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고백해서 혼내 줍시다-2화 (2/21)

02

박봉에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줄여서 워라벨, 이 부족한 그녀의 옛 직장에도 장점은 있었다.

“돈은 좀 있어?”

언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돈이 박봉인 대신 쓸 기회도 없다는 것이었다. 출판 편집자란 것이 꾸밀 시간이 있나 아니면 뭘 사 먹을 시간이 있나.

그녀가 근무했던 파주 출판단지란 곳은 롯데 아울렛이 자리 잡은 이후에도 정말 끔찍할 정도로 뭔가를 사 먹을 곳이 없었다.

먹지도 않고 뭔갈 사지도 않으니 별달리 재테크를 하지 않았는데도 돈은 있었다.

“얼마?”

“엉…… 4천?”

당분간은 그럭저럭 겨울 도토리 모아 놓은 다람쥐처럼 까먹어도 괜찮을 만한 돈이었다. 언니는 그녀의 말에 한참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럼 쉬어.”

그리고 말했다.

“엉?”

“너 힘들게 일한 거 내가 알지. 하고 싶은 거 생길 때까지 밥값, 집값은 대줄 테니 어디 쉬고 싶은 만큼 쉬어 봐.”

둘은 당시 서울 동작구 모 소재의 오피스텔에 함께 살고 있었다. 집은 자가였지만 공과금이며 식비 등, 사는 데 드는 기타 자질구레한 비용은 지금까지 약 4:6의 비율로 부담 중이었다. 그걸 언니가 내주겠다는 것이다. 일을 찾는 동안.

“언니잉…….”

아민은 찡해서 언니의 다리에 매달렸다.

“징그러워. 아무튼, 다음 직장은 허겁지겁 구하지 말고 찬찬히 생각 좀 해 봐. 너도 이제 곧 서른이야. 다음엔 어느 분야든 정착해야 하지 않겠어?”

“고마워. 나 언니밖에 없어.”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뭐 연애는 좀 뒷전으로 치우쳐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 만나던 친구들은 있었지만 직장 다니며 별 보고 출근, 별 보고 퇴근하다 보니 한순간 멀어졌다.

그래서 아민은 놀았다. 하루, 이틀, 삼 일, 또 한 달. 출퇴근하는 언니의 뒷모습, 앞모습을 바라보며 설거지, 청소 후 남은 시간 동안 혼자 놀았다.

책을 사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또 산책도 하고, 근처 구민센터에서 줌바 댄스를 등록해 허리를 열심히 털어 보기도 하고.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제 뭐 하지?’

심심해졌다.

삔둥삔둥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노는 것도 의외로 힘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민 스물아홉, 그녀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쉬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바라도 해 볼까?’

아민은 충동적으로 아르바이트 어플을 몇 개 다운받고 괜찮은 아르바이트가 있나 찾아보았다.

“언니, 나 일하게.”

있었다. 의외로.

아민이 만든 소고기뭇국을 먹던 아빈은 동생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좀 더 쉬지 않고?”

‘집에서 잘 놀다 말고 왜?’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아빈은 요즘 깨끗이 다림질된 유니폼들과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하니 정돈된 집 안, 매 끼니 제대로 차려져 있는 따뜻한 식사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얼굴도 굉장히 행복한 것 같고, 내 동생의 적성은 집안일에 있는 게 아닐까?

아빈은 요즘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의 직업을 굳이 바깥에서 찾을 필요 있을까…… 하고.

이렇게 가사 일을 잘하는데 얠 진작 결혼 정보회사에 집어넣고 본격적으로 신부수업 시켜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후회까지 들 정도였다.

“아냐, 나 이 정도면 많이 쉰 것 같아. 또 집 근처에 괜찮은 자리도 봐 뒀고. 본 김에 오늘 면접도 봤어. 며칠 후 결과 나온대.”

동생이 한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딘데?”

“콜센터.”

아민이 말했다.

“어?”

“아직은 뭘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돈은 벌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같아. 보험이랑 연금 든 거에서 나가는 돈도 있고…… 3개월만 소소하게 해 볼게.”

“야, 넌 서비스직이 장난인 줄 아니. 그러다 정신병원 치료 비용이 더 나간다.”

진상 고객에 이골이 난 아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얼굴 보고 하는 일도 아닌걸. 나 그리고 직장 다닐 때 독자들한테 책에 관련된 전화도 꽤 받아 봤어. 오타가 있냐 없냐. 이 작가 사상이 왜 이러냐. 그리고 작가들한테도 그렇고…….”

하지만 아민 쪽도 실은 진상 고객 비슷한 것을 많이 상대해 본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알아봤는데 아웃바운드보다 인바운드가 덜하대.”

나중에 알고 보니 아민의 눈에 들어온 일자리는 다른 콜센터보다 좀 더 진상고객이 적기도 했다.

“지하철 콜센터 일이야. 지하철 안이 덥다, 춥다, 그런 민원만 받아서 센터에 전달해 주면 되나 봐.”

민원량은 어마무시했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감이 있다.

어쨌든 그녀는 언니의 ‘얘 괜찮을까?’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3개월만 다니겠단 직장을 장장 1년 6개월을 다녔다.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민원을 받아 처리하는 일이었는데 많은 콜센터가 그렇듯 매니저부터 동료 직원까지 모두 여자들이었다.

‘일은 적성에 맞는데 말이야. 이렇게 일만 하며 살다 죽는 게 아닐까?’

이전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기나 거기나 모두 여자판이었다. 취향을 바꾸지 않고선 사내 연애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유전이 터졌다.

“언니, 나 일 그만두려고.”

“그래, 고객님들 상대하는 일이 정말 힘들지?”

“아니…… 그게 아니라 돈이 생겼어. 한 삼천만 원 정도…….”

