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어느 날 프리랜서가 된 허 작가.
그녀가 사회로의 손을 아예 뻗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다 말을 잊어먹는 게 아닐까?’
작가 1년 차에서 2년 차로 넘어가던 어느 날, 언니가 오지 않는 날이면 하루에 하는 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영수증 버려 주세요’밖에 없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아민은 불안감을 느꼈다.
‘나 이대로 사회란 거대한 무리에서 도태되는 거 아냐?’
연애도 문제였지만, 지금 연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뭐라도 해 보자. 그 김에 별도 따고 님도 보면 더 좋고…….’
매일 밤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는 대신 방 벽을 치며 으아아 울분을 내뱉던 아민에게도 연애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너무 작위적인 만남은…… 싫어. 막 나이트나 클럽에서 만난다거나 선을 본다거나 그런 건 좀…… 낭만적이지가 못해.’
언제 어디선가, 때가 되면 운명의 상대가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
의외로 아민은 운명론자였다.
이걸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밥을 덜 굶어 봐서 그렇지.
아무튼 그녀는 남자가 많은 무리 속으로의 편입을 시도했다. 일하는 시간을 너무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어쩌면 일하는 데도 도움을 줄 만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만한 뭐 그런 곳은 없을까…….
찾고 찾다 보니 도달한 곳이 직장인 동호회였다.
“넌 글 쓰는 애가 독서하는 모임에 들어가고 싶니? 할 거면 운동 같은 걸 해.”
“나 운동 못해. 알잖아.”
“내가 뭘 알아?”
그녀의 언니는 어이없어했지만, 뭐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보단(컴퓨터를 붙잡고 있긴 한데 언니 눈엔 노는 것으로 보였다. 돈을 번다고는 하는데 얼마를 버는지도, 대체 언제 일하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아민은 독서 동호회에 나가게 되었다.
***
‘오랜만에 사람 만나는 거 너무 좋아!’
그녀가 선택한 독서 동호회는 한 권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일, 그리고 가끔의 술자리로 이뤄져 있었는데, 아민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모임에 쉬이 적응했다. 그도 그럴 게 독서가 아닌가?
‘책 읽는 것도 같이하니 재미있네.’
편집자 출신의 작가인 데다 도둑질도 배우면 쓸데가 있다고, 콜센터를 하면서 화술도 꽤 늘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 고급 대화를 하는 데 목도 마른 상태, 아민은 동호회 활동이 즐거웠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좋았고 좋아하는 것이 같다 보니 자연스레 호감도 갔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리고…… 몇 개월쯤 다니다 보니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쉬는 날 같이 책을 읽자는 남자들 말이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이게…… 누군가가 쉽게 좋아지지 않네.’
연애단절이 된 동안 아민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공통의 관심사와 호감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감정은 쌍방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선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연애하기도 쉽지 않네, 내가 허들이 많이 생겼나 봐.’
그뿐인가. 예전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이를테면, 시선이었다.
그 전에는 모든 게 쉬웠던 것 같은데, 누군가와 연애를 하겠다 마음먹으니 아민을 멈칫거리게 많은 수많은 요소가 새로이 보였다.
‘나 이제 연애하면 결혼할지도 모르는구나.’
마지막 연애는 스물넷에 끝났다. 그땐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손잡고 산책만 해도 즐겁던 시절이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연애 상대와 ‘우리 결혼하면―’이란 소리는 꺼냈어도 그 일은 아득히 멀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반짝이는 불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난 무슨 마음가짐으로 연애하려는 거지? 결혼을 위해서인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 당시 언니한텐 오랜 남자 친구가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고모와 고모부가 부모님 노릇을 해 주긴 했지만, 가족은 어쨌든 언니밖에 없었다. 연애도 하지 않는데 아민의 연애관이 흔들렸다.
외롭다.
그런데 그것뿐일까?
난 지금 다른 사람한테 도피하려 하는 건가?
물론 깊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꼬박꼬박 아민은 몸이 달아올랐다. 키스 그리고 그 밖의 이것저것― 아민의 몸이 아주 강렬하게 원했다.
누군가 날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더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맘껏 듬뿍,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사랑이 뭘까? 뭐기에 내 몸과 마음을 이렇게 불태우는 것일까?’
아민은 이 욕망이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었다.
‘욕망이 해소되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완전히는 외면하지 못하고 홀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건 다 자료조사지. 자료조사…….’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과 해외직구가 발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민은 자료조사를 핑계로 이런저런 것들을 언니 몰래 구입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그녀의 작업물에 쓰기도 했다. 욕망이 실로 기묘한 작가혼으로 승화되어 불타오르는 와중이었다.
짚신에도 제 짝이 있다던가?
임자가 나타났다.
‘헉…….’
그동안 아민은 저가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그냥 외로운 건지 언니가 떠나고 나면 다른 가족이 필요해 현실도피를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몸이 단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
‘헉?’
하지만 상대가 나타나자마자 그 고민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왜?
모든 고민을 한 방에 지워 줄 만큼 그 상대가 대단했느냐고?
‘나 그 사람 좋아하나?’
아니, 그 이전에 해야 할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하늘을 봐야 별을 따겠는데, 별을 또 따자면 그 별이 일단 땅으로 내려와 줘야 말이지. 일단 상대가 날 좋아해야 뭐 다음 단계의 고민도 할 수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좋아하는 거 맞나 봐.’
