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아민도 아빈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같은 사건도 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달리 비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민이 실은 철옹성이라는 것. 아민은 장장 칠 년간 제 주변을 벽돌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쌓아 올려 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다. 아민은 모른다.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만 더 드러내 보였어도 상우는 아마 두근거렸을 것이다. 설렜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이런 모임에선 누구 안 만나려고요.’
이미 내뱉었던 말과 결심쯤이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지지부진하고 골치 아팠던 전 연애에 지친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어디 결심을 끝까지 지키기가 쉬운가? 그런 다짐들이 모두 성공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상우가 혹시 이 사람이 나한테 마음이 있나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이번 휴가는 코타키나발루로 가려고요. 가야 섬에서 스킨스쿠버 체험을 할 생각이에요.”
그건 모임 전에 다섯 사람이 모여 여름 휴가를 어디로 가나 이야기를 하던 와중이었다.
상우는 조금 이른 제 여름 휴가 계획을 꺼내며, 시선을 노트북에 파묻고 있는 아민을 바라보았다. 아민은 일을 하다가도 가끔 제가 끼어들 만한 주제에 말을 보태곤 했다.
늘 일이 있고, 바쁜 것 같았다.
‘음…… 내 휴가 계획에는 관심이 없나?’
“아민 씨는 어디 안 가세요? 시간 내기 편하시잖아요.”
“아…… 저요?”
모임원의 말에 아민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응, 글쎄요. 이 일 하게 된 이후로 어째서인지 어딜 못 가게 되네요.”
상우는 질문을 던진 모임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찬찬히 살피게 된 이후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아민은 인기가 많았다.
“우선 이 일만 끝나면, 끝나면 하다 보니 벌써 삼 년이에요. 그런데 지금 하는 이 일 끝나면 정말 국내라도 다녀오려고요.”
“국내 여행도 괜찮죠. 부산 좋아하세요? 제가 잘 아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여자들과도 친했지만 그보다 더, 남자들한테.
‘…….’
지금만 해도 그렇다. 모임 시작 한 시간 전인데 자신을 포함한 남자 네 명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주말에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이 빈둥빈둥하게 된다는 핑계를 대고.
그중 상우가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신경이 가장 많이 쓰이는 사람은 그녀와 집 방향이 같아 자주 같이 걷게 되는 모임원이었다.
친해 보였다, 유독.
‘흠…….’
동호회를 운영해 보았고, 그곳에서 연애도 해 보았으니 안다. 사람들이 동호회에 가입해 모임에 출석하듯 나오는 이유가 그저 주말을 충일감 있게 보내고 싶어서 뿐만은 아니라는걸. 어쩌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는 것을.
그도 그러했다. 상우는 한참 아민과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아민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와 무척 친밀했다. 오히려 가장 친밀하지 못한 사람은 상우 같았다.
친절하지만, 그뿐이다. 조금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아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상우 씨는 코타키나발루 언제 가세요?”
“저는 휴가가 이른 편이라 다음 주 목요일에 다녀올 것 같아요. 다음 모임은 참석 못 하겠네요.”
“모임보다 휴가가 훨씬 재미있겠죠.”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아민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저도 코타키나발루 가 보고 싶네요. 저 바다 좋아해요. 스킨스쿠버도 해 보고 싶고요.”
아민이 마치 어필이라도 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해 본 적은 없는데, 여름마다 수영도 하고요. 바닷속은 정말 아름다울 거 같아요. 시간의 흐름이 금방 잊힌다는데. 정말로 그런가요?”
같이 가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면, 너무 김칫국을 마시는 것일까.
‘그냥 이런 성격인가?’
이런 점이 아민 씨를 인기 있게 하는 걸까, 상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민 씨도 이번 일만 끝나면 꼭 쉬세요. 맛있는 것도 드시고 여행도 가시고요.”
“아, 맞다. 저 형님 전화번호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유독 살갑게 구는 남자 한 명이 말했다. 못 줄 것도 없어서 상우는 웃으며 내미는 휴대전화를 받았다.
아민 씨가 계속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이긴 하지만, 상우는 이 동호회가 마음에 들었다. 둘은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했다.
다시 휴대전화를 받아 쥔 상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민과 눈이 마주쳤다.
“……?”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싶어, 그는 눈으로 웃었다. 그러자 아민이 뭔가 말을 할까, 하더니, 그냥 마주 대고 웃어 버렸다.
