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잠깐 사이에 비상한 계획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일단 카드리고 놈들이 말한 5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어서, 애꿎은 희생양이 생기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내비칠 생각이었다.
타앙!
“린 도체스터! 이쪽에 있다!”
보란 듯이 총질을 하며 2층 복도에 나타나자,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인질들과 방에 있는 놈들을 제외하고 문 앞을 지키던 놈들의 절반 정도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유인하듯이 일부러 대응 사격을 한 번씩 하면서 뛰었다.
이 상황에서 여러 명을 상대하기는 무리라, 일단 한 놈씩 처리하기로 했다.
잠시 후 나를 쫓던 세 놈 중에 두 놈은 따돌리는 데 성공해 한 명만 내 뒤를 바짝 쫓아왔다.
쥐새끼 같은 게 총알을 잘도 피하네. 쓸데없이 발이 재빨라서, 그 와중에도 놈은 벌써 나를 따라잡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들고 있던 총으로 상대방을 휘갈기며 나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날붙이를 피했다.
이렇게 가까워진 거리에서는 장총을 이용하기 불편했다. 그래서 나도 아예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68/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69/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70/100)]
나는 시스템 창으로 알 수 있는 다이안의 상태를 힐끔 확인했다.
스트레스 지수가 꾸준히 올라가고 있긴 했지만, 큰 폭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또 이 정도 스트레스면 생각만큼 높은 편은 아니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다이안은 아직 카드리고 놈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잘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가뜩이나 아까 총에 맞아 피가 찔끔 흐르고 있는 옆구리가 칼에 또 한 번 찢겼다.
나는 다시 한번 내게 달려드는 사람의 머리를 장총으로 갈긴 뒤 거리를 벌렸다.
“카드리고에서 내 시체를 들고 오라고 하던가? 날 죽이러 왔으면 본인이 죽을 각오도 한 거겠지?”
“널 죽일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도 아깝지 않다!”
카드리고의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충직했다. 도대체 사람을 뭐로 꾀어내면 이렇게 충성심 높은 하인들로 키울 수 있는 건지 어떤 의미로는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린 도체스터, 넌 이 저택에 네 편이 있다고 생각하나? 다른 자들이 널 도와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허튼 기대라고 해 주지.”
그 비웃음의 이유를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놈의 뒤로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도끼를 든 레이븐이었다.
“7호실 미안….”
그는 어둡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보다시피 양육자들은 전부 이쪽에 붙었다.”
“레오가 인질로 잡혀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린 도체스터, 넌 오늘 이곳에서 죽을 거다!”
카드리고의 고용인이 다시 나를 공격했다. 다가온 레이븐이 옆에서 함께 도끼를 휘둘렀다.
콰앙!
언젠가 나도 사용한 적이 있는 레드포드 저택의 비상용 도끼가 둔탁한 소음을 내며 벽에 박혀 들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내가 아니라 카드리고 고용인의 머리 위였다.
하마터면 레이븐의 도끼질에 머리에 구멍이 날 뻔한 카드리고의 고용인이 기겁했다.
“이, 이 멍청한…! 도끼를 어디로 휘두르는 거야!”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이 그만 삐끗해서.”
레이븐이 급히 사과하며 벽에 박힌 도끼를 빼냈다. 레이븐은 어딘가 허술한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실수로 손을 삐끗했다는 말이 왠지 진짜같이 들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레이븐은 들고 있는 도끼를 다시 한번 내가 아닌 카드리고 고용인에게 휘둘렀다.
쾅!
“너…!”
이상함을 깨달은 놈이 레이븐의 도끼날을 피하며 눈을 홉떴다.
나는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카드리고 고용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탕!
그렇게 한 놈을 처리했지만, 총소리가 울려서 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7호실, 이쪽!”
레이븐은 손에 도끼를 들고 나한테 따라오라는 듯이 턱짓했다. 나는 잠깐 그런 그를 보다가, 방금 처리한 카드리고 고용인을 챙긴 뒤 잠자코 레이븐의 뒤를 따랐다.
“그건 왜 데려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요.”
레이븐이 나를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인간 보듯이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더 설명하는 대신, 복도를 빠르게 이동하며 다른 궁금한 걸 물었다.
“레이븐 씨…. 방금 왜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을 공격했어요?”
“왜는 왜야? 저놈들, 애들하고 우리를 노리고 저택에 기어들어 온 놈들이라며?”
“저 사람들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믿은 거예요?”
“당연한 거 아냐? 저놈들보다는 7호실 말을 믿어야지.”