그래, 로또보단 유전이란 말이 더 정확하겠다. 그것도 제가 파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삽질하고 있던 마른 땅에서였다.

축약하자면 이 믿기지 않은 행운은 다 그녀가 심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뭐?”

언니는 아민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데? 무슨 일인데? 어디서? 어디서 너한테 돈을 줘?”

“공모전 주최한 곳에서.”

식사를 하던 아민이 젓가락을 물고 중얼거렸다.

“무슨 공모전.”

“그런 게 있어. 그냥 작은, 소소한, 소설 공모전이었는데…….”

오후 4시에 집으로 퇴근하는, 친구도 없는 여자애가 할 일이 뭐겠는가.

“뭐 할 일도 없는데…… 글이나 써 볼까?”

그녀가 왜 괜히 출판사에 다녔겠는가? 책이 좋아서다. 아민은 의외로 학창 시절부터 문학소녀였고, 시간이 남아돌자 문득 열정이 불타올랐다.

‘연애하고 싶다.’

순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그녀가 주로 읽었던 소설은 저 물 건너온 할리퀸 소설에 치중되어 있었고, 그 소설엔 아주 낯뜨거운 묘사가 한 페이지에 한 문단 이상씩 나오곤 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성 있는 야설이었다.

‘와, 진짜 이런 거 저런 거 하고 싶어. XX도 하고 싶고 XXX도 하고 싶고 XXXX도 하고 싶고…….’

아민도 그런 걸 썼다. 클럽에 가서 하룻밤 만남을 가지거나 소개팅을 하거나 그게 무엇이든 현실에서 노력하는 대신, 소설 사이트에 말이다.

혼이랄까, 염원이랄까, 짓눌린 욕망 같은 것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땀 한 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출간 제의 메일들이 간간이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심심풀이 삼아 넣은 공모전에서 그녀의 소설이 덜컥 대상을 받은 것은.

“그럼 너 등단하는 거야?”

“아, 응? 뭐 그런 건 아니고, 그 비슷한 거긴 한데……”

소설은 소설인데, 고수위 문학 공모전이었다. 엄마 노릇을 하는 언니한텐 도저히 보여 줄 만한 내용이 아니다.

아민은 진땀을 흘렸다.

“……그냥 요즘 유행하는 웹툰 같은 거랄까. 대단한 건 아냐.”

“아니,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정도인데 대단한 게 아냐?”

그 시장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착한 언니는 그날 동생을 근사한 중식당에 데려간 뒤 맛있는 것을 사 주며 축하했다.

“아민아. 난 사실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하기 전까지 글 쓰는지도 몰랐으면서?’

아민은 언니의 말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 말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대로 쭉 나아가 봐. 언니가 네 꿈을 응원한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어? 배고픈 길이겠지만 내가 도와줄게!”

아빈은 장담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터진 게 유전이라고 했잖은가. 야망이 실로 간장종지만 한 아민은 이후 그녀로서는 차고 넘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서른셋, 지금 이 자리에 이르렀다.

직업은 연애소설(심지어 고수위) 작가인데 어쩌다 보니, 7년째 연애 한 번 못 해 본 상태에 이른 것이다.

언니도 답답하겠으나 나도 하고 싶거든, 하고 아민은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경력단절이 이리 오래되었는데 연애를 하는 게 뭐 쉬운가? 하늘을 바라본다고 남자가 비처럼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설령 내려온다 해도, 그 남자를 자기가 좋아하게 될 보장도 없는 것이다.

***

카페에서 소리를 질렀던 아민은 사람들의 시선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작게 웅얼거렸다.

“언니, 나 연애 어떻게 시작하는지 모르겠어.”

매 끼니 밥 먹듯이 한 예전이…… 까마득했다.

“넌 어떻게…… 그런 걸 쓰면서도 모른다 그러냐?”

이제 그 수위와 내용은 몰라도 대충 뭘 하는지는 아는 언니는 의아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뭐…… 그런 스킬…… 뭐 그런 걸 알고 사람들한테 공감받으니까 밥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언니…… 톨킨이나 J.K롤링이 마법으로 세계를 구하거나 드래곤을 잡을 필요는 없는 거거든? 쓰는 걸 진짜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으면 추리소설 작가들은 다 완전범죄 한두 번씩 저질러 봤게?”

그게 세간 사람들이 이 직업에 가장 많이 품는 환상이기도 했다.

로맨스 소설 작가가 로맨스에 조예가 깊을 것이라는……. 개뿔이, 적어도 아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적용도 불가능한 게 그녀가 지금까지 써 온 것은 납치 감금 등등 폭력이 난무하는 조폭물이나 뭐 현실에선 도저히 일어날 리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애착 판타지이긴 했으나 실제로 실현되면 큰일이다. 인생이 무너지게 된다.

“그럼 소개팅해.”

언니가 말했다.

“안 돼.”

아민이 말했다.

“왜?”

그녀는 어이없어했으나 동생의 다음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게 있잖아.”

아민은 웅얼거렸다.

“나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뭐야?”

아니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럼 이렇게 실랑이할 것도 없었잖아?

“그럼 밥 한번 먹자고 그래 봐. 뭐가 문제인데?”

“…….”

언니의 말에 아민은 침울해졌다.

“……거절당했어.”

“……뭐?”

“흑! 흡……!”

아민은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머리를 얹었다.

“그 사람 나 안 좋아해! 나 요즘 계속 까이고 있다고!”

그렇다. 아민은 고백 공격을 하고 있었다.

“너무 차여서 옆구리가 다 아플 지경이야!”

하지만 고백 공격도 웬만한 사람이어야 들어 먹히지.

아민이 좋아하는 사람은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요즘 그녀는 한창 마음에 드는 상대한테 찝쩍거리다 혼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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