그날 모임의 글쓰기 제시어는, 「인간」「★」「은평구」였다.
아민은 별에 대한 글을 썼다. 정확히는, 천문학자와 헤어진 여자의 시선으로 별을 바라보며 쓴 글이었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금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천문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별과 별 사이의 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라고.」
헤어지고 난 뒤 여자는 한국, 서울, 은평구의 어느 동네에 남고, 남자는 스웨덴으로 떠난 모양이었다.
「1광년, 빛의 속도로 일 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우리가 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떨어져 보았자 겨우 지구인데,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로 거리를 계산하는 천문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오히려 너무도 딱 달라붙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천문학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자 했다. 우리는 한 몸에서 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보다 더할 수 없이 딱 달라붙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보다, 상우가 궁금했던 것은, 혹시, 잊을 수 없는 사랑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밤하늘에 검은 별이 있다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너를 검은 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고, 달이 떠 있을 때는 네 몸이 검어 보이지 않는다고.」
‘꽤 오래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하는 얘기로 들어 보니 아민 씨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상우는 궁금했다.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 다시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을까?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사서함에 수북하게 쌓인 공과금 용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 일인가.’
상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 허아민이에요. 상우 씨 혹시 괜찮으시면 휴대전화 번호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동호회 어플을 통해 메시지가 조금의 간격을 두고 재차 또 떠올랐다.
[아까 번호 교환하실 때 저도 번호 받고 싶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혹시 좀 어려우실까요?]
상우는 공과금 용지를 한 손에 쥔 채 메시지를 한참을 보고 있었다.
[혹시 마음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제 번호는 ○○○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비밀 메시지로 온 연락이었다.
두근,
순간 상우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 이 사람한테 진짜 관심 있구나.’
은근히 느끼고 있던 제 마음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상우는 손안의 휴대전화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 사람도 나한테 관심이 있나?’
손을 놀려 휴대전화 번호를 보내 주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좀 더 긴 글을 쓰고 싶었다. 남몰래, 친해지고 싶었다.
상우는 집에 들어와 아일랜드 식탁에 용지들을 내려놓고 한참 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흠칫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거절할까 봐 걱정이셨다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연락처를 물어봐 주신 덕분에 조금 더 저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연락처를 알게 된 점 또한 기쁘고요.
오늘 대화도 참 재미있었어요. 매번 주말에도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만 보는데 이번 일 끝나시면 가까운 곳이라도 꼭 여행 다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연락처를 저장하니 자연히 메신저에 그녀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프로필 배경화면은 카페로 보이는 공간에서 커피 한 잔을 찍은 사진이었다.
상우는 하고 싶은 말을 보냈다.
[오늘 모임에서 쓰신 글도 정말 좋았고요. 어떻게 그런 글을 쓰시는지 모르겠어요.]
첫 연락에서 너무 주절주절하는 것 같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계속 생각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뒤 답장이 왔다. 아주 조금이었는데, 그 간격이 상우에겐 천 년같이 느껴졌다.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개인정보를 여쭤보는 것이라 조심스러웠네요.
그럼 여행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끝이었다.
푸쉬쉬―
머리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제 착각일까?
“…….”
그리고 상우의 얼굴은 점차 목부터 머리까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혼자서 발가벗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운영진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오래 나올 만한 모임원들의 연락처를 수집하는지도 몰랐다.
상우는 식탁 의자에 앉아 눈을 비볐다. 혼자서 너무 흥분한 것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걱정이 되셨다 하니 조마조마하신 것 같아 장문으로 답장을 드렸네요. 그럼 다음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식탁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놓은 뒤 상우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백색이기만 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상우는, 실망했다. 생각보다도 더 깊고 길게.
드르륵.
화면이 꺼져 있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 회사도, 오늘 연락처를 주고받은 모임원도, 아민 씨도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에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
“…….”
때는 밤이었다. 상우는 눈살을 찌푸리다 휴대전화를 껐다.
***
[영화 벙 합니다 (영화 전 저녁 식사)]
얼마 뒤 모임에서 영화 벙이 열렸다. 아민 씨가 연 것인데 그가 넌지시 보고 싶다 운을 띄웠던 영화였다. 한번 실망했음에도 속절없이 마음이 설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참석 의사를 밝히자 몇 분 뒤였나, 아민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 거기 앉으실래요? 좌석은 I13이에요.]
