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러니까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참 나, 누군 뭐, 호감 좀 있었단 거지. 참. 내가 뭐 짝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아?’
첫 차례 집적거림이 끝나고 난 뒤, 아민은 상우와 심리적 거리를 좀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일 전부가 어쩐지 ‘지금은 좋아요, 하지만 더는 다가오지 마세요’ 하는 경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자신도 관심 없는 누군가가 그녀한테 밥 한 끼 먹자, 영화 한번 보자며 다가올라 치면, 웃는 낯으로 그만 알 수 있게, 그런 식으로 선을 긋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때도 둘은 카페에서 함께 있었다. 상우는 책을 읽고 그녀는 글을 쓰고 있었다. 문득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는지 상우가 물었다.
“소재를 보통 어디에서 얻으세요? 일상에서?”
아민은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일상에서 얻을 일이었으면 벌써 이 일 못 했죠. 정말 판타지 소설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의 경험이 섞이기 마련이겠죠?”
“…….”
워낙 까마득해야 말이지. 아민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연애…… 안 하세요?”
그가 무척 담백하게 물었다.
“상우 씨는요?”
아민은 되묻고는, 제풀에 놀랐다. 상우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곧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연애할 때 됐는데. 인연이 닿는 사람이 없네요.”
이 모임에 들어온 지가 십이월쯤의 일이었으니 오월 하순인 지금, 오 개월가량이 지났다.
“벌써 추석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져요. 아버지가 장가가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그런데 말이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물론 결혼하고 싶지만, 결혼을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해야 하나.”
“맞아요! 그렇죠,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죠.”
아민은 순간 머리에서 반짝 불이 켜지는 듯했다. 정말로 그렇다.
“아민 씨는요?”
상우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민 씨는 요즘 연애 안 하세요?”
하하, 하고 아민은 웃었다. 어쩌다 보니 연애를 안 한 지가…….
“이 일을 하다 보면 좀처럼 사람을 못 만나서요. 그러고 보니, 인연이 닿지가 않아서 연애를 쉰 지 칠 년쯤 된 거 같네요.”
“칠 년이요?”
아민은 순간 헉, 했다. 줄였어야 했던 것일까?
“칠 년이라니…….”
아민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아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자가 있는 게 아니라…….’
집에 돌아와 아민은 괴로워했다.
‘일 년쯤 줄여야 했던 걸까?’
그렇게 놀라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사람은 연애를 쉰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을 접은 것과는 별개로, 상우 씨가 연애는 안 했으면 좋겠다.
‘보통 연애하는 사람들은 주말에 모임 안 나온단 말이야…….’
진짜, 진짜로 안 했으면 좋겠다. 연애하면 어쩐지 짜증 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아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동호회가 새로 시작하면서 운영진들이 전보다 세 명 정도 늘었다. 모두 전 동호회 멤버들이었다.
매주 열리는 모임에 번갈아 가며 참여하고, 가끔 애로사항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어쩌지, 안주도 술도 정말 많이 남았고, 혹시 이 근처에 있는 모임원 있으면 번개라도 한번 열까요?”
모임장의 말에 아민은 귀가 번뜩 뜨였다.
‘여기 근처에 살지 않았나?’
아민의 바람대로 번개를 열자 몇 명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그중 상우가 끼어 있었다.
“혹시 더 드실 거면 자리를 옮길까요?”
그렇게 새로 시작된 모임이 3차까지 갔다. 운영진은 그녀만 남았고 모임원은 네다섯쯤 남았다.
“그런데 아민 씨는 눈이 진짜 높아 보여요.”
남은 것이 모두 솔로인 미혼 남녀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제가 연애로 빠졌다. 아민은, 마음을 포기했다곤 하지만 술을 마시며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는 상우가 무척 의식되었다.
“로맨스 소설도 쓰시고, 일단 아민 씨 예쁘잖아요. 지금까지 연애 못 한 거 다 눈이 높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누가 그녀한테 그 질문을 던졌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제가요? 저 눈 낮아요! 제가 얼마나 눈이 낮은데요!”
아민은 목소리가 자연 커졌던 것 같다. 누구더러 들어 달라고 말이다.
“…….”
맞은편에 있던 상우가 그 말에 고개를 돌리고 아민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민 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지금이다!
아민은 대체 왜 ‘지금이다’라고 생각했는지 몰랐다.
“제 이상형은 키는 커야 되고, 외모는, 저 외모는 잘 안 봐요. 그냥 말이 잘 통하고 제가 조건도 많이 안 따지거든요, 정말 마음만 맞으면……”
아민은 말이 많아졌다. 맞은편에 앉은 상우를 보며 어떻게든, 쉬이 보이면서도, 이상형의 조건에 상우가 들어맞게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상우는 아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돌아가며 이상형에 대해서 말해 볼까요?”
그다음의 일이었다.
“제가 상우 형님 소개팅시켜 드릴까요?”
어떤 눈치 없는 XX가 지상우, 그를 콕 집어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
“제가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얘가 작년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요즘 진짜 외롭다고, 근데 걔가 귀여워요.”
그 눈치 없는 XX는 집 방향이 같아 모임이 끝나고 늘 같이 걷는 XX였다.
‘진짜 이 XX는 눈치가 없으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XX가 없어. XX가.’
아민이 아랫입술이 하얘지도록 꽉 깨물었을 때였다.
