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콘라드처럼 포박당한 상태로 감금당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머리를 식히라고 방에 격리당했다. 아무래도 내가 앞으로 방문할 중요한 손님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 카드리고 고용인들 같은 꼴로 만들까 봐 심히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세 양육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결국 역할을 분담하고 흩어졌다. 올리비아는 아이들이 있는 옆방으로 가고, 길버트는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맞이하러 1층 로비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레이븐은 나를 격리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레이븐쯤이야 힘으로 뚫고 나가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린 씨도 참. 그렇게 대뜸 양육자들을 포섭하려고 할 줄은 몰랐네요.”
나와 함께 방에 남은 체스휘가 전혀 애석하지 않은 표정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기대하는 게 뭔지는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있어요?”
양육자들은 그래도 나와 가장 가까운 양육자인 체스휘에게 나를 설득하거나 멘탈 케어를 좀 해 보라는 막중한 책임을 주었으나, 그건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체스휘는 나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불난 데 기름을 부을 사람이었다.
“나도 으니끄 아므 물 흐지 므유….(나도 아니까 아무 말 하지 마요….)”
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 속에서 떫고도 쓰린 가슴을 끌어안은 채, 마른세수하듯이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애초에 동료 같은 걸 왜 모으려고 하지? 역시 이하린은 나 하나로 만족이 안 되나?”
그런 내게 가까이 다가온 체스휘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무엇보다도 이하린의 체질로 뭘 어쩌려고?”
그의 입술에 나를 비웃는 듯한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양육자들까지 모로스로 변하는 꼴을 보려고?”
왠지 체스휘는 나하고 서로 완전히 정체를 까고 난 뒤부터(?) 이런 삐딱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중요한 문제를 짚고 있었기 때문에, 속이 뜨끔해서 체스휘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읊조렸다.
“아까부터 지금까지도 안 나왔잖아요…. 체스휘 씨가 뭔가 한 거 아니에요?”
지금은 확실히 주변이 잠잠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더 이상 모로스가 될 만한 죽은 사람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쪽 세계의 레드포드 저택으로 옮겨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인간들까지 갑자기 모로스로 변해서 나를 공격하지 않았던가?
“아까 카드리고 놈들이랑 싸울 때도 체스휘 씨가 시스템을 건드렸던 거죠?”
“왜, 또 글씨가 깨져 보이기라도 했어요?”
“그것도 그렇고… 그때는 모로스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공격을 안 하던데. 꼭 내가 투명 인간이라도 돼서 눈앞에 있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체스휘는 내 말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모로스가 린 씨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기보다는, 같은 동료로 인식해서 공격하지 않는 거라는 말이 더 정확할 텐데.”
그의 말에 미간에 움찔거리며 힘이 들어갔다.
모로스가 날 투명 인간으로 취급한 게, 나를 동료로 인식해서 그런 거라고?
물론 내가 유사 모로스는 맞지만, 막상 체스휘의 입으로 저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심히 찜찜해졌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잠시만.”
내 턱에서 손을 뗀 체스휘가 아까 우리 둘이 조용한 방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숙여 나한테 더 가까이 접근했다. 이번에도 시스템을 살피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체스휘에게 익숙하게 끌어안긴 이후, 목 뒤쪽의 옷깃 속으로 불현듯 서늘한 손이 파고들어서 몸을 흠칫 떨었다. 체스휘의 손이 내 살결을 간지럽게 훑으며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파직!
“앗, 따가워!”
갑자기 체스휘의 손이 닿은 어깻죽지에 정전기가 이는 것처럼 따끔한 느낌이 들어서 소스라쳤다.
방금 뭐지? 체스휘가 건드린 시스템에서 거부 반응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번에는 체스휘의 다른 손이 내 허리춤에서 골반 쪽으로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의심의 시선이 무색하게도, 다음 순간 체스휘가 그의 목적은 이것이었다는 듯이 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뭔가 했더니, 다이안이 나한테 맡겼던 악마의 화원의 씨앗이었다. 이번에는 지하실의 문으로 영혼만 이동한 게 아니라 린 도체스터의 육신으로 그대로 옮겨 와서 다른 소지품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듯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손에 쥔 걸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체스휘가 이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이 시스템이라는 거, 아직은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왠지 린 씨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번엔 이하린이 갑자기 기억을 되찾은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와 패턴이 달랐던 게 좀 이상했는데 이유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해서.”
