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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히려 아민 씨에겐 자신이 전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또한 이제는 정말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그의 마음속 하나뿐인 방에 아민이 단단히 자리 잡게 되었으니 이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말 좋으신 분이셨어요, 다만 음, 뭐랄까, 저와 취미가 맞는 점이 없어서요.’
소개팅에 나온 상대방을 거절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친구의 어느 부분이 그녀와 맞지 않았을까, 놀랄 정도로 안심하면서도 상우는 더 캐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체 당신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참, 너무 예쁘고 대단한 사람이니, 혼자도 자족할 것 같은 사람이니, 어쩌면 그녀를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없을지도 몰랐다.
아민은 하하, 하고 웃고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우의 소개팅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그때 상우 씨도 소개팅 받기로 하셨잖아요? 잘되셨나요?’ 하고 자연스럽게 나올 만한 주제인데도.
얼떨결에 받게 된 소개팅, 반은 아민의 반응을 떠보려 수락한 것이었다. 나서는 마음가짐이 애초에 좋지 못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그 말이 적절했다. 상황이 그러니 눈앞에 앉은 사람이 제아무리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더라도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자신의 마음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고, 그 방의 열쇠를 주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웃으며 ‘안녕’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소개팅, 아민 씨가 했을 그 소개팅, 상대방이 바뀌는 해프닝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하하 웃고는 지금처럼 식사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음식이 맛있었다. 그래서 실례이고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더더욱 아민이 그의 앞에 앉았으면 했다.
소개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왜 이렇게 마음이 시린지, 여름인데도, 그는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날 밤 전화가 걸려 왔다. 주선자였다.
[아, 형님,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제 생각에는 그 애가 긴장을 해서 그렇지 보다 보면 진짜 괜찮거든요.]
흠잡을 곳이 없는 분이었다. 다만 제 마음이 비지 않은 것뿐이지. 그러나 그 말을 어찌 하겠는가, 소개팅을 받은 것 자체가 실수였단 생각을 하며 상우는 제 마음을 알렸다.
“정말 좋으신 분이었어. 매력적이었고. 다만 지금은 내가 아직 누군가를 만날 때가 아닌 것 같아.”
때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완전히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너도 아는 분이야.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자신은 대체 무엇이 떳떳하지 못한 것일까? 만일 그 이유가 아니라면 단순히 겁쟁이인 것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이 애 아민 씨한테 관심이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든 건, 후회의 씁쓸함에 못 이겨 담배를 태우던 중의 일이다.
‘그래서 나한테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게 아닐까?’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아민과 자신의 미묘한 관계만 신경을 쓰느라 의식하지 못했다. 가끔 제 레일을 침범해 들어오는 경쟁자에 신경이 쓰이면서도.
그는 담뱃재를 털었다.
‘참 나, 내가 뭐라고.’
그리고 제 생각을 말도 되지 않는 일로 치부했다.
모임 자체는 좋았다, 좋았으니까, 계속 나왔다. 아민 씨는 대부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모세요?”
몇 대나 가지고 있던 적도 있지만 가장 아끼는 것을 빼곤 팔았다. 가까운 거리는 날씨만 좋으면 몰고 다닌다. 차고에만 넣어 두기는 아까우니까, 그런데도 동호회 모임 때마다 굳이 차를 끌고 나오는 것은…….
“그냥 가끔요.”
솔직히 말하면 흑심이었다. 누군가를 태우고 이동하고 싶다는. 아민이 없을 때 그는 종종 제 애마를 몰았다.
몇 주 뒤 그에게 소개팅을 시켜 주었던 모임원이 채팅방에 탈퇴 의사를 밝혔다. 그만큼이나 자주 나오던 회원이었고 모임에 나가지 않고도 굳이 탈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 이상 이 모임에 있을 수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직 준비라는데 정말일까, 왜 이런 것이 궁금한 걸까.
마음을 정리하기로 한 마당에.
상우는 넌지시, 아주 넌지시, 아민에게 물어보았다.
“친하셨잖아요. 이직 준비한다고 혹시 먼저 말하던가요?”
아민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하하, 웃으며 난색을 표했다.
“네, 준비할 것도 많아서 바빠질 것 같다고, 집중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탈퇴할 줄은 몰랐는데요.”
“섭섭하시겠어요.”
