.
[아니에요, 밤공기의 느낌까지 다 기억나는걸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일기 쓰려고요.]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이라는 걸 아민이 알 리가 없었다. 아민은 휴대전화를 러그 위로 내던졌다.
“…….”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아, 왜 이렇게 마셨는데……!’
처음부터 상우가 왔었더라면 이성을 유지했을 것이다.
“왜? 또 토할 것 같아? 화장실 갈래?”
아민은 그날 하루 일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숙취에 시달렸다. 집 근처 로고가 찍혀 있는 편의점 봉투에 든 이온 음료 세 병은 그날 다 먹었다.
***개인소장 존잼보장
다리의 상처는 두 군데였는데 생각보다 심했다. 상처엔 딱지가 앉았다가 움직임에 벌어져 다시 까지기를 반복했다. 통증과 열감도 오래 지속되어 이 주는 하던 운동을 쉬어야 했을 정도였다.
상우와는 십일월에 단 한 번 만났다.
정말 단 한 번. 혹시나 하고 열어 본 영화 벙에서였나.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바빠서요.”
무척 바쁜 시기라고 했다. 아민은 아직 핼러윈에 대한 불안이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마음이 졸아붙다 못해 까맣게 탔다. 사실 그날 상우에게 뭔가 실수한 것이 아닐까 메신저로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고민하다 괜히 불티 키우고 화를 돋우게 될 것 같아 지우기를 한참 반복했었다.
이제야 겨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저 혹시 저번 모임 때 제가 마음 상하게 하거나 실수한 게 있었을까요?”
상우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갸웃했다.
“그게, 사실 그날 일이 드문드문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혹시 제가 뭐 실수한 게 있을까 해서…….”
“아직도 시월 이야기를 하세요?”
상우는 하하 웃었다. 그러곤 어째서인지 아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었어요. 괜찮아요.”
그날 영화는 뭐 적당히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상우는 모임원 모두를 차로 태워 주었다.
“한 해가 이렇게 가네요.”
그러면서 말했다.
“아쉬워요.”
앞으로 쭉 바쁠 거라고, 내년 초 감사 시즌에 내달 송년회도 겹칠 테니 어쩌면 한동안 못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아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지금 이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만이 있는 차 안에 남녀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류가 차오르고 있는 것은 자신만 느끼고 있는 걸까, 생각하며 아민은 신발에 감싸인 발을 꼼지락거렸다. 뒷좌석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민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상우는 모를 것이다.
아민은 지금 기로에 서 있었다. 기로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다.
상우 씨가 또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지금, 이때야말로…….
“…….”
되든 되지 않든 제 마음을 부딪쳐 봐야 하지 않나, 하고.
그럴 생각으로 나올 자리는 아니었으나, 갑자기 아민을 사로잡은 생각은 아니었다. 지극히 충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거듭 생각해 온 것이었다.
고백이라도 해 보자.
왜냐하면 이런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올 수도 있으므로.
‘대체 난 뭘 두려워하는 걸까?’
거창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운명이 사람을 시험하는 순간이 있다.
‘그에게 거절당하는 걸까?’
아민에겐 바로 이때였다.
‘아니면 그가 내게 아무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받은 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이 끝나는 걸 지켜보는 것일까.’
상우가 제게 마음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미친 짓인 건 분명한데, 미친 짓을 하지 않으면 이 답보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대로이면 적어도 친분은, 지금 이 거리만큼은 유지할 수 있었다.
단둘이서는 아니더라도 가끔 영화를 보고 글 이야기를 하고 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민은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제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나는 이게 무서운 거야.’
그 순간 알았다. 바로 지금 이 관계를 잃는 걸 아민은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