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현 동호회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지난한 사랑을 마쳤다.
짧게 말하자면 싸우고 헤어지고 또 싸우고 헤어지다 결국 좋지 않게 끝을 맺은, 당분간 연애를 하지 말아야지 학을 뗄 정도로 지지부진하고 골치가 아픈 연애였다.
길게 말하긴 싫다. 사유는 애인의 바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동호회에서는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라 보고 놀란 마음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사태는 피하고 싶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사적인 모임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그의 삶이 무척 무료하기 때문이었다.
무료함을 그린다면 바로 그의 삶이 아닐까.
회계법인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의 일은 수많은 숫자를 해석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회사의 평균 매출과 영업이익, 주요고객과 계절별 특성을 따져 자문을 받거나 회계처리가 맞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굉장히 긴장감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의 판단과 계산으로 회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하니 말이다.
상우는 주의 깊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고 있는 일과 정반대되는 취미가 필요하다. 일터에서 만나는 고객과 동료 상사와 후배 말고 색다른 인간관계가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리라 그는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임에서 누군가를 찾지는 말아야지, 그는 다짐했다. 그 누군가와 인연이 끊어질 때, 얽힌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 내야 하기도 한다. 무척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일로 움직이는가.
인수인계 작업이 끝나고 집과 차로 십여 분 정도 떨어진 새 모임 장소로 나왔을 때, 누군가가 미리 약속 장소에 나와 컴퓨터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무척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문득 시선이 마주쳤는데 마치 ‘얼음땡’ 게임에서 풀려나듯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새로 오신 분 맞으시죠? 상우 씨?”
이름을 아는 척해 가며 살뜰히 챙기기에 그는 그녀가 운영진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첫날인데 이상하게 눈이 많이 마주쳤던 기분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웃거나 다른 사람한테 시선을 돌리거나 했다. 관찰당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름은 아민이고, 로맨스 작가라고 했다.
“허아민이에요. 서른셋이고요. 로맨스 작가로 일하고 있어요.”
‘신기하네.’
신기한 직업이었다. 회색빛 도시에 사는 자신으로서는 많이 만나 보지 않았는데, 자기소개를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운이 좋아서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요.”
생각보다 훨씬 동안이었다. 그날 상우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녹아들기보다는 이 모임의 분위기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을 택했다.
아민이 시선의 끝에 자주 걸렸던 이유는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기 때문일까?
그녀는 모임에 오래 자주 온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과 두루 친했다.
동호회 모임이 끝난 뒤 모임장이 그에게 저녁을 권했지만 상우는 거절했다.
“아, 이후에 선약이 있어서요. 정말 아쉽네요.”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다. 모임장 옆에 서 있던 아민이 말했다.
“다음에는 꼭 같이 밥 먹어요. 먹고 싶어요.”
상우는 생각했다.
‘그냥 이런 성격인가?’
가끔 모두를 챙기지 못하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상우는 아민을 내려다보았다. 아민은 어색한 듯 시선을 한 차례 피했다 이내 다시 들어 올렸다.
반짝,
카페의 상부 조명 불빛이 그녀의 검은 동공에 반사되어 순간 반짝 빛났다.
“또 뵈어요.”
“그럼요.”
차를 기다리는 중에 그는 아민과 인사를 한 번 더 나누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식사를 함께할 걸, 잠깐 후회했다. 어차피 집에 가 보았자 텅 빈 냉장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식사를 끝내고, 술이라도 한잔 걸치러 갔을까.
‘음…….’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춰 섰을 때, 상우는 지금이라도 연락을 넣고 차를 돌려 볼까, 생각했다.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 되지 않을까.
그냥 이유는 없었다. 저녁 식사를 무엇으로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뿐이었다.
사람 마음이 어디로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
상우는 그 모임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주말을 그 모임에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달여간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면서도 동호회에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즈음 그의 법인이 대형 상장 회사의 감사인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1월에서 3월까지는 회사의 기말감사가 몰려 바쁜 시즌이기는 하지만, M&A와 관련한 회사 실사 및 가치평가 업무가 겹쳐, 그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감사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그의 팀 전부가 집에 겨우 들러 옷만 갈아입고 나오기도 부지기수였다.
‘참 이렇게 시간이 안 나나.’
시간이 되는 듯싶다가도 되지 않는 날이 이어져 그는 모임 참석 의사를 밝혔다 자주 취소했다. 그리고 모임엔 언제나, 아민 씨가 참석하는 것 같았다.
상우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일만 끝나면…….’
바쁜 업무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웠던 게 그 무렵이던가.
‘우선 바쁜 것만 넘기면…….’
뭐가 초조한 건지 상우는 잘 모르면서도, 이상하게 한 번 본 사람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또 뵈어요.’
‘그럼요.’
딱히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아민은 이미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렸을 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후…….”
짬이 나는 시간에 간신히 발코니로 가 담배를 무는데 얼마 전 결혼한 동료가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도 한 대 주라.”
상우는 담뱃갑을 털어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담배를 입에 문 동료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데 그가 물었다.
“이거만 끝나면, 소개팅할래? 아내 친구가 있는데…….”
“됐어.”
상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동료가 그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아직 못 잊은 거냐?”
“…….”
상우는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모든 게 끝나기 한참 전에 전 애인과의 관계는 끊겨 있었다.
“너 정도면 성격도 좋고…….”
동료가 말했다.
상우는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
일이 좀 끝나 한숨 돌리나 싶었던 찰나, 동호회는 사라져 있었다.
“……?”