“형님, 전화번호 좀 줘 보세요.”
그는 웃으며 그 모임원이 건네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어 제 전화번호를 눌렀다.
‘저 XX…….’
저걸 쳐 맥주잔에 빠뜨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상우가 말했다.
“아민 씨, 소개팅하실래요?”
“네?”
아민은 맥주잔을 입에 기울이다 흠칫했다.
“괜찮은 사람 있는데. 아민 씨한텐 아깝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진국이거든요. 대학 동창이고 친구인데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객관적으로도 참 괜찮아요.”
때는 칠월의 어느 날이었다.
“…….”
어느 남자가 호감 있는 여자한테 소개팅을 권하겠는가?
“……아, 그게.”
“지금 괜찮다고만 하시면 바로 물어볼게요.”
……이거 상황이 첩첩산중이었다.
‘아니…… 지금 소개팅을 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
아민은 눈을 또록또록 굴렸다. 이미 자기 눈 낮다고, 정말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필요하다고 열변을 토한 뒤였다.
“잘됐다. 이참에 소개팅 받아 봐요.”
“이러다 커플 탄생하는 거 아니에요?”
“받아 봐요. 사람을 만나 봐야 기회가 생기는 거지.”
상우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실래요? 소개팅?”
아민은 그의 눈과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이건 제 마음을 모르거나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나더러 마음 정리하라는 거지?’
오히려 자신더러 눈치가 없다고 면박을 주면 주는 거지 말이다. 그가 소개해 주겠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듯 휴대전화로 상대방의 사진까지 들이밀었다.
“이런 분, 어떠세요?”
“괜찮, 네요.”
봐도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잘됐다. 잘됐다.”
상우의 눈빛에 반, 사람들의 부추김에 반 떠밀려 아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독이 든 잔이었으나, 받지 않곤 견딜 도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할게요.”
“정말요?”
“네.”
“그럼 잠시 전화하고 올게요. 연락처 전달해도 괜찮죠?”
상우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화제는 금세 다른 얘기, 여름 더위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졌다.
아민은 젓가락으로 식어 가는 순살 양념치킨을 쿡 하고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더 이상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술맛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겠대요.”
돌아온 그는 상큼하게 웃었다.
“어쩐지 긴장되네요. 아민 씨 예쁘다고 말했는데. 제 친구가 실례를 저지를까 봐.”
‘이씨―’
아민은 그 말에 약이 올랐다.
‘야, 너 보기 예쁘면 네가 사귀어. 네가 사귀라고.’
하지만 이미 수락해 버린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실래요? 소개팅?’
그날 대리기사를 기다리는 그를 끝까지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민은 옆구리를 세게 콱 걷어차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소개팅 정말 하실 거예요?”
집이 근처인 모임원이 물었다.
“……해야죠.”
오랜만의 소개팅인데, 어찌나 풀이 죽는지 몰랐다.
아민은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정말.’
오늘의 일로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졌다.
‘정말 나한테 관심 없구나.’
그런데도 ‘저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가세요, 가세요’ 하는 상우가 차에 타는 것을 기다리다 돌아왔다.
아민은 잘 몰랐지만, 오늘의 일로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녀의 마음이었다.
***
영화 볼 때 옆자리에 앉자고 하니 거절해.
이상형을 말했더니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시켜 줘.
‘아…….’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해 주고 싶었지만, 허아빈은 아주 진한…… 망조를 느꼈다.
“소개팅 잘해 봐.”
해 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 응. 그냥 뭐 이왕 들어온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나 술 좀 더 시켜도 돼?”
“시켜, 시켜.”
“여기 소주 좀 주세요.”
아빈의 말에 아민은 주종을 바꿨다.
***
일주일 후, 아민은 상우가 소개시켜 준 남자와 만남을 가졌는데, 남자는 상우의 말대로 외모도 적당히 괜찮았고 대화도 매끄럽게 잘 이어 나갔고 직업도 정말 좋았다.
“……네, 아, 여행이 취미시구나.”
그런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말이지, 아민은 도저히 흥이 나질 않았다.
‘에휴.’
[정말 좋으신 분이시고 오늘 소개팅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가 누군가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감사하고 아무쪼록 좋으신 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민은 소개팅 상대방한테 헤어지기 전 받았던 애프터에 거절 문자를 보내며 상우에 대한 마음도 고이 나빌레라 접자고 생각했다.
‘하……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내 것이 되지 못한다면 그에 들이는 노력은 시간 낭비가 아닌가?
‘슬프다. 정말. 나 이러다가 연애도 못 하고 죽는 게 아닐까?’
아민은 제 처지가 처량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말인데, 이제 이런 모임에선 누구 안 만나려고요.’
상우가 말했을 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잘, 쉬이 변하는지.
‘소개팅은 잘 하셨을까.’
지금쯤은 헤어졌을까. 친구의 말로는 오늘 저녁에 만나겠다고 했는데.
상우는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시각은 지금 아홉 시, 만약 분위기가 좋았다면 저녁 식사와 차에서 술자리로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는 시각이었다.
술.
술을 마실까, 단둘이서.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
상우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유리컵에 넘칠 정도로 가득 따르고 한 번에 들이켰다.
“…….”
머리가 아팠다. 단번에 차가운 물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 때문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정리했다고 믿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금 마음이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