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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연말 사이 즐길 거리가 하나쯤 있으면 좋잖아요. 크리스마스에야 모임을 연다 해도 다들 송년회다 뭐다 바빠 참석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때는 모임장님도 나오실 거예요. 작년에도 한 번 해 봤는데 즐거웠고요.”
제 말대로 아민은 즐거워 보였다.
“재미있는 이벤트도 몇 가지 할 건데, 모임장님께서 기획하신 거라 아직 저도 몰라요. 그날은 모임 끝나고 술자리도 가질 예정이니 시간 괜찮으시면 참여해 주세요.”
그 말이 이 자리에 모인 모임원 전체에게 향하는 말인 줄은 알았지만, 하도 즐거워 보여서 상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민은 아이 같았다.
“그리고 핼러윈 이벤트이니만큼 드레스코드도 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책 속의 등장인물로 변신해서 오는 거예요!”
원하는 의상을 자유롭게 입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상우로선 민망하고 낯뜨거운 일인데 아민은 까르르 웃었다.
“아민 씨도 입고 올 거예요?”
“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입겠어요.”
“뭐 하실 건데요.”
“그걸 지금 알려 주면 어떡해요?”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된다.
“힌트라도 주세요.”
“안 돼요.”
저가 휘두르는지도 모르는 상대방한테 미련이 흘러넘쳐서는 곤란하다.
상우는 알았다. 자신은 앞으로 시간이 영원히 남았다 믿는 이십 대가 아니며, 한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허송세월할 수만은 없음을.
“장소를 예약해야 하니까 참석 의사를 일주일 전에 밝혀 주세요.”
날짜는 평일인 금요일 밤이었다.
상우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이 바쁘다. 핼러윈이라니, 이보다 십 년은 젊었을 적에도 그런 것은 챙긴 적이 없었다. 그의 주말이 언제나 한가한 것만은 아니었다. 평일은 더더욱 그렇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꾸준히 시간을 쏟아 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견물생심이라고, 계속 어른거리는데 탐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지. 마음을 접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거야.’
정말로 모임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당일.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책 속의 등장인물로 변신해서 오는 거예요!’
‘주책맞아.’
당일이 되자 아민 씨가 무슨 복장을 하고 올지 왜 이러나 이해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궁금했다.
아민 씨는 저가 오지 않아 보았자, 살짝 섭섭해하고 말 것임을 알았지만, 아니 섭섭해하지 않을지조차 모르지, 그랬지만…….
그리고 그 즐거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제 자신을 탓할 것 같았다. 그것도 꽤 오래.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가 즐거우려니 생각하니, 속이 또 뒤틀렸다.
그는 일을 하다 말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샷을 몇 잔이나 부었는데 전혀 쓰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제 마음의 농도가 더 짙어서일 터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요즘 그는 그녀와 얘기하는 사람은 여자라도 질투하고 있었다. 제 속마음이 대체 어느 정도로 너덜너덜한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저열한…….’
참석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그런 식으로 당일이 되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늦게 술자리에라도 참석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럼요!]
동호회의 채팅창에 메시지를 적어 넣자 금방 답이 왔는데 아민 씨였다.
“퇴근할게요.”
그는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일은 산더미였는데, 때로는 일을 제때 처리하기 위해 주말 출근도 불사하던 그가 그날 할 일을 다음 주로 미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소는 건물 삼 층에 위치한 작은 바였다. 들어가니 북적북적하고 아는 얼굴도 많았지만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 한편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삼십 대에서 사십 대로 보이는 남녀가 춤추고 있었다.
재즈가 흘러나왔다.
“저분들 춤 동호회 회원분이세요! 오늘 이 바가 문을 닫는 날이라 주인분과 친분이 있으신 분들이 오셔서 춤을 추시는 거래요.”
문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인사를 생략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민 씨?”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오셔서 기뻐요!”
아민 씨였다. 상우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 손에 술잔을 든 그녀는 이미 발갛게 취해 보였다.
“대체 뭘 표현하신 거예요?”
“저승사자요!”
이런 날을 빌려 혹시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복장으로 나타나면 어떡하나, 이걸 기대라 해야 하는지 걱정이라고 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왔는데 검은 옷에 갓을 목에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땋아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예쁘네요.”
무척 아민 씨다워서 상우는 웃었다. 그리고 술자리에 섞여 들었다.
“아, 지금 저기서 보드게임 하거든요. 재미있는데 저랑 다음 판부터 참여하실래요?”
“술 먼저 주문할게요. 어디서 하면 돼요?”
그날 모임은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다. 다들 이 밤을 연장하고 싶은 듯이 보였다.
술이 계속해서 오고 갔고 상우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아민 씨가, 그러지 않으려 해도 계속해서 의식되었다.
취해 보였다.
즐거워도 보였다.
