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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300)화 (300/300)

“레이븐 씨, 노크할 줄 몰라요?”

체스휘에게서 자연스럽게 몸을 떨어뜨리면서 레이븐을 눈으로 흘겼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에요? 사람이 포옹하는 거 처음 보나.”

얼마 전 같으면 체스휘와 이러고 있는 걸 들켰을 때 화들짝 놀라거나 괜히 시치미를 뚝 떼며 딴청을 부리는 등의 동요 어린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풋풋한 반응을 보이기엔 내 영혼이 너무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 두 사람, 이거 그…. 혹시 그냥 동료나 전우 간의 순수한 포옹인가? 어디에선가 프리 허그라고 부르는 그거?”

체스휘와 내가 너무 무덤덤해서 그런가? 레이븐은 살짝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가 이내 혼자서 오답을 도출해 내고는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레이븐은 원래 내가 살던 45세계에서 유행했던 개비스X이라는 위장약이라도 복용한 듯이 속이 시원해 보였다.

체스휘와 내가 교제하는 사이인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우리가 이렇게 찰싹 붙어 있는 걸 레이븐은 처음 보는 건가? 그래서 이러나?

“단순한 동료나 전우 사이?”

레이븐의 말을 들은 체스휘가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야트막한 웃음을 흘렸다. 체스휘와 나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레이븐의 말을 들은 후 그의 몸이 나한테 다시 가까이 기울어졌다.

체스휘의 고개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는 레이븐을 응시한 채 미끄러뜨리듯이 손을 움직였다. 온기가 감도는 손가락이 조용히 내 옷소매 밑의 팔뚝을 훑고, 그의 다른 한 손은 내 허리춤을 가볍게 감쌌다.

“그래 보여요?”

희미한 웃음이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분명 이 정도면 과한 접촉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전체 연령가에서 심의 불가 판정을 받을 정도로 야릇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귀가 은근히 홧홧해질 만큼 체스휘와 남부끄러운 뭔가를 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븐이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공 지진이 일어난 눈으로 나와 체스휘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버버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븐이 떨리는 손으로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횡설수설 말했다.

“이, 이상한데? 너희들 원래… 이렇게 대놓고 공개 연애 했었어? 아니, 물론 둘이 만난다는 사실은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들은 게 있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왜 이렇게 뻔뻔하게 붙어 있어? 원래 사내 연애 하면 좀 부끄럽고 겸연쩍어서 남이 보는 앞에서는 거리를 더 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걸? 어?”

그는 자신의 말에 동의해 줄 사람을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지금 이곳에는 체스휘와 나 말고 레이븐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레이븐의 말이 좀 웃겼다. 그런 사람이 과거에 그렇게 대놓고 세라를 꼬드기고 다녔나?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없지만, 만약 레이븐이 세라와 잘되었다면 그쪽도 사내 연애라고 할 수 있었던 건데 말이다.

나처럼 레이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있던 체스휘가 뒤이어 우아한 어조로 귀족 영애 화법을 사용해 레이븐을 힐난했다.

“방해꾼 주제에 쓸데없이 말이 많네요. 내가 레이븐 씨라면 쥐꼬리만 한 눈치라도 챙겨서 지금 당장 이 방에서 사라질 텐데 말이에요.”

“사, 사라지라니…. 그, 그래야 되는 건가? 그래? 지금?”

레이븐이 과도한 혼란과 경악에 머리가 망가진 것처럼 뚝딱거렸다. 그는 체스휘에게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으면서 꼭 조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뒤돌아서 비틀거리며 문으로 걸어갔다.

“크흠. 물어볼 거 있으니까 잠깐 거기 서 봐요.”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그런 레이븐을 붙잡았다. 체스휘가 불만스러운 듯이 손끝으로 내 소매 안쪽의 팔을 아프지 않게 갉작거렸다. 그러면서 꼭 개가 주인에게 치대는 것처럼 레이븐을 그냥 내보라는 듯이 나한테 기댄 머리를 내 목덜미에 간지럽게 비비며 문질렀다. 그런 행동이 제법 귀염성 있어서, 그럴 때가 아닌데도 마음이 좀 몽실몽실해졌다.

나는 체스휘의 등을 토닥여서 달래며 우리를 멍하게 쳐다보는 레이븐에게 물었다.

“레이븐 씨, 갑자기 왜 들어왔어요? 혹시 지금 손님 왔어요?”

“어, 어어. 손님…. 그렇지, 손님이 왔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레이븐의 눈은 세르쥬의 눈빛과 거의 비슷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레이븐이 내게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왔으면 어쩌려고?”

“가서 인사해야죠.”

“인사? 7호실, 지금 상태 괜찮은 거 맞아? 혹시 또 족치니 어쩌니 하면서 헛소리하려는 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과격한 사람으로 보여요?”

“어….”

“어? ‘어’라고?”

“아, 아니…. 괜찮으면 뭐, 됐고….”

내가 정색하자 레이븐이 쭈그러들었다. 어쩐지 그는 아까보다 급격히 풀이 죽어서 기운이 없어 보였다. 체스휘가 시들시들한 레이븐을 보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

“레이븐 씨가 걱정스러운가 봐요. 정 그러면 우린 그냥 여기 있어도 되는데.”

