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항간에는 이런 소리가 있다.
고백해서 혼내 주자, 하는.
학교 도서관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화자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고백해 약 47명을 효과적으로 쫓아냈다는 인터넷 밈에서 나온 이 우스갯소리는, 그 바탕에 제 이성적 매력이 현저히 떨어짐을 한탄하는 화자의 희화적 풍조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넌 대체 언제까지 혼자 있을 거니?”
현 삼십삼 세 허아민(직업: 프리랜서 뭐시기)에겐 하하, 하고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니었다.
“…….”
“연애 아예 안 할 거야?”
“아니…… 그게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지.”
커피숍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기가 막혀 하는 언니의 물음에 아민은 주눅 든 얼굴로 식어 가는 커피를 홀짝였다.
“다른 사람들은 뭐 사람 있어서 연애하는 거 같니? 노력하는 거지.”
언니가 재차 물었다. 보기엔 얼굴도 이 정도면 무척 예쁜 축에 속하겠고 성격도 그리 나쁘지 않고 직업도 이 정도면 괜찮겠고, 아무리 봐도 하자가 없는 이 미혼 동생은 이상하게도 벌써 연애를 하지 못한 것이 햇수로 7년째였다.
“아니, 나도 노력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야.”
“…….”
“진짜라고. 소개팅도 했잖아.”
이상했다.
‘참 나.’
언니의 눈으로 봐 객관적이지 못한 것일까? 하자도 없거니와 오히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쁜데 말이다.
‘좀 더…… 꾸미기만 하면 말이지.’
현 삼십오 세, 결혼을 육 개월 앞둔 모 항공사 스튜어디스인 그녀는 팔짱을 낀 그대로 기모 후드 티 차림의 동생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넌 내가 보풀제거기 선물해 줬으면 좀…… 하고 다녀라. 어?”
“아, 왜. 내가 남자 만나러 온 것도 아닌데.”
저 기모 티에 풀풀 난 보풀을 보니 아민이 대학교 1학년 때 샀던 그 옷이 맞나, 아니면 비슷한 디자인인가.
언니와 만나서 이렇게 입고 온 것이지 아마 다른 사람 앞에선 이보다 꾸밀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닮았는데.’
설령 저리 입는다 해도 좀 센스만 없다 뿐이지 귀엽지 않은가?
허아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 진짜 혼자 살다 죽으려고 그러나.’
대체 왜? 성격? 집순이인 성격 때문인 걸까?
아빈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하게 말해. 너 그냥 연애가 하기 싫은 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사랑의 신의 저주, 큐피드의 납 화살이라도 맞은 것일까?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은, 몹시 아름다운데 결혼을 하지 못하던 작은 왕국의 따님을 보고, 사랑의 신의 저주를 받아 납 화살을 맞았다 믿었다.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 통엔 황금 화살과 납 화살이 들어 있는데 황금 화살을 맞으면 그게 누구이든 사랑을 시작하게, 납 화살을 받으면 그 누구와도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공주님은 나중에 큐피드와 결혼이라도 하지…….
“나도…… 연애하고 싶다니까?”
“그럼 저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아라도 봐! 연애하자고.”
뭐 저주를 받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현재 7년째 연애를 하고 있지 못한 허아민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언니의 타박에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보채지 좀 마! 나도 절박하단 말이야!”
그녀도 정말 연애하고 싶었다.
“나도 연애하고 싶어! 정말 사랑이 하고 싶어!”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단 속담이 바로 이런 말에 적용되는 것일까?
“누가 내 맨살을 만져 주고 빨아 줬음 좋겠어! 일단 내 정신보다도, 내 몸을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밤에 잠이 안 와서 냉수마찰을 해야 할 지경이야!”
아민이 외쳤고 아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XX가 불타오른단 말이야!”
“아니, 이게 여기가 어디라고! 미친X아! 못하는 말이 없어!”
삼십삼 세 허아민, 현재 마음보다 몸이 불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직업은 사랑의 신에게 가호를 받지 않고는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
변명을 해 보자면,
그녀가 처음부터 연애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이십오 세의 겨울.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왕성한 연애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름 제 외모에 대해 자신감도 있었고 말이다.
‘재수 없게 들려서 어디에다 말은 못 하지만 나 정도면 꽤 예쁘지.’
늘 사람의 시선을 초강력 자석처럼 잡아끄는 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허아민은 예뻤고,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비교당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벗어나자 더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은 도깨비도 예뻐 보이게 한다 하질 않는가?
이미 학창 시절 풋사랑도 끝내고, 대학 시절부터 사회초년생이던 이십오 세의 겨울까지 소개팅도 해 보고 또 용기를 내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도 해 보고 그보다 더 많이 받아 보기도 하고, 그중에 골라 길게 길게 연애도 해 보고.
