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생각해 보면 많은 신호가 있었다. 아민이 그냥 그 신호들을 흘려 버렸을 뿐이다.
우선은 같이, 집이 같은 방향인 사람들과 같이 걷기도 했지만, 결국은 단둘이 남아 얘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아민은 이야기에 그렇구나, 그렇구나 맞장구를 잘 치는 편이었다. 원래 성격도 성격이지만 콜센터에서 얻은 직업병 덕도 있었다. 고객님 말씀 안 끊고 잘 들어 주는 것 말이다.
‘아이고, 날씨 좋다. 여름 되니까 미세먼지도 싹 사라졌네.’
걷는 것도 무척 좋았다. 버스 정거장으로 두 정거장, 산책 혹은 운동 삼아 딱 좋은 거리감이었다. 걷다가 하는 이야기는 무척 길어져 여름 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일도 잦았다. 아민은 고민상담인 줄 알았다.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집에 들어가 자기도 그렇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상대는 자주 어딘가 들어가 무엇인가를 권했는데 그것도 먹자니까 먹었다. 먹기만 하면 미안하니까 지갑을 열기도 했다. 번갈아 가며 말이다.
‘단거 되게 좋아하네.’
이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었지.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제가 동네 친구가 없어서, 나중에 시간 괜찮을 때 밥 한번 먹어요.’
번호는 알려 주었다. 못 알려 줄 게 없었으니까. 가끔 밥 먹자는 연락은 모두 거절했다. 친목 지양인 동호회의 회칙도 회칙이거니와,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 매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1기 모임 폭파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한 사람이 많은 사람한테 여지를 주어 일어난 일이 아니던가?
‘아, 이 사람 나 좋아했구나.’
상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눈치가 참 없었지.
아민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새삼 자신에게 고백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이 잘 통했다. 걷는 길이 즐겁지 않았던 건 아니다. 20여 분은 걸리는 길인데 말하다 보면 어느새 집 앞이었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네가 지금 너무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래. 못 오를 나무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언니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너 마음 없다는 사람한테 매달리지 말고 너 좋다는 사람 있으면 눈 딱 감고 만나 봐. 하자가 있거나 정말 싫지 않으면 말이야.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일이라고 치면, 너 오래 휴직한 거잖아. 원하는 데서는 널 받아 주지 않는대고, 그럼 어째야겠어? 조금 네가 원하는 바를 포기하고 줄여서라도 싱글의 고리를 끊어 내야 하지 않겠어?’
아민은 망설였다.
‘그 상태가 좋다면 괜찮은 거지만, 평생 혼자 살 게 아니라면 말이야. 시작이라도 해 봐. 소개팅도 하고 예쁘게 꾸며도 보고. 너 좋다는 사람 있으면 단호하게 거절하지 말고.’
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
“후……”
집에 돌아온 아민은 현관 근처에 가방을 던지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씻을 힘이 없었다.
‘이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고백은 거절했다. 담백하게, 그래도 자신을 좋아해 준 마음을 고마워하면서, 사실을 말했다.
‘제가 실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고백하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지만 그걸 거절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마음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인데.’
아민은 배에 두 손을 얹고 언니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 일은 숨겨야겠다.’
말한다면 엄청나게 잔소리할 것이다. 아민은 소파에서 뒹굴뒹굴했다.
‘참 어려운 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아주 예전에야 부모가 정해 주는 사람과 결혼했다 쳐도,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연애를 하는 건지, 사랑을 하는 일이 아주 희박한 확률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도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은 자신을 좋아한다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모든 마음이 열매를 맺는 건 아니지.’
오늘 일과는 별개로 아민은 누군가를 만나려 노력해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까지 운명적인 만남만을 그렸다. 너무 소극적이었다.
‘예쁘게 꾸미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당장 내일이라도 우연히 운명적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하늘에서 누군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치켜들 수는 없다.
확률이 희박하다면 높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그냥, 나 좋아해 주면 안 되나.’
방금 전 똑같은 상황이었던 사람의 마음을 거절해 놓고 자신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니. 안 되는 것도 아는데 잠긴 대문을 앞에 두고도 미련이 철철 넘쳐흘렀다.
그런데 이 일련의 사건들과 별개로 그동안 정말 꾸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늘을 나는 새들조차 구애 시기에는 깃이 더 선명해지고 발정기가 되면 수고양이들은 목숨을 걸고 세력 싸움에 나선다.
새 옷을 사지 않은 것도 7년째였다. 전이라면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생활비를 충당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돈도 벌고 있고 얼마든지 자신을 가꿀 시간도 있었는데 왜 아무렇게나 웃자라는 들풀처럼 자신을 버려두었을까?
“잘 생각했다.”
해외에서 며칠을 보내고 돌아온 언니는 피곤할 법도 한데, 옷 사는 데 같이 가 달라는 동생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너 진짜 유행 지난 옷들도 다 버리고 그래야 해. 아무리 사이즈가 맞아도 그렇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대학생 때 옷을 입고 있어?”
