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이었어요.”
이런 말을 할 장소와 기회가 필요했던지, 상우 씨는 선선히 답했고, 눈앞에 앉은 모임원과 떠들면서도 아민은 그 말에 헉,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이런 모임에선 누구 안 만나려고요.”
업.
그리고 곧장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던 기대가 턱, 하고 바닥에 꽂혔다.
“…….”
아민은 갑자기 흐름을 잃고 멍, 했다. 누군가 그녀한테 물었다.
“아민 씨, 술 더 드실래요? 맥주?”
맥주파이던 그녀는 주종을 바꿨다.
“소맥 마실게요.”
목이 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그날 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아, 취한다.’
아민은 돌아와 얼굴만 겨우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또 보네.’
정말 반가웠는데 제대로 이야기한 것은, 모임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오기까지 한 시간, 또 모임 장소에서 술자리 장소까지 걸으며 나누었던 몇 마디의 말뿐이었다.
‘그런데 모임 전에 무슨 얘기를 했더라?’
묻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묻기보다는 오히려 질문만 받은 것 같았다.
‘갑자기 모임이 사라져 버려서 무슨 일이 있나 했어요.’
‘작가 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좀 자세히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게 쉽지 않은데요.’
그걸 아민 자신으로서의 관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를 워낙 많이 겪었다.
‘궁금하겠지. 신기하잖아.’
독특한 직업이니 그냥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싶었다.
‘하!’
무엇보다…… 안 만나겠다지 않은가, 모임에서, 사람을!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지도 주지 않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모임 몇 번 나왔다고. 자기가 뭐라고 선을 그어?’
아민은 뭐 그와 썸씽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의 말에 굉장히 입안이 썼다.
‘허어…….’
아무래도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신 듯했다.
“우욱.”
아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지.
***
“원래 독서모임 모임장이었다고 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혹시 새 모임 열려고 온 건 아닌가 싶어 눈여겨보고 있었는데요. 거기서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그런 거구나. 하기야 헤어진 마당에 껄끄럽겠죠. 그렇겠죠.”
캐내고 싶진 않았는데, 아민은 아주 자연스럽게 현 모임장을 통해 그의 현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듣게 되었다.
‘모임장이면 모임을 만든 사람일 텐데 그 자리도 내려놓고 다른 모임에 왔을 정도면, 마음의 상처가 깊은 모양이구나.’
아민은 그 말을 들으며 마치 컵 안에 가득 든 얼음이 녹아 미끄러지듯이 심장이…… 철렁했고, 어째서인지 조금 더 실망했다.
‘뭐 인연이 아닌 거겠지.’
아민은 묘한 실망감을 곧 잊어버렸다. 아마 그다음 또 상우 씨가 모임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아민은 그 실망감을 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우 씨는 자주 보였다.
이게 또 견물생심이라고, 어른어른……거린다고 해야 하나. 알짱알짱한다고 해야 하나?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그는 전과 달리, 모임에 자주 나오고 늘 조금 더 모임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그리고 늘 먼저 나와 있는 아민을 보고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삼.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모임 시간까지의 공백 동안 책을 읽었다.
“보통 무슨 책 읽으세요?”
“그냥…… 손에 집히는 거요. 저 취향이 있을 정도로 책 많이 읽지 않아요. 아민 씨 읽는 것에 대면 민망하죠.”
그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아민은 일을 하고 그는 책을 읽는다. 그래도 같이 있다 보면 한두 마디 던지게 되었다.
자연히, 흑심 때문이 아니라 정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아민 씨가 하는 일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전 뭔가를 만드는 일은 못 하거든요. 그냥 숫자놀이나 하죠.”
“겸양이 지나치신 거죠.”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그가 말한 숫자놀이란 것은 기업회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회사원이란 게 틀린 말은 아닌데, 상우 씨는 회계사였고 대형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민 씨만 알고 계세요. 이 일 한다고 하면 세금에 관해서 너무 많은 걸 물어봐서요. 전 세금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아민은 숫자가 가득한 책을 보면 십 분 안에 잠드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세금 같은 것은 집 근처 세무사무소에 모두 맡겨 버렸다. 그리고 오월, 프리랜서 및 자영업자가 세금을 내는 날이 되면 이렇게 많이 내야 하나 뜨악했다.
“제가 보기엔 상우 씨 하는 일이 더 대단해 보이는데요. 제가 쓰는 글이라 봐야 별거 아니고요.”
“무슨 말이에요, 글 쓰는 거 들을 때마다 정말 감탄하는데요. 어떻게 삼십 분 안에 그런 글을 쓰세요?”
겸양이 가득한 대화가 주로 이어졌다. 빈 여백을 채우는,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고, 답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들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상우 씨가 물었다.
“그래도 요즘엔 감사 기간이 끝나서 한가한 편이에요. 그래서 집에서 밀린 영화를 잔뜩 봤어요. 영화 좋아하세요?”
‘헉.’
그때, 왜 ‘기회다’ 생각했을까.
“저도 영화 좋아해요.”
아민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말했다. 다행히, 아주 다행히, 영화를 좋아하긴 했다. 일할 때 말고는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니 예능 프로그램과 영화는 아주 빠삭했다.
어떻게 하면 그 남자와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날 아민은 모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흑심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정당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까마득한 예전이라면, ‘영화 좋아하세요’란 말을 들은 즉시, 요즘 개봉하는 영화를 읊으며 ‘영화 보러 가실래요?’ 하고 말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흑심이 너무 드러나지 않은가? 아민은 역시 상우 씨가 예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이런 모임에선 누구 안 만나려고요.’
영화 보자고 하면,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우고 헉 하면서 뒤로 물러설 것 같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는 안 놀라겠는가?
‘아…….’
침을 한 번 삼키는 일을 의식하면 무척 어렵고 대체 언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처럼, 허아민도 비슷한 상태에 빠졌다.
‘내가 다른 남자들이랑은 어떻게 영화를 봤더라?’
처음부터 산 넘어 산이었다.
‘으아. 난이도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누가 처음부터 사귀자고 했나. 그냥 영화가 보고 싶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어렵나. 아민은 고민에 빠졌다.
***
“그래서 영화 못 봤구나.”
‘아무래도 내 동생은 연애 고자가 된 모양이다.’
치즈볼을 먹으며, 허아빈이 말했다. 동생의 대화에서 영 남자와의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으니 그녀는 이제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아니, 영화 한번 보자고 말하는 것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상대편에서 적극적이지 못한다면 이 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봤어.”
그런데 아민이 말했다.
“봤어?”
언니는 놀랐다. 고개를 끄덕, 하는 아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응……. 봤어. 보긴 봤는데…….”
그다음이 아주 문제였다.
“되게 정중하게 차였어.”
아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눈앞의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참,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