“…그러네! 그냥 인사하러 가는 게 낫겠네! 이제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잖아! 아무렴 양육자들이 다 같이 얼굴을 보여야지. 그럼 빨리 가자, 7호실!”

레이븐은 체스휘의 의도와 달리 갑자기 침침하던 눈이 번쩍 뜨인 듯이 함께 손님맞이를 할 것을 주장했다. 기력을 되찾은 레이븐이 오히려 앞장서 나를 마구 재촉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아 보이는 체스휘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체스휘는 여전히 기분이 조금 언짢아 보였지만, 그래도 레이븐만 치워 버리려고 시도하거나 나를 막으려고 하지 않고 잠자코 따라왔다.

복도는 얼추 치운다고 치운 것 같았으나 아직도 지저분했다. 카드리고 놈들이 쑥대밭으로 만든 응접실에서는 당연히 손님을 맞이할 수 없어서, 그나마 깨끗하고 또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과 가까운 방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레이븐이 말했다.

그렇게 레이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던 중에, 나는 문득 체스휘에게 계속 물어봐야지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체스휘를 잡아당겨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참, 지금 묻는 건 좀 뒷북 같지만 루시오는 어떻게 됐어요?”

지금 레드포드 저택에 방문한 손님들은 루스카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루스카가 그들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이대로 그를 저택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루스카를 막을까 생각하다가,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에서 만났던 그의 쌍둥이 형제를 떠올렸다.

“작년에 미카엘 씨가 부상을 입은 루시오를 데려갔잖아요. 악마의 화원에 같이 들어가 놓고 막상 돌아올 때는 혼자였고. 혹시….”

나는 미카엘이 그때 데려갔던 루시오가 죽은 건지 체스휘에게 확인하려고 말을 시작해 놓고,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말끝을 흐렸다. 체스휘가 나를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가까이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데려오면 좋겠어?”

“데려올 수 있어요?”

나는 체스휘의 말에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어쩌겠어. 이하린이 복닥거리는 게 좋다는데.”

놀랍게도 루시오는 어딘가에 살아 있는 모양이다. 그때 미카엘의 처치가 늦지 않았던 듯해서 다행이었다. 루시오가 있으면 루스카도 굳이 위험하게 저택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겠지? 마음을 의지할 상대도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때 그렇게 헤어진 소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고 기뻤다.

“둘이 뭘 그렇게 소곤거려…! 떨어져, 떨어지라고!”

그런데 우리가 자꾸 귓속말하는 게 눈꼴 시렸는지, 레이븐이 간도 크게 체스휘와 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씩씩거렸다. 나는 자꾸 거슬리게 구는 레이븐을 찡그린 눈으로 보다가, 문득 잊고 있던 아주 중요한 걸 기억해 냈다.

“아, 맞다. 잠깐만요. 나 챙겨 가야 하는 게 있는데, 지금 생각났어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걸 잊을 수가 있지? 나는 자책의 의미로 이마를 손으로 치며 서둘러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것을 고이 챙겨 들고 다시 체스휘와 레이븐이 있는 복도로 나왔다.

체스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레이븐은 나를 보고 기겁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아까 체스휘와 내가 있는 방에 들이닥쳤을 때처럼 그는 경악한 얼굴로 나를 손가락질하기까지 했다.

“7, 7호실? 왜… 또 총을 가져온 거지?”

“왜겠어요?”

“설마 그걸 들고 손님들한테 가려고?”

“그럴 생각이니까 굳이 이걸 지금 챙겨 왔겠죠?”

“상태 괜찮다며! 이제 헛소리 안 할 거라며!”

“상태 좋고, 내가 하는 건 헛소리가 아니에요.”

“자기는 그렇게 과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 놓고…!”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어요? 지금 하는 말이지만, 레이븐 씨는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네요.”

레이븐이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기가 막힌 듯이 어버버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 그럼 갑시다.”

나는 그런 레이븐을 뒤로 하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2호실, 안 말려? 진짜 이대로 가는 거야?”

“뭐, 일단은 좀 두고 볼까 싶어서.”

“진심이냐고…!”

“뭣 하면 레이븐 씨가 막지 그래요?”

“난 7호실 못 이겨!”

“유감이네요. 나도 그런 모양이라.”

뒤에서 레이븐의 다급한 목소리와 거기에 대비되는 체스휘의 나직한 목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복도가 시끄러워서 나와 봤는지, 가까운 방에서 올리비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앞서 말했듯이 체스휘와 내가 있던 방과 올리비아가 아이들을 살피는 방, 그리고 길버트가 손님을 맞고 있는 방은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자, 잠깐만. 7호실 자기? 왜 또 그런 흉악한 걸 손에 들고 있어?”

올리비아가 나를 발견하고 두 눈을 흔들며 문밖으로 서둘러 한 발짝 튀어나왔다.

마침 잘됐다. 너희들, 내 동료가 돼라.

“미안하지만 다들 공범이 되어 줘야겠어요.”

나는 올리비아와 레이븐의 당황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손님이 있는 방문 앞에 위풍당당하게 섰다.

“잠깐만!”

“멈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하고 앞에 있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손에 쥔 총을 고쳐 들며 그들을 향해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7호실 양육자예요.”

현재 레드포드 저택에 있는, 그리고 또 앞으로 이곳에 보내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제부터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우리 함께 오순도순하게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오늘이 바로 그 기념비적인 첫날이었다.

<본편 완결,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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