상우는 좌석을 살펴보았다. 시간 때문인지 관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I열은 13부터 시작해서 꽉 차 있었다. 아민이 말한 빈칸만 제외하고는.
상우는 예매를 하려다 멈칫했다. 혹시, 또…… 아민이 연락처를 물어보았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될 것 같았다.
‘괜히 마음만 들키게 되는 게 아닐까.’
발가벗겨진 기분, 혼자 착각하게 되는 듯한 기분. 상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원래 앉는 지정 좌석이 있어서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예매를 해 놨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반대편 가장자리를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아민이 영화를 보는 중에 옆 사람을 툭툭 건드리며 소곤소곤 말을 거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더라도 그 자리에 예매했을 것이다.
그날 퇴근 전에 일이 들어와 한참 바빴다.
[일이 생겨서 저녁은 먹지 못하고 영화만 보고 가야겠네요.]
동호회 회원들과의 저녁 식사를 취소해야 했는데, 의외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째서인지 아민을 제외하고 참석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모두 남자다.
흑심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도착하니 간신히 영화를 보기 직전이었다. 영화관 앞에서 무엇을 얘기하는지 즐겁게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아민이 그를 보자 말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오셨네요, 그럼 이제 영화 보러 들어갈까요?”
어쩐지 그 미소가 전보다 사무적으로 느껴졌던 건 착각이었겠지만, 상우는 섭섭했다. 저도 모르게.
영화는 재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멀리서 힐긋 바라보았을 때, 저 끝에서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아민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자주 집에 가는 길을 동행하던 모임원이 앉아 있었다. 친해 보였다.
영화관에선 반듯하게 영화만 보고 조금이라도 누군가 소리를 내면 눈살을 찌푸리는데, 어째서인지 아민과 함께 앉았어야 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의문이 퍼뜩 떠올랐다.
‘나와 함께 가까이서,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옆자리를 권했던 것이 아닐까? 개인 메신저로?’
영화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고, 한번 생각의 물꼬가 그런 식으로 트이니 정신이 없기만 했다.
“영화 정말 재미있었어요.”
“역시 연기가 정말 대단했네요, 두 시간 내내 점점 머리가 앞으로 나가는데요.”
“저 아민 씨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요.”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민은 곁의 사람들과 재잘재잘했다.
‘오늘 같이 가실래요? 차 가져왔는데 같은 방향인 분들은 모두 태워 드릴게요.’
아민의 집이 가장 그의 집과 가깝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녀와 가장 집이 가까운 모임원을 내려 주고도 아민과 조금 더 단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상우 님은 차 가지고 오셨지요? 주차장으로 내려가시려면 엘리베이터 타야겠어요.”
아민이 말하며 영화관과 연결된 통로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주차장과 연결된 직통 엘리베이터였다.
“상우 님 엘리베이터 타는 것 보고 저희는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갈게요.”
상우는 얼떨결에 아민과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넣어졌다.
‘아.’
혹시나 하여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민은 받지 않았다. 상우는 주차장에 내려서 한참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전화가 되걸려 오지 않아 차에 탔다.
‘속이 씁쓸하고…… 짜네.’
아마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듯했다.
‘아민 씨는 나한테 정말 마음이 없구나.’
단 한 톨만큼도.
‘아까 상우 님이라고 했지, 상우 씨가 아니라.’
그의 차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마음이 서늘하여 마치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느껴졌다.
[무슨 일이세요?]
집에 도착하자 문자가 와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다들 태워 드리려 했는데 연락을 받지 않으시더라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잘 들어가셨죠?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영화 보고 나서 감상을 듣지 못해 아쉽네요. 다음 모임에선 들을 수 있겠죠?]
그는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
그러는 사이 완연히 여름이 무르익었다.
상우는 계속해서 모임에 나왔고 아민과 친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을 몇 번이나 더 겪었다. 그중엔, 지금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애매모호한 지점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가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몇 번이나.
하지만 아민은,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꼭 그만큼 멀어지곤 했다. 아마 모든 모임원과 거리를 그만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도로에 있는 모든 주행차량이 안전거리를 유지하듯이.
상우는 아민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모임에 나오게 되니 짧은 토막글이라도 계속해서 쓰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글이란 게 신기하게도, 쓴 사람을 닮는다. 감추려 하면 할수록 뚜렷이 드러난다.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이라도 그렇다.