단맛 쓴맛을 초반부터 별 공백기도 없이 마음껏 맛보았달까?
그런 그녀의 연애 활동에 망조가 낀 것은…….
그녀의 취직 직후가 되시겠다.
이십오 세. 그녀는 이것이 제 이십 대의 마지막 연애가 될지 몰랐던 긴 연애를 끝내고 출판계로 굴러 들어갔다. 그곳이 제 사랑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이십칠 세의 겨울, 크리스마스.
“아저씨, 저희 거 먼저 걸어 주세요.”
“알았다니까.”
“저 안 보는 새 다른 출판사 거 걸지 마세요! 저 실장님께 죽어요! 진짜 저희 거 먼저 걸어 주셔야 해요!”
그녀는 이브 밤부터 인쇄소에 돗자리를 펴 놓고 살고 있었다.
다른 출판사도 이런 것일까? 정녕?
나의 저녁은 어디 갔는가?
때는 아직 워라벨이란 단어가 없던 시절이었다.
아민은 울고 싶었다. 꿈을 찾아 졸업 후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여길 왔건만, 사람이 쌀을 먹고 살지 꿈을 먹고 사는 게 아닌 것일까?
적어도 그녀가 다니는 직장은 그러한 것 같았다.
이 직장에 다니는 일은 정말 사람답게 사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겨우 밥 굶지 않을 정도의 박봉에 출퇴근 왕복 4시간의 직장, 마감이란 이름하에 이어지는 주말 출근, 출판 편집자 허아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작가들은 계약금을 받아 처먹고 왜 제때 원고를 주지 않는 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그런가?
“작가님! 집에 계신 거 다 알아요! 작가님! 작가님!”
아민은 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 일 년 혹은 이 년 동안 원고를 주지 않는 작가님 집 문을 두드렸다. 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쓰고 있어요! 정말 찾아오지 마세요! 저도 안 되는 걸 어쩌라고요!”
돈을 받았으면 안 되는 걸 되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 못할 거면 돈을 받지 말고 말이다.
아민은 작가라는 족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지하실에 집어넣고 군만두만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드보이>에서도 평범한 인간을 15년 가둬 두니 제 인생의 죄악에 대해서 있는 대로 써 내려갔는데 말이야. 우리 작가도 아무도 모르게 한 3년만 가둬 두면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작품을 써 내려가지 않을까?’
15년은 너무 심하니까 적당히…… 작가가 계약서에 쓰인 원고를 토해 낼 때까지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장장…… 4년, 4년 있었다. 아민은 다이어트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체중이 5kg가량 줄었고 더불어 수면 부족으로 인한 부정출혈과 두통을 겪었다.
연애?
“네? 인쇄사고가 났다고요? 흑흑.”
전쟁 통에도 애는 낳는다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일단 크리스마스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연애를 위한 잉여 시간이 날 리가 없었다.
***
그렇게 반 좀비로 산 지 3년에서 4년이 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야, 출판사에서 교정지에 붉은 색칠을 하며 야근하다 코피를 아이보리색 스웨터에 흘리던 아민에게 첫 번째 깨달음이 왔다. 연애…….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하고 싶다는 아니었고 과로사가 정말 코앞에 왔다……는 깨달음이었다.
‘나……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그래도 출판사들 중엔 대형이었고, 그녀의 팀은 인기 작가들을 몇 확보해 꽤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대리 진급도 코앞에 있었으나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어쩌겠는가?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공부를 하려고요.”
“그래, 아쉽게 됐어. 하지만 아민 씨의 꿈을 응원해.”
말은 청산유수였으나, 청운의 꿈은 무슨 당연 거짓말이었다.
아민은 살기 위해서 사표를 냈다.
그래서 이젠 시간이 나게 되었으니 연애하게 되었냐고?
아직 거기까진 약 3년이 남았다. 출판사를 그만둔 아민, 현 스물아홉 살을 코앞에 둔 스물여덟 살, 그녀는 스물아홉이 훌쩍 넘기까지 장장 4개월간 먹으며 몸무게를 도합 150% 회복했다.
그러고 나니 어떻게 되었냐고?
“너 이제 뭐 먹고 살 거냐?”
“…….”
“어?”
고된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언니의 물음에 얼굴이 반질반질하게 펴진 허아민은 말없이 손가락을 빨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뭐 계획한 게 있을 거 아냐?”
그렇다. 경력단절, 출판계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은데, 그 밖의 경력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게? 이제 뭐 먹고 살지?”
연애가 문제가 아니다. 먹고사는 게 문제지.
“아니, 계획도 없이 회사를 그만뒀단 말이야?”
“그게…… 죽기 싫어서 그랬지…….”
언니의 말에 아민은 웅얼웅얼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서른도 되기 전에 과로사 엔딩을 보고 싶진 않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어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