사실 아빈은 아민의 옷장을 통째로 갖다 버리고 싶었다. 옷이 터지지 않는 한 아민은 버릴 생각을 않는다. 근검해서일까? 아니다. 옷 사는 걸 귀찮아해서다.
“오늘 나온 김에 머리도 좀 자르고, 끝이 다 상했잖아. 이게 뭐니?”
“…….”
“네일 검사 하는 직업도 아니니까 손톱도 다듬고, 화장품도 사자.”
“나 화장품은 있는데…….”
“유통기한 다 지난 거?”
“…….”
누군가를 꾸미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것도 제 돈도 들이지 않고 말이다.
‘집에 가면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너 속눈썹 연장은 해 봤니?”
“…….”
“오늘은 날이 아니고 내가 하는 곳으로 예약해 줄게.”
아빈은 신이 났다.
***
그러고도 몇 주 뒤의 일이다.
‘앗……. 아이구…….’
그녀한테 고백했던 모임원이 결국 동호회를 탈퇴했다. 예감은 하고 있었다. 잘 나오던 사람이 그때부터 발걸음이 뚝 멎었기에.
동호회를 탈퇴하기 전에 이직 준비를 위해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짤막하게 적어 놓았는데, 어쩌면 그 이유가 맞을 수도 있다.
모임원들이 이직 성공하시기를 바란다는 글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는 상우도 끼어 있었다.
“친하셨잖아요. 이직 준비한다고 혹시 먼저 말하던가요?”
상우가 물었을 때 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할 것도 많아서 바빠질 것 같다고, 집중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탈퇴할 줄은 몰랐는데요.”
“섭섭하시겠어요.”
상우가 말했다.
‘뭐가?’
아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혹시 그가 상우한테 뭐 고민이라도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내심 걱정되었다. 소개팅도 시켜 줄 정도면 친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
아민은 문득 씁쓸해졌다.
***
이걸 새옹지마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임원이 미묘한 죄책감을 남기고 떠난 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변화가 생겼다.
“집, 같은 방향인데 태워 드릴까요.”
일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마음 정리하려는 이때에!
“…….”
거절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만 더 전이라면 이게 웬 떡이냐 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아민은 그의 차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
‘달콤한 향기.’
방향제에서는 민트 향이 났다. 어울리고, 상큼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처음 탄 날은 정신이 없었는데, 할 말도 생각이 안 나니 차 안은 조용했다. 걸어서는 이십 분 거리가 차로는 오 분이었다. 차인 것을 감안해도 너무 짧다.
그 후로 상우는 가끔 차를 태워 주었는데, 혼자 타는 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 주로 말을 하는 것은 상우였다.
“그렇게 무더웠는데 날이 선선해졌네요.”
그런 말을 들은 날 어느새 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요즘 카디건을 입는다. 아민은 무의식중 제 카디건을 쓰다듬었다.
“연애하세요?”
그러고 상우의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요즘 아민 씨 예뻐진 것 같아요. 연애하시는 것처럼.”
“…….”
“옷도 예쁘게 입으시고, 머리색도 바뀌신 것 같고요.”
아민은 그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할 만큼 발끈했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
사람은 자기가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찌나 잔인한지.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예쁘면 네가 데려가든가.’
제 마음이 한때 그를 향했다는 걸 알면서.
알고 있으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양가적인 의미로.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겨우 한 대답이 참 멋도 없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니가 100L짜리 쓰레기봉투를 꺼내더니 그녀의 옷을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버렸다. 화장품도 기초만 제외하곤 마찬가지였다. 아민은 당황했다.
“나 그럼 뭐 입고 사니?”
아민이 소리를 빽 질렀다.
“너 살 때까지 내 거 빌려줄게. 면세점에서 쟁여 놓은 화장품도 너 줄게. 많아.”
“싫어!”
“다 새거야. 누가 헌 거 빌려 준대니?”
“아니, 받는 건 괜찮은데 버리는 게 문제인 거야. 다 잘 입는 옷이라니까!”
“내 말이 그거야! 그게 문제라고!”
결국은 합의하여 절반만 버리기로 했다. 아민은 며칠 뒤 팔자에도 없는 네일아트에 속눈썹 연장술까지 받았다.
하고 나니 제 얼굴과 내외하게 되었다. 예쁜 건 모르겠고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예뻐졌는가? 하면 모르겠다. 그래도 간간이 모임원에게 ‘요즘 화사해지셨어요’ 하는 말을 듣긴 했는데, 상우에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 염색도 했다. 갈색으로 오랜만에.
그 노력이 상우의 눈에도 보이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좋아해야 하는 것일까.
“…….”
아니다.
아민은 오히려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깨달음이…… 왔다.
‘그렇구나.’
예뻐진다면 그가 날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었다 하면 거짓말이야.
그러나 어떤가?
조금 꾸민다든가 예뻐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귀걸이를 하면 몇 배, 다이어트를 하면 또 몇 배, 머리를 기르면 또 몇 배 예뻐진다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0에 무엇을 보태어 곱해도 0은 0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