단편적인 생각들, 사상들, 아민은 계속해서 단편 소설을 썼고, 상우는 아민이 쓴 긴 글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연애소설을 쓴다고 하지 않았나.
이 사람은 어떤 연애관을 갖고 있을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증은 아주 커져 갔다. 아민은 필명으로 작업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필명에 대해 물을 때마다 ‘좀 더 친해지면 말씀드릴게요’ 하는 말로 웃으며 거절했다.
이 정도면 친해지지 않았을까.
어느 날 모임이 끝난 뒤, 뒤풀이 장소로 나란히 걷던 중이었다. 상우는 살짝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저희 친하죠?”
“그럼요.”
아민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희 친하죠.”
“그럼 이젠 글 쓰실 때 쓰는 이름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검색해서 사서 볼게요.”
그 말에 아민은 좀 흠칫했던 것 같다. 곧 아민의 얼굴에 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변변치가 않아서요. 여기에서 쓰는 글과는 결이 다르기도 하고, 독자층이 대부분 여성분이라 정말 재미없으실 거예요.”
상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하. 그런데 휴가를 일찍 쓰셔서 어떡해요? 다들 이제 여름 휴가 가신다는데, 섭섭하시겠어요.”
아민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상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민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고, 거리가 있다. 아마 그 간극은 차간의 안전거리처럼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민이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
여름이 무르익는 동안 전화는 이따금, 그러나 끊이지 않고 걸려 오고 있었다.
“전화하지 마.”
불쑥 제 마음에 들어온 아민 씨로 마음이 어지러운 중에.
“이제 정말 화낼 거야.”
상우는 그날 밤 온 전화에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헤어진 지 한참 전이었다. 미련은 이제 한 톨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그럼 다시는 전화하지 않을게.]
휴대전화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상우는 전화를 끊었고,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는 또 걸려 왔다. 수신차단 된 번호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한 번 더 만나고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었다.
이 상황을 정리하려 만났다 이상하게 얽혔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지금 너 집 앞이야. 기다릴게.]
전화를 끊자 이내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떴다.
“…….”
상우는 휴대전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 카페에서 전 애인을 만났다. 그건 전 애인이 제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이 가슴 아프다거나 그것이 설령 애증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남아서가 아니라, 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었어…….”
전 애인은 그의 손부터 붙잡으려 들었다. 전이라면 그 손에 잡혀 주었을 것이다. 뿌리치더라도 잡아 오는 손의 체온을 결국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니야. 오늘 이 이야기 하려고 나왔어.”
말하면서 그는 눈앞의 사람한테 아무 감정이 일지 않아, 새삼 놀랐다.
“나 지금 좋아하는 분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 애인은 아니겠으나 상우, 자신은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너한테는 돌아갈 수 없어. 이미 모든 게 끝났고 나는 새로 시작하고 있는 중이니까.”
“새로운 분…… 사귀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런데 정말 좋아해. 정말로 괜찮으신 분이야. 그러니까 이제 너에 대한 마음은 없어. 다 정리했어.”
마음의 끝도 시작도 동시였다.
“난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더라.”
전 애인이 바람을 피웠던 것을 들켰을 때, 그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다만 나한테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고. 너에 대한 사랑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새 방에 다른 사람이 잠깐 들어왔던 것이라고. 여전히 네가 차지하는 방이 가장 크고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그 말을 돌려주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기다릴게. 나는 아직 안 끝났어…….”
눈물바람으로 전 애인이 말했다.
“기다리지 마. 설령 되지 않더라도 너한테는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방을 비워.”
그는 목소리가 너무 차갑게 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말했다. 한때 사랑했는데, 이제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냥하게 말할 수 있었다.
“…….”
“잘 지내. 진심이야.”
상우는 망연자실한 전 애인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만남의 짧음을 예상하고 테이크 아웃으로 시킨 커피가 식기 전이었다.
‘나 지금 좋아하는 분 있어.’
아민 씨를 이 상황에 방패 삼은 것이 아니었다. 핑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다. 상우는 숨을 토해 냈고, 제 몸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인정해야겠네.’
후련하기도 했다. 술술 다 말하고 나니 마음이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상대의 마음과 상관없이, 좋아한다.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 아민 씨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이게 또 얼마나 큰일인지, 그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 큰일이었다.
“참……. 이걸 어쩌나.”
산 넘어 더 큰 산이라 하던가. 상우는 커피를 들고 가며 생각했다.
“큰일 났네.”
깨닫고 나니 무심코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