막상 그녀의 마음에 콕 박힌 상대가 나타나자 허아민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를 거절했던 것처럼, 누군가도 자신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은 내 상대가 아니에요’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아민은 잠자리에서 뒤척뒤척하며 온갖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 관심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확률의 일이었다. 다만 그것을 지금까지 너무 쉽게 경험했고, 또 온갖 곳에서 일어나는 통에 마치 공기처럼 흔하게 있는 일이라 착각해 온 것이다.
***
그런데 장장 7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비워 두었던 아민의 마음을 난데없이 사로잡은 남자가 누구냐고?
그 남자는 같은 동호회 회원이었다.
더불어 홀로 지내는 동안 아민의 눈이 꽤 높아졌던 건지 뭔지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주관적으로도,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그 사람은 얼마 전에 동호회에 들어왔는데, 신입이 들어올 때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을 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회사원입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있고요. 책을 언제 읽었는지 가물가물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흰 얼굴의 신입은 키가 크고 무척 반듯한 인상이었다. 아민은 무심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왼손에 반지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몰랐다.
‘예쁘게 생겼네.’
손은 크고 단정하고 무엇보다 손톱이 무척 예뻤다. 길쭉하고 끝이 둥글둥글했다. 아민의 시선은 그 손부터 시작해 검은 스웨터를 입은 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슴 부근에서 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생각보다 부피가 있달까, 덩어리감이 있달까.
‘운동했나……?’
자기소개는 다음 사람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아민의 시선은 계속 한곳에 있었다. 단정한 차림새의 몸에 말이다. 보다 보니 말인데, 어깨도 꽤 넓었다.
왜 머리를 빗다 엉킨 부근에서 빗이 머무르듯이 그리 시선이 갔는지 모를 일이다.
“아민 씨?”
그러는 동안 차례는 아민에게로 돌아왔다. 아민은 흠칫, 하여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갸웃하며 의아한 듯이 웃었다.
‘아.’
몇 차례의 자기소개다 보니 누군가 툭 치기만 해도 술술 나왔다.
“허아민이에요. 서른셋이고요. 로맨스 작가로 일하고 있어요.”
그날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책이 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말을 하려다가도 아민은 자주 입을 다물었다. 그녀 쪽에서 입을 열기보다는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신입이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신입은 모임의 분위기를 보려는 듯했다. 책을 읽고 감상을 말하는 데서도 말을 아꼈다. 그리고 사람들의 물음에 자주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콧대가 높고, 눈이 크고, 눈썹이 짙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을 때 입술이 예뻤다.
아민은 그날 그를 바라보다 시선이 자주 마주쳤다.
이 흰 얼굴의 남자는 그때마다, 빙긋 하고 웃었다. 반은 시선의 마주침에 순수하게 의아해하며 또 반은 혹시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아, 이후에 선약이 있어서요. 정말 아쉽네요.”
모임 장소였던 카페를 나오는 길에 동호회 모임장이 회원들한테 혹시 식사를 하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남자는 정말 아쉽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리고 커피값을 치르기 위해 지갑을 들고 서 있던 아민과 다른 사람들은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꼭 같이 밥 먹어요. 먹고 싶어요.”
어째서인지 그때 아민은 한 번 더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아민은 사람들과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남자는 먼저 나갔는데 카페 문을 여니 밖에서, 코트에 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발레파킹했던 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또 뵈어요.”
아민이 말했고, 남자는 빙그레 눈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요.”
때는 겨울이어서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났다.
아민은 모임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이차도 가졌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남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어째서인지 아민은 남자의 마지막 제스처가 계속 생각나 조금 발끈했다.
‘참 나.’
그런데 왜 발끈한지는 알 수 없어, 한참을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깨달은 것은 머리가 다 말라 가는 도중이었다.
‘그럼요.’
그 웃음이며 말에 아무 의미도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동호회에 참석했다가 분위기를 보고, 그대로 바이바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남자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고, 뒤풀이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더라.
이상하게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데 남자가 말한 제 이름보다 더 콱 박혔던 것은 남자를 이루고 있는 어떤…… 형태였다.
‘내가 여자이기에 망정이지. 남자가 여자한테 그렇게 시선을 주고 있었으면 이상한 취급 받았을 거야.’
아민은 자신이 그 정도로 굶주렸는지 의아해했다. 그리고 무척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아민은 침대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동호회 어플리케이션을 켰고 남자의 이름과 프로필 정보에 적힌 기타 신상명세를 확인했다.
남자의 이름은, 지상우였다. 나이는 올해 서른일곱 살, 생일은 십이월 십칠 일.
‘십이월이면 사수자리네.’
처녀자리인 자신과 궁합이 어떻게 되더라? 아민은 그런 게 왜 궁금하고 알고 싶은지 몰랐다. 당시에는. 그도 그럴 게 오늘 처음 본 남자인 것이다.
***
“그래서?”
허아빈은 추리소설을 읽거나 VOD로 영화를 볼 때 일단 가장 뒤 페이지를 펼치거나, 마지막으로 당겨 결말부터 확인하고 보는, 성격 급한 한국인이었다.
“계속 오기는 오는 거지?”
그녀가 채근했다.
“그 남자 계속 나오긴 하지? 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아직, 거기까지 안 갔으니까 말 좀 더 들어 봐.”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촘촘한 배경 지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말이야―.”
아민이 거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