아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설령 함께 걷다 사이가 틀어졌거나 고백이라도 받았다 한들, 그런 걸 말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우리가 그런 걸 말할 사인가.’
상우는 좀 씁쓸해졌다.
“집, 같은 방향인데 태워 드릴까요.”
그래도 좋은 점은 있었다. 드디어 차를 끌고 나온 의미가 있었다는 것. 아민은 어색해하며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예의 바르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공간이 차여서 그런 건지 아닌지 단둘이 있을 때 아민은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상우는 생각했다.
‘내 눈에만 그런가.’
아닌 것 같았다. 요즘 이상하게 아민 씨가 예뻐지고 있었다. 정말로, 객관적으로도.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지만, 옷도 나날이 여성스러워지는 것 같고 기분 탓일까, 화사해졌다.
‘예쁘네.’
오밀조밀한 손톱 위로 예쁘게 내려앉은 그림들이 반짝반짝한 것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언젠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손톱은 그냥 짧게 깎아요. 네일을 입히면 숨을 못 쉬는 느낌도 들고 조금만 길러도 타자 치는 데 방해가 되더라고요. 노트북 자판에 걸려서 자판이 상하기도 하고요. 의외로 그런 일이 있다니까요?’
아민이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잘 다듬어진 손톱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려 애써 전방을 주시하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 사람이 혹시 나타난 건 아닐까?’
순간, 아랫입술을 질근 물 정도로 배가 아팠다.
질투심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남이 무얼 가지거나 한다고 해도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순간 배가 뒤틀렸다.
왜냐면 아민 씨는 단 한 명뿐이니까.
자신이 아는 아민 씨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아민 씨와 만나는 건 일주일 중 단 하루이고 그조차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애초에 서로 만나자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겸사겸사. 그뿐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예뻐졌을까? 무슨 연유로 자신을 꾸미게 된 것일까? 불편함을 감수해 가면서?
“빈말이 아니라 요즘 아민 씨 예뻐진 것 같아요. 연애하시는 것처럼.”
떠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아민 씨는 손바닥 안에서 흐르는 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칭찬도 질문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모임장이나 다른 운영진은 보이지 않고 그녀만 보였다. 둘 혹은 셋이서 하던 일을 혼자 하려니 그녀는 사소한 일에 허둥지둥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모임이 끝난 뒤 모임원들이 입을 모아 오늘 한잔하고 싶은 분위기라고 말할 때, 장소나 메뉴를 정하거나 하는 것들.
이 동네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동호회를 꾸려 보기도 했던 그가 도움을 주었다.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하하…… 제가 결정 장애가 있나 봐요. 맛있고 사람 많이 들어갈 만한 장소도 잘 모르고. 정말 감사해요.”
“원래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거죠. 저도 이 동호회의 일원이니 도움을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고마워하는 아민에게 상우는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요즘 모임장님이 나오시질 않으시네요. 다른 분들도요.”
“아…….”
아민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 난색을 표했다.
“다들 바쁘셔서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신 분도 계시고 일이 너무 바빠서 주말 출근하는 분도 계시고, 또…… 음.”
한참을 망설이기에 무슨 이야기인가 했다.
“상우 씨만 알고 계세요. 모임장님 올해 말에 결혼하세요. 그래서 그 준비 때문에 주말은 거의 나오시지 못하시나 봐요.”
아민이 속삭였다.
“결혼이요?”
“네, 사귀시던 분과요. 얼마 전엔 청첩장도 받았어요, 준비가 막바지니까요.”
상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쨌든요.”
그러는 사이 차는 그녀의 집 근처라는 역에 도착했다. 내리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감사해요. 많이 의지해요. 그럼 잘 가세요.”
상우는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참.”
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로 나아갔다. 상우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기대하게나 하지 말지.’
만약 아민이 뒤라도 돌아본다면, 차창 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 주는 상상을 했다. 기대는 바람결에 이는 파도처럼 무심코 일어났다, 실망을 안기고 부서지며 가라앉았다.
다시 고요한 마음이 되길 바라는데 자꾸만 이런 순간들이 그를 괴롭혔다.
접었던 마음이 바람결 같은 기대에 자꾸만 펼쳐지는 가을이었다. 사람은 바람 한 자락의 방향조차 바꾸지 못한다. 그런데 마음은 오죽할까, 동호회 모임에선 이벤트 행사가 하나 열렸다.
핼러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