“아, 전 걸을래요. 밤바람 맞고 싶어요.”
자리를 파한 것은 새벽 4시가 가까워서였다. 차도 이미 끊겼다. 24시간 하는 카페서 수다를 떨다가 첫차를 기다리겠다는 무리가 아민을 먼저 유혹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상우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기사님 부르실 거죠?”
“술자리에 참석할 거라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요.”
직장에서 곧장 차를 끌고 왔고 그 차는 지금 지하 주차장에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민이 반쯤 감긴 눈을 크게 한 번 뜨더니 막 좋아했다.
“그럼 같이 걸으실래요?”
아무리 가까워도 택시를 타야 하는 거리인데 왜 권했는지 몰랐다. 취했기 때문이겠지.
함께 밤 속을 통과하여 집으로 가는 무리에 섞여 그는 걸었다. 집까지 걸으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걸 알면서도, 아민 씨는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었다.
“행복해요. 올해 통틀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맞다, 상우도 아민 씨가 그리도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옷은 두루마기 같은 것인 줄 알았더니 허리끈으로 몸을 휘감은 천을 덮은 랩 스커트였다.
검은 구두, 얇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는데, 그날 아민 씨는 한 세 번은 엎어졌다. 참, 물가에 놓아둔 아이 같다.
“괜찮으세요?”
나중엔 또 넘어질까 봐 팔뚝을 쥐어야 했다. 가느다랗다.
“아,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안 마셔도 잘 엎어져요.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지, 아민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인사하며 제 집으로 떠나갔다. 둘만 남았다.
“뭐라도 좀 마시고 들어갈래요? 이온 음료 같은 거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취했네.’
둘이 남았을 때 상우는 아민을 벤치에 앉혔다. 술이 조금이라도 깨었을 때 돌려보내고 싶다.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코트를 벗어 덮어 놓고 상우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이온 음료와 물을 사 가지고 돌아오니, 그래도 이제 가을이 깊어 가는데, 그래서 추울 텐데, 아민은 그가 덮어 준 코트를 반쯤 바닥에 흘린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은 어디 갔는지 없다. 버렸을까?
“마실래요?”
상우는 코트를 주워 아민의 어깨에 다시 걸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까 넘어질 때 꽤 소리가 크게 났던 것 같은데, 다리여서 보여 달라고 하기가 민망하다. 아민은 음료를 먹고 좀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집 여기 근처죠.”
“바로 옆이에요. 감사합니다.”
비교적 멀쩡해진 얼굴로 아민은 상우가 주는 이온 음료를 받아 마셨다.
“어떻게 가세요?”
“여기서 택시 타려고요. 역이니까요.”
“그럼 택시 잡힐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민의 말에 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밤이 깊었는데요. 아민 씨 계속 눈도 감기고. 들어가요. 택시 탄 다음에 아민 씨 혼자 집 갈 생각하면 그게 더 걱정이 돼요.”
그 말에 아민이 앗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눈에만 그런가.’
상우는 생각했다. 내 눈에만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그리고 지금, 이렇게 고백하고 싶을 일인가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후회할 일임을 안다. 때와 장소 모두 좋지 않다. 그런데 지금 벤치에 앉은 아민은 너무도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상우는 그녀의 눈빛에 홀리듯 빠져들었다.
“…….”
시간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느낌을 상우는 받았다.
바로 이런 순간이다.
자기 자신을 미친 척 던져 버릴 수 있는 순간은.
이 순간은 쉬이 오지 않으며, 사람을 시험한다.
루비콘강으로 향하는 주사위를 던질지 말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침묵이 흘렀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잘 들어가요.”
아민이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것을 상우는 배웅했다.
택시는 쉬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며 ‘그때’를 놓친 걸 후회했다. 목젖에 걸린 말이 있었다. 턱 끝까지 걸렸던 말이 그를 괴롭혔다.
그 말은 그를 괴롭히다 못해, 결국은 왈칵 제 마음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상우는 걸으며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제 말이 아민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면서도 휴대전화를 누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제 손가락이 제 손가락 같지 않았다. 좋은 때가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제대로 제 마음을 표현하려면 이렇게 술을 마셨을 때도,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아민 씨, 저예요. 상우예요.”
진심을 의심받을 것이라고. 저의에 오해를 살 것이라고. 안다. 아는데.
아는데도 이 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실은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벤치에서 해야 했는데 못한 말이었어요.”
전화 연결음이 끊기고 아민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말했다.
아민 씨가 귀엽다.
“좋아해요.”
아민 씨가 너무 사랑스럽다.
뚝.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
그는 오랫동안 캄캄해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쥐어 짜낸 용기였다.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고백은 검은 밤, 수챗구멍 속에 흘러 들어가는 물처럼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졌다.
상우는 걸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새하얗게, 새하얗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