“그 이유가 뭔데요?”
“이 세계, 그러니까 내 무의식이 이미 시스템에 어느 정도 관여한 상태인 것 같다고 해야 할지. 린 도체스터의 육신이 가진 특수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영혼석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무슨 말이지?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체스휘는 더 자세히 설명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체스휘도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인 걸 보면, 그도 아직 구체적인 정보는 알아내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나는 방금 따끔한 느낌이 들었던 어깻죽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곧 딱딱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이건… 44세계의 기술을 집약시킨 가이드인데. 그러고 보니 원래 이번 회차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시스템 창이 안 보이다가, 라파엘을 만나 가이드라는 걸 교체한 뒤에 반응이 있었다. 너무 초반의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혹시 이게 중요한 힌트 같은 건가?
“이것도 다시 잘 가지고 있어요. 일단은 이하린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체스휘가 건네주는 동그란 씨앗을 다시 받아 들어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다이안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진짜 부적 같은 효과가 있는 걸까?
“영혼석이라고 했죠? 이거, 악마의 화원에 있는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진짜 영혼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상징적인 이름인가 보다. 혹시 그 괴물 꽃들의 영혼이라도 들어 있는 줄 알고 찝찝했는데 그건 다행이었다.
그런데 안심하고 씨앗을 챙기는 나를 체스휘가 묘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금방 사라져서 혹시 내가 지금 예민해져서 잘못 봤나 싶었다.
나는 미약하게 의혹 어린 마음을 품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장 중요한 걸 확인했다.
“아무튼, 시스템 문제는 체스휘 씨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체스휘를 쳐다봤다. 시스템이 나를 제거하려고 또 모로스와 악령들을 불러들이면 나도 더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우길 수 없었다. 앞으로 뭐든 내 힘으로 척척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체스휘의 도움이 필요했다.
체스휘는 잠깐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실 그는 진실과 상관없이 내게 시스템을 제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뭘 하려고요?”
하지만 체스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이건 이미 내 물음에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진정한 의미의 혁명군이 한번 되어 볼까 하고요.”
체스휘가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삐뚤게 기울였다.
“그렇구나. 잘해 봐요.”
“좋아요, 우리 함께 잘해 봅시다.”
“아니, 혼자 잘해 보라고. 은근슬쩍 나는 왜 끼워 넣는데?”
“우린 한 세트잖아요.”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몰아가면 체스휘가 결국은 어느 정도 못 이긴 척 받아 준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다. 체스휘가 기가 찬 듯이 입매를 더 선명히 비틀었다.
“이하린은 내가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어, 지금 방해 안 할 거라고 단언한 거예요? 나 지금 똑똑히 들었어요. 이것도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요.”
내가 반색하자 체스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는지, 그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를 달래 줘야 할 때라는 걸 깨닫고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봐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체스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그를 토닥이며 말했다.
“있죠. 나한테는 당신이 꼭 필요한데, 그건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혹시나 또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체스휘는 아무 말 없이 나한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품에 안긴 남자에게서 불길하고도 위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것처럼 지금 또 흑화할 각을 재던 중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내 체스휘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7호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은 가라앉은….”
바로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방으로 막 들어서던 레이븐이 나와 체스휘를 보고 제자리에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뭐, 뭐야, 둘이?! 당장 떨어져! 내가 버젓이 문 앞에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레이븐은 꼭 남편과 첩의 사통 현장이라도 목격한 본처라도 되는 것처럼 난리 법석을 피웠다.
체스휘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내 위치에서는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서늘한 시선이 레이븐에게 꽂혔을 것 같았다.
나는 체스휘가 다시 흑화하기 전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