상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호회가 사라졌는데 이유는 알 수 없고, 혹시나 싶어 같은 지역의 비슷한 동호회를 모두 뒤져 보았으나 아민은 그 어떤 모임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하…….”
상우는 반은 어이없고, 반은 또 황당하여 휴대전화만 한참 들여다보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냈다.
비슷한 모임은 얼마든지 있다. 아쉬울 만큼 자주 참여했던 동호회도 아니었다.
“이거…… 참 나.”
그런데 물을 한 잔 들이켜면서 상우는 뭐가 이렇게 섭섭하고 어안이 벙벙한지 몰랐다.
로맨스 작가, 한낮부터 오후까지 집과 카페를 오가며 일만 한다는 여자를 그가 어디서 다시 만나겠는가?
일은 한가해져서 다시 정시 퇴근, 주 5일 출근이 가능해졌는데 그는 빈 시간에 피트니트 센터에서 운동을 하거나 바쁠 때 잔뜩 사들인 책만 읽으며 보냈다.
‘어?’
아쉬움에 들락날락하던 동호회 어플리케이션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 것은 사월경의 일이었다. 낯익은 동호회의 모임원 이름에서 그는 아민의 이름부터 찾았다.
***
읽던 책을 챙겨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턱을 괸 아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임 시작 시각 두 시간 전이니 당연하겠지만 맞은편 자리가 비어 있다. 반가움을 숨기며 상우는 아민의 근처로 다가갔다.
“…….”
그리고 아민이 인기척을 눈치챌 때까지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염색기 하나 없는 검은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었는데, 그 때문에 귀와 어깨로 잔머리가 흘러나와 있었다. 머리칼에선 윤기가 곱게 흘러내렸다.
아민은 곧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예요.”
눈을 깜박깜박 뜨기에 상우는 웃었다.
“…….”
“잊어버리셨죠?”
역시 기억 못 할 줄 알았다,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외쳤다.
“반가워요!”
정말 반가워 못 견디겠단 목소리였다.
“일월에 뵈었죠? 정말 반가워요, 반가워요, 상우 씨!”
상우는 자리에 앉았다. 읽을 책은 이미 잊었다.
“왜 그동안 안 나오셨어요?”
“모임이…… 사라져서요?”
그걸 비롯해서 상우는 궁금한 게 참 많았는데 그 말에 아민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요.”
예전에 동호회를 운영하며 온갖 애로사항을 겪어 본 상우는 상황을 짐작했다.
그날, 상우는 모임 후 뒤풀이에도 참석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이런 모임에선 누구 안 만나려고요.’
당시,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다시 시작한 모임엔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하나는 모임의 성격이 글을 읽는 데서 쓰는 데로 변화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민 씨가 동호회의 운영자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감상도 감상이었으나, 짧은 시간 동안 써 내려간 글을 읽는 아민 씨는 무척 반짝거렸다.
‘정말 작가는 작가구나.’
대체 어떻게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는지 믿기지도 않는데, 글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상우의 물음은 절대 공치사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세요.”
그러자 오히려 의아해하는 답이 돌아왔다.
“저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요. 상우 씨가 숫자 놀이 한다고 말하시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을까.
‘책이 나와 있겠지? 읽어 보고 싶은데.’
궁금증이 모르는 새 점차 커져 그의 마음 한구석에 보일 정도로 부피를 차지했다.
그렇게 일 개월, 이 개월, 삼 개월…….
전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운영진이 된 아민은 상우를 살갑게 챙겼다. 그가 생각하기엔, 김칫국을 마시는 것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살가운 것 같았다.
“아민 씨.”
어느 날 상우는 그녀와 함께 길을 걷다 너무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저한테 친절하세요?”
그녀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제가 상우 씨한테 친절하면 안 돼요?”
그날 모임장은 다른 일이 있어 나오지 않아, 그녀만 나온 날이었다.
모임원들과 우르르 걷고 있는데, 상우는 순간, 간절히, 지금 그녀와 단둘이 걸었으면 했다.
때는 오월이었다.
‘제가 상우 씨한테 친절하면 안 돼요?’
누군가가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에 얼마나 많이 영향받는가?
흔들리는가?
그날 밤 어쩐지 상우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를 쳐다보던 까만 눈동자가, 상우를 깊은 상념에 빠뜨렸다.
‘이거, 아민 씨…… 내 눈에만 예쁘나?’
상우는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내게 커 보이는 떡은 당연히도 남의 눈에도 커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서 늑대이고(homo homni lupus)’,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해 오고 있다.
떡은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나만 지금 아민 씨를 마음에 두고 있나?’
이걸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관찰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부분으로 가치평가(Valuation)하는 일은 정말 잘못되었지만, 상우의 눈에 대체 왜 그녀를 다른 사람들이 그냥 놔두었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민은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운 동시에 대단하고 배울 점도 많아 보이는 데다 무척 예쁘다.
‘참, 이 사람이…… 내 눈에만 예쁜가?’
그럴 리가 없었다.
‘대체 왜 지금까지 아민 씨가 혼자일까?’
자신이라면 아마 가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상우는 의아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죠, 필요에 의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는 않죠. 외로움을 달래려거나 결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해서 연애가 하고 싶은 거예요.’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가 되게 분석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닿지가 않아서 연애를 쉰 지 칠 년쯤 된 거 같네요.’
그리고 상우는 자연스럽게 아민이 혼자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민이 아는 이유뿐만 아니라, 아민도 모르는 이유 말이다.
‘그게 아니겠지.’
말로는 연애를 하고 싶다, 하지만 이 친절한 사람은, 실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