그런데 의외로 레이븐은 오히려 나한테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꾸해서,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뭐, 뭔가 좀 이상한데? 우리가 이렇게 신뢰 넘치는 관계였던가?
“크흠, 그래도 우리가 그 정도 정은 있잖아? 왜, 설마 내가 진짜 저놈들하고 편 먹고 7호실을 공격할 줄 알았어? 좀 섭섭하네.”
아, 그러고 보니 레이븐은 나를 향한 호감도가 연애 루트가 가능할 정도로 쓸데없이 높았지?
왠지 수줍은 듯이 나를 힐끔거리는 그의 모양새를 보니 지금 나를 도와주는 게 완전히 순수한 마음은 아닌 듯했지만….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도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무튼, 레이븐은 예상 밖으로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나와 같은 편이 되는 것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만약 이게 나를 속이려고 고도로 머리를 쓴 전략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레이븐에게는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속일 만한 주변머리가 없었다.
“다른 양육자들은 2층에 있어. 저놈들하고 같은 편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거짓말이고, 기회를 봐서 애들을 빼내려고 상황을 살피는 중이야.”
레이븐뿐만이 아니라 다른 양육자들도 저놈들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니, 좀 의외였다. 이건 혹시 레이븐이 속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약간 의심했다.
그러나 과연 레이븐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때마침 복도의 빈 공간을 타고 시끄러운 소음이 전해져 왔다. 아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감히 우리 쥬쥬가 있는 저택 안에서 내 허락도 안 받고 함부로 총질을 해?!”
들어가 보니 올리비아가 완전히 활개를 치고 있었다.
우드득!
길버트는 조용했지만, 그래도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매우 신속하고도 정확한 움직임으로 적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숨통을 하나씩 끊고 있었다. 힘줄이 돋은 그의 굵직한 팔이 상대방의 목을 감싸 꺾을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이런 어리석은! 린 도체스터를 넘기면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이미 애들을 인질 삼아 놓고 어디서 헛소리야!”
레드포드 저택에서 다른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받고 엄선된 사람들이라 그런지, 양육자들은 내 생각보다 전투력이 뛰어났다. 카드리고 고용인들도 양육자들이 이 정도로 움직임이 매서울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 비천한 하급 세계의 인간들이! 그냥 인질들을 전부 죽여! 죽…! 뭐, 뭐야!”
캬아악!
바로 그때, 모로스까지 출현하면서 저택은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방금 죽은 따끈따끈한 인간들이 곧바로 새로운 영혼을 받아들여 모로스로 변신했다. 내가 여기까지 직접 끌고 와서 방금 카드리고의 고용인들 사이에 던진 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빨리 여러 마리의 모로스들이 나온 데에는 역시 내가 가진 시스템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모로스는 당연히 아군과 적군을 따로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모로스에 대한 건 크게 대비하지 않고 저택에 온 카드리고 고용인들은 지금의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모로스는 그중에서도 아이들과 나를 더 많이 공격했는데, 다행히 길버트가 방의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타앙!
나는 방에 있는 모로스들과 카드리고의 고용인들을 차례로 저격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카드리고 쪽의 공격에 조금 다쳤으나, 그래도 레이븐이 옆에서 나를 도와줘서 이번에도 즉사할 정도의 치명상은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양육자들과 함께 이렇게 다 같이 같은 편을 먹고 적을 처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예전에 저택 안의 성수가 전부 망가졌을 때, 한밤중에 모로스들이 나타나 모두 함께 대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난 체스휘와 다른 곳에 있었고, 양육자들과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합류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그들이 이렇게 나와 함께 카드리고 놈들을 공격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 난장판 속에서, 나는 문득 문밖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목격했다.
“앗! 어디가, 7호실?!”
“밖에도 처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여긴 맡길게요!”
모두가 뒤엉켜 싸우고 있는 현장에서 급히 벗어났다.
“거기 서!”
타앙!
내가 큰 소리로 외치며 위협 사격을 하자, 앞서 움직이던 사람이 멈춰 섰다.
“좋은 말로 할 때 뒤돌아.”
그는 내 말에 잠깐 가만히 있다가, 이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7호실 양육자님.”
눈에 익은 레드포드 저택의 고용인이 나를 보고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것 참,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택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나서 어찌나 걱정했었는지…. 마침 7호실 도련님을 발견해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던 중이었습니다.”
나는 시선을 힐끗 미끄러뜨렸다. 그에게 업힌 다이안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지금 내 시야에 비친 남자의 표정과 말은 퍽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나한테는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래? 피신을 저택 밖으로 시키려 했단 말이지?”
나는 총괄 집사를 겨눈 총구를 치우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